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과 하나님 나라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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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7-04-1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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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강조되었습니다. 바울은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믿음이 헛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신학과 교리와 신앙고백과 성경까지도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모든 설교와 기독교 학문과 문화도 부활을 증거 해야 합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것이 복음인데, 그 구원은 새 생명으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은 지금의 생명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부활의 생명이 필요합니다. 부활을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은 지금이 아니라 장차 일어날 일인데 그리스도인의 지금의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부활 신앙은 종말에 완성될 생명의 완성을 지금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선취라고 하는데, 미래에 완성될 생명의 완성을 지금에 적용하여 사는 것으로 이를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영원한 생명, 즉 부활 생명으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 생명은 종말에 완성될 창조와 구속을 지향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창조와 구속을 지향하는 부활 생명의 특징이 바로 하나님 나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 전이나 부활 후나 변함없이 창조와 구속을 이루어 가시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역사에나 교회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지만 교회는 하나님 나라 통치를 따릅니다. 세상이 하나님 나라 통치를 거부한다고 하나님 나라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악한 자라도 하나님 나라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분별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거의 대부분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별 관심이 없습니다.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교회부흥, 선교, 형통, 병 고침, 심리적 위안 같은 것들입니다. 교회의 메시지가 세상에서 하는 힐링 프로그램이나 성공담이나 심리상담이나 인문학 강의나 예능 프로그램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프로에 참여하는 목회자도 있고 그런 프로그램을 교회에서 패러디하기도 합니다.
국가나 사회는 아무리 탁월한 이념이나 사상이나 제도나 프로그램을 개발해도 부활을 약속하지는 못합니다. 복음은 죄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이고, 구원은 곧 새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며, 새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신앙으로 사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가 교회 생활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훌륭한 믿음으로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존재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집중하여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고상한 인격이나 신비한 체험이나 학문적 깊이나 논리적 설득력이 있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어떤 주장이라도 부활 생명의 특징, 즉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야 하고 가능한 그런 것들을 개선하여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가 복음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을 오해한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가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자본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가 아닌 여러 사상이나 철학이나 이념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런 것을 복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상이나 이념들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온갖 사상이나 이념을 종교적 수준에서 신봉하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최종적 절대 판단자라는 전제에서 갖게 되는 태도입니다.
복음이 아닌 사상이나 철학이나 이념은 그 자체로 속되기보다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거나 하나님께 복종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속되거나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복음에다가 철학이나 사상을 첨가하거나 섞어놓은 경우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철학도 복음은 아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기여한다면 일반은총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은총이라도 복음에 첨가하거나 복음을 왜곡하는 도구가 된다면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또한 그런 것의 부작용을 염려하여 아예 처음부터 철학이나 사상이나 과학을 속되다고 매도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극단적인 보수신앙인들의 반지성적 태도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 사상은 이원론입니다. 사도 요한이나 바울은 이원론의 심각한 도전과 폐해를 직시하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교회가 경계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이원론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처음부터 존재 자체가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다고 전제합니다. 이러한 이원론은 모든 기독교 진리를 이원론적으로 설명합니다. 이원론은 모든 성경의 진리를 뒤틀어 놓았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인간, 하나님 나라, 교회, 세상, 성화 등에 대한 설명이 다 성경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짧은 글에서 이원론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부활과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살펴보는 것이 현실적으로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원론의 기원은, 종교적으로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로부터 온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는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입니다. 그는 여러 종교들을 하나의 종교 사상 체계로 발전시켰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기본적으로 철저한 일신론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엄격한 이원론을 신봉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이원론적 사상은 선악의 문제를 다룰 때 더욱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은 유대교의 묵시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도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성경이 이원론적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실제로 이원론의 유혹을 받아 이단에 빠지기도 하였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뿐 아니라 기독교 지난 2천년의 역사 내내 교회는 이원론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이원론의 영향은 심각할 정도입니다. 씨 에스 루이스는 기독교 다음으로 그럴듯한 신조가 바로 이원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이원론은 기독교를 왜곡하고 오해하게 하는 영향력이 큰 사상입니다.
철학적으로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 사상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독교의 영혼불멸설은 헬라 철학의 이원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헬라 철학에 따르면 영혼은 이데아로부터 와서 잠시 인간의 몸 안에 거주하다가 인간이 죽으면 다시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인간의 몸은 영혼을 가두는 감옥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영혼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을 받는 것입니다. 영과 몸을 철저하게 이원론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헬라의 이원론이 기독교에 상당히 영향을 미쳤습니다.
요일 4:1-3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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