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윤리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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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7-03-1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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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에 의하면 “인간은 역사의 무대에 잠깐 등장하여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역할을 하다가 사라진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누군가 아주 재미있는 상상을 하였습니다. 아주 먼 훗날 인간에 버금가거나 능가하는 존재가 등장하여 지구의 역사를 재정리하게 될 때 두 가지 사실을 예상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역사책에 인간 종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은 순간처럼 짧게 살다가 절멸(絕滅)한 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 종에 대해 많은 기록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생존 기간은 짧지만 지구 환경에 끼친 해악이 워낙 엄청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동물의 생태질서를 먹이사슬로 설명합니다. 먹이사슬이란 다른 말로 하면 약육강식입니다. 힘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약한 동물은 자기보다 더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먹이사슬을 정글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생태환경에는 약육강식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존재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기생의 방법도 있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symbiosis)이나 상리공생(相利共生, mutualism)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생물들도 많습니다. 또한 말미잘과 숨이고기는 편리공생(commensalism)의 방식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동식물들에게 약육강식이니 공생 혹은 상리상생 또는 편리공생이라는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동식물은 본능의 생존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인간이 이해와 연구를 위해 그렇게 분류한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착취행위를 동물적 약육강식의 방식이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공생과 상리상생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물들의 생존방식을 인간이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지만 동식물의 행동은 윤리적 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에게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 윤리적 평가를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위 중의 의지와 상관없는 본능적 행동은 윤리적 가치 평가를 할 수 없다는 점을 이미 앞 글에서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당위적인 행위입니다. 철학에서는 인간 행동을 사실적인 것과 당위적(obligatory)인 것으로 구분합니다. 당위란 의무를 지우는, 의무적인, 강제적인, 필수 등의 뜻입니다. 마땅히 뭐 뭐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최순실씨가 국정을 농단한 게 사실이라면 “최순실씨가 국정을 농단했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 진술입니다. 그러나 “아 글쎄 최순실씨가 그렇게 나쁜 사람인 줄 몰랐다. 대통령을 가지고 놀았구먼!”이라고 하면 이것은 평가적인 발언이 됩니다. 개인적 행위뿐 아니라 인간 집단의 행위에 대해서도 이렇게 평가가 들어가는 행위를 평가의 대상이 되는 행위라고 합니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을 탄핵했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 진술입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그렇게 엉터리인 줄은 몰랐다.”라고 하는 것은 평가적 발언입니다.
그런데 그 평가는 반드시 전제된 가치의 토대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보편 가치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살인과 거짓은 나쁘다는 것이나 정직과 공평은 좋은 것이라는 가치는 보편적 가치입니다. 결혼은 아름다운 것이고 간음과 간통은 악하고 추하다는 것도 보편 가치이기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가치입니다. 아직까지는 거짓과 살인이 왜 나쁜 것이냐 라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아름다운 것이고 간음이나 간통은 악하고 나쁜 것이라는 데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거짓이나 살인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게 되는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니체는 강한 자만이 살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니까 니체 철학에 지배 받는 무신론자들을 비롯하여 상대주의를 존중하는 현대인들은 언제 노골적으로 그런 주장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인간이 존중해야 할 가치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윤리 도덕적 가치, 아름다움의 가치, 경제적 가치, 과학적 가치 등이 있습니다. 정의와 선과 사랑은 윤리 도덕적 가치이고, 의식주에 관계 되는 것은 물질적 가치 또는 경제적 가치이며, 음악이나 예술 등은 아름다움의 가치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도구를 과학적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치를 창출하거나 해치는 행위도 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평가를 할 수 있는 행위 중에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적 평가를 할 수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하다.’ 혹은 ‘선하다.’라고 평가 할 수 있는 행위가 그런 종류에 속합니다.
그 다음은 ‘당위의 근거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상대주의가 지배적인 현실을 생각할 때 보편 가치는 무엇에 의해 보장되고 왜 존중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담론의 주제로 삼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정직해야 할까요? 왜 우리는 거짓 말 하면 안 될까요? 왜 살인을 하면 안 되고 거짓말 하면 안 되고 법과 질서는 지켜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물음은 철학에서 오랫동안 제기해 온 문제입니다. 철학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였을 뿐 아니라 그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철학의 의무요 역할이기도 합니다. 철학은 스스로 제기한 이 물음에 대해 답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그 결과 그 질문들에 대해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첫째는 목적론적 이론입니다.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왜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목적론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목적론적 설명이론이라고 합니다. 왜 우리는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은 우리가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착하고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법과 질서를 지킬 뿐 아니라 보편 가치를 존중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사회 질서가 유지되고 질서가 유지되어야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탄핵되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 무질서입니다. 막연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무질서가 무서운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대통령과 국회와 헌재와 검찰과 언론이 법을 어긴 것보다 더 위험하고 두려운 것은 무질서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와 나아가서는 언론과 국민 모두가 보편 가치와 법을 무시하는 경향이 지나친 정도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주장과 행위를 법과 정의와 나라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외국인들이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내리게 될 평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아직까지 보편 가치와 법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해와 그것들을 지키려는 행위가 부끄럽게도 미숙한 어린아이 수준이라는 점입니다.
