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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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ㆍ2017-02-2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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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즘 우려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거품이 제도적인 거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신앙의 거품으로 이어질까하는 것입니다. 중세의 종교 개혁자들이 교회음악을 개혁할 필요를 느꼈던 이유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은혜를 추구하기보다는 육신적이거나 감상적인 감동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만족할까 하는 우려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에 거품이 들어가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오늘도 신앙의 거품 현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예배에 있어서 예배자 들이 버려야 할 거품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 몇 가지 유념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보다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 인스턴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도 인스턴트를 요구합니다. 수 년 전에 어떤 청소년 집회를 참석했었는데 집회를 인도하시는 찬양인도자가 찬양 중간에“예수를 구주로 믿을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목사로 헌신할 사람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주를 위해서 순교나 헌신할 사람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하루 저녁에 이 세 가지 열매를 다 요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진지하게 응답하는 청소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 가지 요구사항 중 어느 것도 시간을 두고 심사숙고하지 않아야 할 것이 없습니다.
예배인도자들이 때론 요즘 유행하는 슈퍼맨과 같이 한 순간에 모든 예배 참석자들을 다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임했던 성령 충만한 역사를 경험시키려는 거룩한 욕망(?)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너무 급한 나머지 새로운 찬양 곡을 초고속으로 1달에 몇 개씩 바뀌어 예배를 인도하려고 합니다. 잘 따라하지 않는 회중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낙담하고 핑계를 성도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포도주가 숙성되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신앙과 예배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결코 허비되는 시간이 아닙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구 개월을 꾸준히 인내하고 있어야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지 그러지 않고 일찍 태어나면 미숙아가 되어서 인큐베이터 속에 들어가야 되는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과정에도 거쳐야 할 것이 있고, 배워야 할 것이 있고, 생각해야 될 부분이 있고, 계산해야 될 부분이 있고, 비로소 책임질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 할 지라도 억지로 빨리 먹으면 체하는 것처럼 예배 찬양에 대한 속도조절이 꼭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인도자는 당장 인스턴트 결과를 요구나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보다도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유념할 것은 고통을 일찍 떨쳐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조금만 아프다고 하면 당장 항생제를 먹거나 진통제를 먹고 그 고통을 빨리 벗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정작 항생제가 필요하게 될 경우에는 항생제에 몸이 익숙해져서 약이 듣지를 않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당신의 백성들이 고난 중에 있을 때 그 고난을 제해 주시기 위해서 결코 서두르지 않으시는 모습입니다. 고독해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독을 공감하시지만 고독의 시절이 빨리 지나가게 하시지 않습니다. 뭔가 고독의 시절이 있음으로 우리의 영혼을 돕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고독을 통해서 영혼이 진지해지는 법을 배우고, 인생을 진지하게 성찰하게 되고, 깊이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볼 때 친구와 같이 볼 때보다는 혼자 볼 때 훨씬 그 영화에 몰입할 수가 있고 그 줄거리의 파토스를 공감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 년의 세월을 보낼 때 하나님은 결코 그 기간을 단축시키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서 십 년을 도망 다닐 때 하나님은 그 기간을 단축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에서 건져 주시지만 서두르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심지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경험하는 예배인도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믿음도 있어야 되겠고 기도도 많이 해야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인내가 없이는 열매 맺는 계절을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함부로 감정을 앞세워 예배 찬양의 자리를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분명 그 자리는 고독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다 되어진 예배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생명과 같이 여겨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그 자리’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유념할 것은 결과에 대해서 솔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소경에게 안수하신 후에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이 질문은 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요.”라고 대답하면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그래서 예배가 끝난 다음에 “기분이 어때?”라는 질문은 절대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에게 ‘내가 예수를 믿고 뭔가 특별한 기분을 느껴야 되는가 보다.’ 하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어서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기 때문에 절대로 상대방의 주관적인 감정에 대해서 물어봐서는 안됩니다.
예배 끝나고 나가면서 ‘어때?’하고 물어보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느끼는 부분이 있으면 자기가 말할 것입니다. 뭔가 그 사람에게 반응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필요한 부담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대답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불필요한 질문을 해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경을 한 번 안수하시고 물어보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리고 소경은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보기는 보는데 아직 밝히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더라도 두 번 안수해야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두 번 하던 세 번 하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제대로 치유하기까지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 당장 어떤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서두를 필요도 없고 과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장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과장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앞서 가는 사람입니다. 매주 마다 예배하는 그 자리에 어쩌면 우리가 노력하고 준비한 만큼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회중의 변화가 내가 생각한 것 보다 빠르게 변화되는 모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드릴 유일한 반응은 ‘주님! 오늘도 나를 예배의 통로로 사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한 분 이면 충분합니다!’ 이 고백이 아닐까…
박윤선 목사(뉴욕어린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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