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 목사 "인생 실패의 원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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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2-05-2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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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싸움과 전쟁의 원인을 인간의 타락, 즉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따라 살려고 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시기와 질투가 살인의 결과를 불러왔고 범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찾아오게 된 두려움은 서로를 경계하며 성을 쌓고 살인을 정당화하며 공격과 살상 무기를 만들면서 집단 간의 싸움에서 나라 간의 전쟁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개인 간의 싸움이나 집단 간의 싸움이나 국가 간의 전쟁은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여 원하는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나 전쟁의 형태는 단순히 폭력으로 상대를 제압하여 원하는 것을 빼앗는 것에서부터 상대를 죽이고 원하는 것을 빼앗는 경우가 있습니다. 살상을 하지 않는 전쟁은 있을 수 없지만 포로를 살려주는 경우는 승자가 너그러워서이기도 하지만 포로를 노예로 이용하려는 이기적인 계산 때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대의 전쟁은 무자비한 살상과 승자가 패자의 포로를 노예로 삼는 것이 당연시 되었기 때문에 현대전보다 더욱 잔인하고 비참하였습니다. 현대전이라고 하여 비참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현대전에서는 전시국제법이 있어서 고대 전쟁에서처럼 민간인이나 비 전투 요원에 대한 무차별적 살상은 어느 정도 억제되고 있습니다. 고대 전쟁에서 실패는 곧 죽음이나 짐승처럼 취급되는 노예 신분으로 전락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현대 전쟁은 그 양상이 많이 달라져서 승자와 패자의 상황이 극명하게 갈리기도 하고 승자 없이 쌍방이 패자처럼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인 간의 싸움이나 국가 간의 전쟁에 있어서 한 편은 피할 수 없어서 전쟁을 하게 되고 다른 편은 의도적으로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고 쌍방이 적극적으로 전쟁을 계획하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쟁을 할 의사가 없는데 일방적으로 침략을 당한 쪽은 불가피하게 전쟁을 하게 되지만 침략을 한 쪽은 불가피하게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욕심 때문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표면적으로는 침략을 당한 나라는 불가피하게 전쟁을 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반대로 침략을 당한 나라가 실제로는 침략국인 경우도 있습니다. 형제들이 많았던 옛날 가정에서 형제들 간의 싸움이 일어나면 어머니가 누구의 잘못으로 싸우게 되었는지를 판단하실 때 반드시 먼저 손을 댄 놈의 잘못이라고 하지 않고 먼저 손을 댈 수밖에 없게끔 원인을 제공한 놈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국가 간의 전쟁도 형제들 간의 싸움처럼 판단하는 어머니가 있다면 먼저 침략한 나라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먼저 얻어맞은 놈이 더 나쁜 것을 가려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국제 관계에서는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를 대신할만한 권위가 없기 때문에 두 나라가 전쟁을 해도 실제로 누가 더 나쁜지를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개인적인 싸움이나 국가 간의 전쟁에서 뿐만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경쟁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 즉 승리와 실패를 판단하는 세상의 판단 기준은 누가 힘이 더 센지 혹은 누가 더 합법적인지를 따집니다. 어떤 경우든지 우리의 상식으로는 싸움에서 지는 것을 실패라고 합니다. 싸움이나 경쟁에서 진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손해를 보거나 사회적 지위를 잃거나 강등되는 결과에 직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실패입니다. 그러나 실패를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세상적 판단 기준에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실패나 승리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기준은 세상과 다릅니다. 성경은 싸움에서 지고 손해를 당한다고 해서 무조건 실패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싸우고 다투는 것 자체를 실패라고 합니다. 물론 싸움에도 선한 싸움이 있어서 선한 싸움을 실패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선한 싸움은 싸워서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가 있어야 이기는 것이 아니고 선을 위해서 싸우는 것 자체가 이긴 것입니다. 이와같이 이기고 승리하고 또 실패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적 판단과 성경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가끔은 의를 위해서 싸우는 분들조차도 승리와 실패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때도 있습니다. 이겼다’혹은 ‘졌다’ 또는 ‘승리했다’ ‘실패했다’라는 것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상식과 다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이 가끔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목회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말인즉슨 신학적으로 바르게 해도 잘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바르게 목회 하려고 했다가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거의 예외 없이 한 가지 오해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된다’ 혹은 ‘안 된다’는 판단 기준이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이 목회를 성공적으로 하려고 노력했는지를 잘 알 수 없지만 결과를 평가하는 기준이 성경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든 생업이든 바르고 정직하게 해야 함과 동시에 그 과정과 방법과 결과를 선택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성공적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가치 판단이 성경적으로 변화 되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에 대한 하나님 나라 원리는 세상의 것과 다릅니다. 동기와 과정이 올바르다고 해도 결과를 평가하는 기준이 개혁되지 못해서 끝까지 선을 행하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성경적 기준이 무엇일까요? 바르게 했으면 결과에 상관없이 승리한 것입니다. 바르게 하지 않았으면 결과에 상관없이 실패한 것입니다. 선한 싸움은 이긴 것이고 승리한 것입니다. 정욕 적인 싸움과 다툼은 그 자체가 실패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좋은 교훈을 구약의 두 사람의 경우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아브라함과 요나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데 있어서 매우 대조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와 니느웨 전도에 대한 요나의 이야기는 너무 흥미롭고 의미심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자발적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중재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 전도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다른 곳으로 도망을 하다가 잡혀 와서 억지로 그 일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진심 어린 중재에 나섰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긍휼함이 많으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명령을 피하여 도망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진심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구원받기를 바랐고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를 외쳤지만, 사실은 망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그들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응답 되지 않았고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요나는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라면서 억지로 회개를 외쳤는데 니느웨가 회개하여 심판을 면하였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평가를 하면 아브라함은 실패했고 요나는 성공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고모라를 구하지 못했고 요나는 니느웨를 구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실패한 목회자이고 요나는 성공한 목회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식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나는 못된 선지자로 아브라함은 바른 중보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선한 싸움을 싸웠고 요나는 정욕으로 싸웠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결과를 통해 나타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자기가 선택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성공하는 싸움을 선택했고 요나는 실패의 싸움을 선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천하 만민이 자기를 통하여 복 받게 되기를 바랐고 요나는 원수가 망하기를 바랐습니다.
