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과 하나님 나라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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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7-05-1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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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열대지방 원시림 안에서도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소멸은 끝없이 계속되지만,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지역에서 생명의 탄생은 열대지방보다 매우 인상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성한 열대림 안에서 작은 생명체 하나가 태어나는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하지만 이곳 뉴욕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서는 모든 것이 죽은 것 같은 겨울 땅에서 생명체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도 신비로운 인상을 줍니다. 겨울이라고 하여 생명체가 죽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어떤 생명체는 짧은 생을 마감하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죽은 것 같은 많은 식물과 동물과 미생물들은 겨울 동안 자신의 존재를 은폐하고 있다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은 동면하는 동안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해 심장 맥박 수를 줄입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숲 개구리는 겨울잠을 자는 동안 아예 심장 맥박까지 정지된다고 합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현상입니다. 과학자들은 동물들의 겨울잠을 연구하여 인간의 저 체온 상태에서의 수술이나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를 오랜 시간 동안 동면시켜 의학이 고도로 발전한 먼 훗날 깨어나게 한다든지 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모든 지방의 기온이 모두 열대지방 같다면 이런 연구자체가 불가능 할 것입니다.
생명이 은폐되어 있다가 드러나는 것만도 신비로운데, 그 생명체들의 상호 의존적 관계는 더한층 신비롭습니다. 모든 동물은 종속영양생물(從屬營養生物)이라고 합니다. 종속영양생물이란 생육에 필요한 탄소를 얻기 위해 유기화합물을 이용하는 생물을 말합니다. 반대로 식물은 거의 독립영양생물, 혹은 자가영양생물(Autotroph)이라고 합니다. 식물이 빛 에너지를 사용 가능한 화학에너지 형태로 변환하고, 저장하는 과정을 광합성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다 생명활동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이론으로 생물들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그 토대 위에서 과학을 발전시켜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가영양생물도 빛이나 여러 다른 조건들의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런 것을 연구할까요? 궁극적으로 모든 생명체가 어떤 상호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파악하여 생명 친화적으로 처신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수준에서만 생각해도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에 대해 무관심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모든 유기물은 무기물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구 생태계 내 모든 개체적 존재들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관련의 토대가 무기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생명도 보호하고 지켜야 하지만 무기물도 잘 보호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배우고 깨달아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농부들입니다. 농부는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땅을 잘 관리합니다. 땅을 위하는 것이 곡식을 위하는 것이고, 곡식을 위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을 위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명령임을 잘 압니다. 성경은 인간이 이 관계를 파괴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파괴하는 주범이 인간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생물들과 무기물의 상호의존적 관계 양상을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창조의 질서, 즉 생명의 질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나 하나님 나라가 비록 은폐되어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 수 있습니다. 식물의 뿌리 끝 부분이 동물의 뇌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데, 밭을 일굴 때 온갖 나무와 풀들의 뿌리를 볼 때마다 ‘이게 동물이라면 뇌에 해당하는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농부라도 잡초의 뿌리까지 배려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모든 생명체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소한 것까지 배려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생명체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은폐된 생명에 부응하여 살려면 마음을 좀 써야 합니다. 우선 마음을 써야 할 부분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신앙의 내용이고 다음은 실제의 삶입니다. 신앙의 내용은 삼위 하나님, 하나님 나라, 구원, 칭의, 성화, 종말, 부활 등입니다. 그 다음은 실제 삶인데, 예배, 찬양, 기도, 헌금, 구제, 전도, 봉사, 친교, 윤리적인 삶 등입니다. 이것을 학문적으로 설명하면 전자는 이론이고 후자는 실천입니다. 이론과 실천은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을 이런 구도로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로마서와 골로새서가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이론적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밝힌 후에 그 정체성에 따른 실제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며 그 연합 안에서 다시 산 자들입니다. 그러한 존재 이유에서 실제적인 삶의 당위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구원과 생명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성취된 신비로운 존재를 향하여 “위의 것을 찾으라.”라고 명령합니다. 위는 우주 공간 어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우편이라는 곳도 우주 물리학이 규명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부활 생명과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 반대편에 우리가 집착하지 말아야 할 “땅의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위의 것과 땅의 것으로 구분했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과“사람의 일”로 구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이러한 구분은 사실 같은 것입니다. 위의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일입니다. 반대로 땅의 것은 당연히 사람의 일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일을 찾지 않고 생각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일이란 거의 우리가 확신을 갖고 있는 일입니다. 베드로처럼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가로막고 꾸짖으며 거부하는 일입니다. 그것 자체를 포기하고 버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 것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지혜로 그렇게 하려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존재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을 등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역사에 참여하여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자유시장 경제의 영향과 혜택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보호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 체제 아래서 그것을 부정하면 안 됩니다. 역사에 참여하되 사상이나 제도를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친 생명적인지 반 생명적인지 살펴서 처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땅의 것은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입니다. 그런 것을 분별하는 능력은 우리가 공부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을 쌓기 위해 공부해야 하지만 그 공부는 단순이 이론적이고 합리적이고 학문적인 차원의 공부가 아닙니다. 마치 농부의 농사 노하우와 같은 것입니다. 일자무식의 농부라도 농사를 잘 짓는 경우가 있고 과학적 영농기술을 배워서 농사를 잘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생명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공부를 많이 해서 배우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고 실제 삶에서 터득하기도 합니다. 둘 다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생명 친화적으로 사는 것이 경건의 능력입니다.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그것에 대한 분별력을 전제하고 주시는 말씀입니다. 기도만 하면 저절로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고 공부만 많이 한다고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말합니다. 땅의 것은 우리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죽은 것은 죄와 죄의 욕망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고 묘사하였습니다(골 3:3). 이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활동합니다. 생명 자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생명은 녹색 식물의 광합성보다 더 복잡하고 신비합니다. 인간이 녹색식물의 광합성을 관찰하려면 고도의 과학지식에 의존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이해하는 것도 고도의 성경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수준에서 생명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들은 상호작용을 통해 생존환경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손길은 그 모든 것들의 배후에서 다스리십니다. 그 모든 관계양상을 우리가 다 파악은 할 수 없어도 생명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는 마치 농부가 곡식을 가꾸는 것과 같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작은 새싹 하나에서 탐스럽게 무르익은 열매를 바라보는 농부처럼 장차 완성될 그 생명의 완성을 바라보며 이웃과 모든 이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해치는 모든 것들은 제거하고 막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이 지배합니다. 민주주의와 인본주의는 인간을 위하는 제도이며 나름의 상대적 순기능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자살 제도요 사상일 뿐입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때문에 망하고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때문에 망합니다. 이것이 인류가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한 부활생명만이 완성과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미 우리는 그 생명을 얻었고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그 생명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은폐되어 있어도 우리는 생명 지향적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은 모든 생명체가 바라는 것입니다. 은폐되어 있을지라도 그 생명이 우리를 지배하여 날마다 놀랍고 신비로운 새 생명의 경험이 풍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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