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하례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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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7-01-0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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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다닐 때 어느 해 설이 지난 며칠 후에 몇몇 친구들과 존경하는 교수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그 교수님은 세배를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세배는 하지 않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모두가 며칠 전에 교회에서 있었던 송구영신 행사와 설 명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중 누군가 교수님께, 세배도 안 받으시는데 설날에 뭘 하셨느냐고 여쭤보았더니 몇몇 교우들과 산에 갔다 왔다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은 그 대답에 이어 그리스도인들이 설 풍습을 따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우리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의 질문은 설 풍습이 비 성경적이라는 점을 지적하시려는 것임을 알았지만 반론을 제시하기엔 우리들의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평소에 존경하는 교수님이지만 설의 풍습까지 비 성경적이라는 말씀에 당황하면서도 좀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 온 후 한 동안 설 풍습의 성경적 근거를 찾아보려고 노력을 했는데 아직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종교 개혁자들이 주일을 제외한 모든 날과 절기를 지키지 않기로 했었다는 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리스도인들은 개혁적 청개구리가 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했는데, 사실 나는 그 때 이후로 그렇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청개구리는 불순종의 아이콘인데, 개혁적 청개구리는 성경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모든 풍습과 전통과 제도와 사상과 이념과 가치관에 대해 수용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성경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학교에 다니던 때는 사회와 교계와 학교들의 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했고 나는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개혁을 부르짖는 편이었는데, 정작 나 자신이 성경적 개혁의 원리와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교단과 신학교와 교수들의 문제가 심각하고 예민하던 때라 그 문제에 대한 교수들과 학생들의 열린 토론의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런 모임에서 언제나 말씀을 아끼시던 박윤선 목사님께서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시다가 매우 화가 나신 듯이 큰 소리로 “학생들은 개혁을 할 수 없어! 왜냐? 학생들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박목사님의 말씀은 내용이나 음성의 톤으로 봐도 토론이 아니라 한 마디로 엄한 꾸짖음이고 나무람이었습니다. 나는 박목사님의 그런 모습이 처음이어서 너무 충격을 받아 그 다음부터는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박 목사님의 그 말씀이 잊히지가 않습니다. “학생들은 개혁을 할 수 없어! 왜냐? 성경을 모르기 때문이다.”자꾸만 머릿속을 맴 도는 그 말씀, 어디 학생들만 성경을 모르던가! 그 후 어떤 수업 시간에 교수가 성경을 너무 모른다는 느낌을 받을 때면 그 때 박목사님의 그 말씀은 학생들만을 나무라는 말씀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통적 성경해석의 기본을 잘 모르는 신학교 교수들도 있다는 사실을 학생인 내가 눈치 챘다면 박목사님께서 모르셨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성경을 아는 것은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나 성경 구절을 많이 암송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성탄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지만 나는 성탄절과 부활절이 복음과 상관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해야 하나? 진보주의자들과 상대주의가 공적 장소에서‘메리 크리스마스!’ 라는 인사도 못하게 해 놓아서 트럼프 같은 사람이 반발을 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트럼프의 주장에 공감하지만 나는 저급한 상대주의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개혁적 청개구리가 되어 왜 교회가 지금과 같은 성탄절을 지켜야 하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해야 하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크롬웰 시대인 1643년에 영국 국회는 성탄절, 부활절 그 외의 여러 절기들이 비 성경적이라는 이유로 지키지 못하도록 금했기 때문에 거의 20여 년 동안 성탄절이나 부활절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1659년 청교도들은 12월 25일을 경축하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매사추세츠 주법을 만들었습니다.