야고보는 정욕 때문에 싸우는 싸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야고보가 참으로 중요하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투쟁하는 존재이고 인류의 역사는 싸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현대 전쟁은 그 양상이 많이 달라져서 승자와 패자의 상황이 극명하게 갈리기도 하고 승자 없이 쌍방이 패자처럼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인 간의 싸움이나 국가 간의 전쟁에 있어서 한 편은 피할 수 없어서 전쟁을 하게 되고 다른 편은 의도적으로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고 쌍방이 적극적으로 전쟁을 계획하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쟁을 할 의사가 없는데 일방적으로 침략을 당한 쪽은 불가피하게 전쟁을 하게 되지만 침략을 한 쪽은 불가피하게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욕심 때문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표면적으로는 침략을 당한 나라는 불가피하게 전쟁을 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반대로 침략을 당한 나라가 실제로는 침략국인 경우도 있습니다. 형제들이 많았던 옛날 가정에서 형제들 간의 싸움이 일어나면 어머니가 누구의 잘못으로 싸우게 되었는지를 판단하실 때 반드시 먼저 손을 댄 놈의 잘못이라고 하지 않고 먼저 손을 댈 수밖에 없게끔 원인을 제공한 놈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국가 간의 전쟁도 형제들 간의 싸움처럼 판단하는 어머니가 있다면 먼저 침략한 나라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먼저 얻어맞은 놈이 더 나쁜 것을 가려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국제 관계에서는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를 대신할만한 권위가 없기 때문에 두 나라가 전쟁을 해도 실제로 누가 더 나쁜지를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개인적인 싸움이나 국가 간의 전쟁에서 뿐만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경쟁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 즉 승리와 실패를 판단하는 세상의 판단 기준은 누가 힘이 더 센지 혹은 누가 더 합법적인지를 따집니다. 어떤 경우든지 우리의 상식으로는 싸움에서 지는 것을 실패라고 합니다. 싸움이나 경쟁에서 진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손해를 보거나 사회적 지위를 잃거나 강등되는 결과에 직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실패입니다. 그러나 실패를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세상적 판단 기준에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실패나 승리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기준은 세상과 다릅니다. 성경은 싸움에서 지고 손해를 당한다고 해서 무조건 실패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싸우고 다투는 것 자체를 실패라고 합니다. 물론 싸움에도 선한 싸움이 있어서 선한 싸움을 실패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선한 싸움은 싸워서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가 있어야 이기는 것이 아니고 선을 위해서 싸우는 것 자체가 이긴 것입니다. 이와같이 이기고 승리하고 또 실패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적 판단과 성경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가끔은 의를 위해서 싸우는 분들조차도 승리와 실패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때도 있습니다. 이겼다’혹은 ‘졌다’ 또는 ‘승리했다’ ‘실패했다’라는 것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상식과 다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이 가끔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목회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말인즉슨 신학적으로 바르게 해도 잘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바르게 목회 하려고 했다가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거의 예외 없이 한 가지 오해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된다’ 혹은 ‘안 된다’는 판단 기준이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이 목회를 성공적으로 하려고 노력했는지를 잘 알 수 없지만 결과를 평가하는 기준이 성경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든 생업이든 바르고 정직하게 해야 함과 동시에 그 과정과 방법과 결과를 선택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성공적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가치 판단이 성경적으로 변화 되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에 대한 하나님 나라 원리는 세상의 것과 다릅니다. 동기와 과정이 올바르다고 해도 결과를 평가하는 기준이 개혁되지 못해서 끝까지 선을 행하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성경적 기준이 무엇일까요? 바르게 했으면 결과에 상관없이 승리한 것입니다. 바르게 하지 않았으면 결과에 상관없이 실패한 것입니다. 선한 싸움은 이긴 것이고 승리한 것입니다. 정욕 적인 싸움과 다툼은 그 자체가 실패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좋은 교훈을 구약의 두 사람의 경우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아브라함과 요나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데 있어서 매우 대조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와 니느웨 전도에 대한 요나의 이야기는 너무 흥미롭고 의미심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자발적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중재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 전도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다른 곳으로 도망을 하다가 잡혀 와서 억지로 그 일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진심 어린 중재에 나섰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긍휼함이 많으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명령을 피하여 도망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진심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구원받기를 바랐고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를 외쳤지만, 사실은 망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그들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응답 되지 않았고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요나는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라면서 억지로 회개를 외쳤는데 니느웨가 회개하여 심판을 면하였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평가를 하면 아브라함은 실패했고 요나는 성공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고모라를 구하지 못했고 요나는 니느웨를 구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실패한 목회자이고 요나는 성공한 목회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식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나는 못된 선지자로 아브라함은 바른 중보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선한 싸움을 싸웠고 요나는 정욕으로 싸웠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결과를 통해 나타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자기가 선택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성공하는 싸움을 선택했고 요나는 실패의 싸움을 선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천하 만민이 자기를 통하여 복 받게 되기를 바랐고 요나는 원수가 망하기를 바랐습니다.
야고보는 정욕 때문에 싸우는 싸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야고보가 참으로 중요하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투쟁하는 존재이고 인류의 역사는 싸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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