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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대한 답은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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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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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생명현상을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던진 이 질문에 도전을 받은 많은 학자들이 생명현상을 설명하려는 노력으로 노벨상을 받았지만 생명은 여전히 신비에 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은 생명을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만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생명현상을 과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이해하지만 생명의 더 깊은 차원인 영적으로 이해하고 또한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생물학이나 과학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 이해하고 믿어도 생명은 여전히 신비롭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살아 있다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숨을 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에 대하여 생물학이나 사회학을 넘어 생물학적 호흡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도 있고 죽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분명히 생물학적으로 죽었지만 성경은 지금도 그들이 살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호흡하지 않고 사는 방식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이해하는 수준에서의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경계가 없습니다. 부활생명, 즉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가 이해하는 수준에서의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영적 생명의 살아 있음은 하나님을 지향하는 현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향하는 영적 생명의 특징은 마치 식물이 태양을 지향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인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지향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지향하는 영적 생명은 자신과 죄에 대하여는 작동하지 않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이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죄에 대하여는 단 번에 죽으심이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사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롬 6:10)라고 하면서 그를 믿는 신자들도 예수님처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이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길 지어다.”라는 표현은 사실과 현실이 다름을 전제한 것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들이지만 그 사실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믿음도 부족합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실감이 안 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여길 지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실감이 안 날지도 모릅니다. 실감이 안 나도 그렇다고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고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들이지만 현실은 반대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죽은 자요 죄에 대하여는 산 자라는 표현에 걸맞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본능을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은 소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 본능은 하나님을 지향하지 않고 대항합니다.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체는 살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에게 가장 좋은 상태를 지향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한다고 합니다. 동식물 뿐 아니라 미생물이나 세포까지도 가장 편한 상태를 지향하는 활동을 한다고 합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통해 그런 사실을 이론적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세포 하나에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까지 모든 생명체는 편안한 상태를 위한 이기적 노력으로 진화하며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못한 과학자는 이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 설명이 성경적이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인간 생명의 현상을 상당할 정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론이 설득력을 갖게 되고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자녀들까지 편안하고 어려움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도 모든 그의 자녀가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고난도 주시지만 그 고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모든 사람들은 편안한 삶을 원하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자녀들이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요즘 기독교는 이런 측면을 강조하여 마치 평안과 형통만이 복인 것처럼 전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의 한 측면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평안하고 형통한 것만은 아닙니다. 신앙생활 잘 하는 것과 형통과 평안한 삶이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해도 불행을 피하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도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극심한 고난을 주시는 것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어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낙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고난의 의미와 유익을 알게 되었습니다(시 119:67,71).

고난 자체는 삶의 목적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무조건 고난을 당해야만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도 고난과 불행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피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고난은 무조건 피하고 저돌적으로 형통만을 추구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누구나 고난은 피하고 싶고 형통을 원하지만 고난이나 형통의 유무로 신앙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어려운 일을 피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잘 못된 것은 아니지만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피할 길도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고난을 대면하고 당당히 맞서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당한 고난을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라고 묘사하였는데,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직무를 감당하다가 그와 같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사야 뿐 아니라 여러 많은 선지자들의 형편이 그랬습니다. 이사야는 고난을 직면했고 자포자기 한 것이 아닙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사 50:7). 우리는 조금만 자존심이 상하거나 기분이 나쁜 말을 들어도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가족 간에도 극심한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자존심에 대해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거룩하고 경건에 관한 일에는 무덤덤하고 자신의 이해타산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에는 심하게 화를 냅니다. 이사야도 천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도 우리처럼 화가 날 때도 있었고, 분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라고 억울하지 않고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는 것은 매순간 그렇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방향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 흔들리다가도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이사야처럼 하지는 못하지만, 처음에는 화를 내고 싸우다가도 화를 낸 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맡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란 단숨에 고도의 영적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따르고 믿고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이사야의 고백에 그런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잘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의 고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사야는 고난에서 자신의 인격과 의지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의 토대는 하나님 경험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세상의 가치 있는 사상이나 이론을 전하거나 가르치는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경험에 매달렸습니다. 그들이 온갖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소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경험 때문입니다. 그는 그에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까이 계시는 것은 자신을 돕기 위해서인 것을 믿었습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가 누구냐?”(사 50:8,9).

그런데 이사야는 자기의 적대자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하지만 이사야가 죽을 때까지도 적대자들은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악한 권력자들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있지만 현실은 20년, 30년을 넘게 가는 악한 권력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사야가 여호와께서 적대자들을 파멸시키고 자신을 지켜주신다고 한 말이 비웃으며 조롱하였습니다.

이사야가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이 옷처럼 해어진다고 한 것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성경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가 악한 대적들이 옷처럼 헤어진다고 한 것은 그들이 당장 망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한 자가 의로운 자를 괴롭히면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않으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언젠가는 가만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 그렇게 하실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세상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고 현실에서도 심판하실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악한 자들이 기세등등하게 오래 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악한 자들이 옷처럼 헤어진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을 말하는 것입니다. 적대자들을 향한 이사야의 경고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또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행동에 대하여 즉각적인 권선징악으로 다스리시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것으로 인하여 악한 자들은 악을 행하는 일에 더욱 담대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하여 즉각적 권선징악의 원칙으로 사건을 제단하고 이해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힘 센 사람 약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이긴 사람 진 사람을 함부로 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가 비록 고난과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자기가 당한 수치와 모욕과 고난을 사역과는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당한 억울함 때문에 화풀이 식으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편적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당하는 일이 어떻든지 간에 그가 선포해야 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이사야는 그 자신도 옷처럼 헤어질 존재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하지만 이사야에게는 옷처럼 헤어지는 인간 영적 실존적 상황에 대한 대안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대안을 하나님 경험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절망적 실존에 대한 회답이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임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에 집중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옷처럼 해지거나 좀에 먹히는 인간의 처지를 벗어나게 하시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인간은 옷처럼 헤어지고 좀에게 먹히는 존재이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온갖 모욕과 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당당히 맞설 수 있습니다.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6-9)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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