어느 똑똑한 친구가 열차 여행을 하는데 열차가 달리는 역방향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역방향으로 가니까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아서 고생이 심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고생했던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친구가 ‘앞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고 자라를 바꿔달라고 양해를 구해보지 그랬냐?’ 라고 하자 그는 ‘그렇게 하는 건 불가능 했다.’고 하였습니다. 친구가‘불가능했다니?’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앞자리가 비어 있는데 누구에게 양해를 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나름대로 똑똑하고 경험도 많고 공부도 많이 했지만 역방향 열차 좌석에 앉아 속 메스꺼움을 꺼억 꺼억 참으며 불편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지도 않고 헌법과 예배 모범에도 없는 온갖 것을 지키느라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정작 지켜야 할 성경과 교리와 신학과 헌법과 예배 모범은 무시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이 자유와 정의와 민주주의와 법치와 질서의 기본 개념도 파악을 하지 못하고 온갖 주장을 잔소리나 불평처럼 늘어놓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목사가 복음과 자기가 표방하는 교리와 신앙고백과 신학의 기본 개념도 파악을 하지 못하고 설교를 하면 성경을 알고 복음을 아는 성도들은 괴롭습니다.
신년하례라는 것이 성경적인지, 새 해가 될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묻곤 하지만 마음이 개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세속적이라고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서 새 해에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이 좋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새 해에 새 계명을 실천하는 신년하례 회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처럼 주를 위해 죽겠다고 개념 없이 저돌적으로 큰 소리 칠 게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서로 사랑하는 구체적 모델을 따라야 합니다. 그 모델이 바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신 바로 다음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여보, 나 오늘 몸이 많이 피곤한데 설거지 좀 해 줄 수 있어요?’ 라고 하자, 남편이‘당신 위해 목숨은 바칠 수 있어도 솔직히 설거지는 못하겠다.’고 하였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하면서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후배에게 자장면 한 그릇 대접하기는 것과, 아내를 위해 설거지 한 번 하는 것을 목숨 바치는 것보다 힘들어합니다. 이런 사람을 개념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복음에 대한 개념, 사랑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지 말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라고 우쭐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친구라고 하셨으니까, 예수님의 친구라는 말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좋은 친구가 못 된다는 듯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친구로 사귀시다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으셨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준이 못됩니다. 친구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죄인이고 원수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우리를 친구로 삼아 주시고 우리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할 텐데, 우리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기회는 평생 한 번도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 개념 없이 베드로처럼 저돌적으로 큰 소리 치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우리는 용납하지 못할 사람이 너무 많고 용납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서로 사이 좋게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어릴 때는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았고 형제들끼리 많이도 싸웠습니다. 우리 7남매도 걸핏하면 싸웠기 때문에 어머니가 교회를 가시거나 시장에 가시거나 잠시 집을 비울 때마다 우리들에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당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올 한 해는 부부, 가족, 성도, 직장 동료, 친구, 이웃과 사이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 아멘넷 뉴스(USAamen.net)
그러다가 종교 개혁자들이 주일을 제외한 모든 날과 절기를 지키지 않기로 했었다는 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리스도인들은 개혁적 청개구리가 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했는데, 사실 나는 그 때 이후로 그렇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청개구리는 불순종의 아이콘인데, 개혁적 청개구리는 성경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모든 풍습과 전통과 제도와 사상과 이념과 가치관에 대해 수용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성경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학교에 다니던 때는 사회와 교계와 학교들의 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했고 나는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개혁을 부르짖는 편이었는데, 정작 나 자신이 성경적 개혁의 원리와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교단과 신학교와 교수들의 문제가 심각하고 예민하던 때라 그 문제에 대한 교수들과 학생들의 열린 토론의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런 모임에서 언제나 말씀을 아끼시던 박윤선 목사님께서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시다가 매우 화가 나신 듯이 큰 소리로 “학생들은 개혁을 할 수 없어! 왜냐? 학생들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박목사님의 말씀은 내용이나 음성의 톤으로 봐도 토론이 아니라 한 마디로 엄한 꾸짖음이고 나무람이었습니다. 나는 박목사님의 그런 모습이 처음이어서 너무 충격을 받아 그 다음부터는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박 목사님의 그 말씀이 잊히지가 않습니다. “학생들은 개혁을 할 수 없어! 왜냐? 성경을 모르기 때문이다.”자꾸만 머릿속을 맴 도는 그 말씀, 어디 학생들만 성경을 모르던가! 그 후 어떤 수업 시간에 교수가 성경을 너무 모른다는 느낌을 받을 때면 그 때 박목사님의 그 말씀은 학생들만을 나무라는 말씀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통적 성경해석의 기본을 잘 모르는 신학교 교수들도 있다는 사실을 학생인 내가 눈치 챘다면 박목사님께서 모르셨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성경을 아는 것은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나 성경 구절을 많이 암송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성탄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지만 나는 성탄절과 부활절이 복음과 상관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해야 하나? 진보주의자들과 상대주의가 공적 장소에서‘메리 크리스마스!’ 라는 인사도 못하게 해 놓아서 트럼프 같은 사람이 반발을 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트럼프의 주장에 공감하지만 나는 저급한 상대주의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개혁적 청개구리가 되어 왜 교회가 지금과 같은 성탄절을 지켜야 하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해야 하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크롬웰 시대인 1643년에 영국 국회는 성탄절, 부활절 그 외의 여러 절기들이 비 성경적이라는 이유로 지키지 못하도록 금했기 때문에 거의 20여 년 동안 성탄절이나 부활절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1659년 청교도들은 12월 25일을 경축하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매사추세츠 주법을 만들었습니다.