이번의 대통령 탄핵은 대한민국이 법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이념에 대해 미숙하고 국가관이 허약하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공표한 셈입니다. 어린아이는 유치함이 무엇인 줄 모르고 유치함을 드러내고,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어리석은 짓을 하듯이 대한민국은 스스로의 수준을 잘 모르기 때문에 미숙하고 유치한 행동을 정당하다는 듯이 용감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둑이나 게임에 비유하면 불과 몇 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나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당위론적 행동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이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 영역에서 하나님을 몰아낸 상황에 어차피 절대가 없으니 목적론적 수준에서라도 당위론적 행동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착하고 정직하게 행위 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과 안녕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차원에서라도 보편 가치와 법과 질서가 존중되고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언론들은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해왔습니다. 언론뿐 아니라 정치인과 온 국민이 거짓말을 다반사로 하면서 자기가 하는 말이 거짓말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의 종류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거짓말을 8가지로 분류했고, 마크 트웨인은 889가지의 거짓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만과 미움과 증오와 시기심 때문에 과장하고 왜곡하고 또 편리를 따라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하면 안 될까요?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면 필요해서 하는 것일 텐데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서로가 인정해 주면 어떻게 될까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내가 거짓말을 하면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거짓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입는 피해가 과거에 비해 지금은 엄청나게 크고 치명적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개인이 거짓말을 해도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현대는 언론 매체가 발전하여 개인이나 공공 언론이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거짓말을 하면 그 폐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이 광범위 한 영역과 많은 사람에게 미치게 됩니다.
대한민국은 북한의 핵만 두려워할 게 아닙니다. 민족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며, 힘이 없는 이유는 단결하지 못해서이고, 단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속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거짓말의 가공할 해악을 간파하고 피를 토하듯이 부르짖었습니다.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군부(君父)의 원수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이라 했으니, 내 평생에 죽어도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안창호 선생은 조선이 망한 원인을 일본 때문이 아니라 거짓말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탈세율은 26.8%로 그리스나 스페인과 비슷하고, 보험금 13.9%가 보험사기로 지불되고, 교통사고 입원 율이 일본의 9.5배나 되는 나라, 작금의 대한민국 언론이 그렇게 거짓말을 많이 하고 국회와 검찰과 많은 국민이 그 거짓말에 휘둘리는 것은 국가의 존립이 몹시 위태롭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회와 검찰과 언론과 온 국민이 총체적으로 거짓말 광란을 벌이는데도 나라가 이만큼 지탱하는 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기적이고 은혜이고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오래 참으심 때문이지 한국인의 의식과 국격이 고상해서가 아닙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댓글목록
성도님의 댓글
성도
제가 독해 능력이 모잘라서 잘못 이해한건지 지금 하시는 말씀이 마치 탄핵이 거짖뉴스와 언론이 짜고잘못된 선택을 한것같이
비윤리적이라고 하는 말씀인가요?
참 어럽게도 글을 쓰시내요 설교도 그렇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잠긴동산님의 댓글
잠긴동산
성도님의 현 정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가져온 글입니다^^
외신이 보도하는 한국 현실
전호진 미얀마개혁장로교신학교 학장 webmaster@futurekorea.co.kr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은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일부 외신들도 한국을 위기 상황으로 보도한다. 필자는 해방 전 일본에서 태어나서 2차 세계대전을 일본에서, 1950년에는 서울에서 6.25를 겪었다. 영어와 일본어로 일부 외신을 읽고 선교지에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해 이 내용을 알리고자 한다. 필자는 왜 좌파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고 사회가 좌경화되는 것을 우려하는지를 기독교 관점에서 밝히고자 한다.
먼저 지난 몇 달 동안 소요의 근본적 원인은 잘못된 불평불만의 문화에 있다고 본다. 역대 정권에서 부정부패는 항상 있었다. 이번 정부만이 유별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최순실 건은 간접 원인에 불과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잘못을 전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접 원인은 불평불만의 선동문화이다.
산케이신문은 작년 11월 중순 촛불집회가 시작되자, 한 운동권 단체가 데모를 계획, 시작하자 최순실 사태가 터졌다고 보도했다. “최순실은 박근혜를 마인드 콘트롤 했고 좌파그룹은 모든 국민을 마인드 콘트롤 한다고 했다. 마치 박 전 대통령이 무당이나 이단 집단의 최면술에 걸린 듯한 인상을 줬다.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775
과연! 떼법의 승리 입니다.
바두기님의 댓글
바두기
황상하 목사님. 왜 자꾸 이런 정치적인 글을 진리인양 포장해서 올리는 겁니까?
남에게 가르치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좀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평신도님의 댓글
평신도이 패역한 세대에 아직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지지 않는 이유는 황목사님 같은 남은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들을 주의하시고 오직 사랑과 용서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