어느 똑똑한 친구가 열차 여행을 하는데 열차가 달리는 역방향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역방향으로 가니까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아서 고생이 심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고생했던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친구가 ‘앞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고 자라를 바꿔달라고 양해를 구해보지 그랬냐?’ 라고 하자 그는 ‘그렇게 하는 건 불가능 했다.’고 하였습니다. 친구가‘불가능했다니?’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앞자리가 비어 있는데 누구에게 양해를 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나름대로 똑똑하고 경험도 많고 공부도 많이 했지만 역방향 열차 좌석에 앉아 속 메스꺼움을 꺼억 꺼억 참으며 불편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지도 않고 헌법과 예배 모범에도 없는 온갖 것을 지키느라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정작 지켜야 할 성경과 교리와 신학과 헌법과 예배 모범은 무시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이 자유와 정의와 민주주의와 법치와 질서의 기본 개념도 파악을 하지 못하고 온갖 주장을 잔소리나 불평처럼 늘어놓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목사가 복음과 자기가 표방하는 교리와 신앙고백과 신학의 기본 개념도 파악을 하지 못하고 설교를 하면 성경을 알고 복음을 아는 성도들은 괴롭습니다.
신년하례라는 것이 성경적인지, 새 해가 될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묻곤 하지만 마음이 개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세속적이라고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서 새 해에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이 좋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새 해에 새 계명을 실천하는 신년하례 회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처럼 주를 위해 죽겠다고 개념 없이 저돌적으로 큰 소리 칠 게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서로 사랑하는 구체적 모델을 따라야 합니다. 그 모델이 바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신 바로 다음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여보, 나 오늘 몸이 많이 피곤한데 설거지 좀 해 줄 수 있어요?’ 라고 하자, 남편이‘당신 위해 목숨은 바칠 수 있어도 솔직히 설거지는 못하겠다.’고 하였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하면서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후배에게 자장면 한 그릇 대접하기는 것과, 아내를 위해 설거지 한 번 하는 것을 목숨 바치는 것보다 힘들어합니다. 이런 사람을 개념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복음에 대한 개념, 사랑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지 말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라고 우쭐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친구라고 하셨으니까, 예수님의 친구라는 말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좋은 친구가 못 된다는 듯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친구로 사귀시다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으셨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준이 못됩니다. 친구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죄인이고 원수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우리를 친구로 삼아 주시고 우리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할 텐데, 우리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기회는 평생 한 번도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 개념 없이 베드로처럼 저돌적으로 큰 소리 치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우리는 용납하지 못할 사람이 너무 많고 용납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서로 사이 좋게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어릴 때는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았고 형제들끼리 많이도 싸웠습니다. 우리 7남매도 걸핏하면 싸웠기 때문에 어머니가 교회를 가시거나 시장에 가시거나 잠시 집을 비울 때마다 우리들에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당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올 한 해는 부부, 가족, 성도, 직장 동료, 친구, 이웃과 사이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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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자님의 댓글
작은자
굿 메시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