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윤리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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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7-05-3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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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사상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고 기독교와 깊은 관련이 있지만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그리고 자연과학은 기독교에 도전하면서 발전한 사상이고 학문입니다. 서구의 사상과 학문이 기독교 사상과 비슷하여도 그 중심에는 반기독교 정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서구의 사상과 학문이 선과 정의와 자유와 윤리를 표방하더라도 무비판적으로 그것들을 추종하거나 수용하면 위험합니다.
공리주의는 그러한 사상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이래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윤리적 사상인 공리주의는 인간 행위의 윤리적 기초를 개인의 이익과 쾌락의 추구에 두고, 무엇이 이익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행복이라고 하며, '도덕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가리켜 ‘최대행복의 원리’(Greatest Happiness Principle)라고 부릅니다.
이 사상은 그 한계와 모순으로 인하여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근대 시민사회의 윤리적 기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고전경제학의 사상적 기초와 자본주의 질서 구축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공리주의의 제1원리인 개개인의 사익추구가 공익의 보장과 직결되는 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익 추구가 공익보장이 된다는 주장에 논리적으로 동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기심이 자본주의가 작동하게 하는 에너지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버나드 맨드빌(Bernard de Mandeville)이 쓴「벌들의 우화, 또는 사적인 악, 공적인 이익-The Fable of the Bees, or Private Vices, Public Benefit」이라는 책은 사익 추구가 공익의 보장이 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 때까지는 성실한 노동이 부를 창출한다는 생각이 건전한 경제학 이론을 뒷받침 해왔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사람들이 성실한 노동자의 가치를 소중한 것으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맨드빌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은 부자라고 하였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을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 부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부자의 탐욕과 악착스러움이 결국은 모든 이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준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맨드빌도 부자가 빈자보다 훌륭하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부자들의 전형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맨드빌의 주장은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18세기와 그 이후 거의 모든 위대한 경제학자와 정치 사상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자본주의 이론의 기초를 놓은 데이비드 흄이나 애덤 스미스도 맨드빌과 같은 이해의 토대에 서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많은 돈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지만 부자가 많다는 것에 매우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아침에 내가 빵을 먹게 되는 것은 농부와 제빵 업자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돈을 벌려는 이기심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불편한 진실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이 끊임없이 부자를 비난하는 이유가 곧 부자들의 이기심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보다 나은 내일을 지향하며 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점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에너지가 바로 인간의 이기심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자유 시장 경제원리는 인간의 이기심이 아니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완전히 제거된 이상적 제도가 사회주의 경제이론입니다. 그런데 사회주의 경제가 성공할 수 없는 원인은 인간의 이기심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모두가 평등하게 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이고 부자들은 불평등 자체를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사회과학적으로 판단하면 자유시장 경제 체제 아래서의 부자는 악당입니다. 사회주의는 사회 악당인 부자의 존재를 제거하고 인간의 이기심을 부정하여 그들이 상정했던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가난한 나라와 사회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은 이기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 자체를 부정하거나 비난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욕망을 이타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집단은 인간의 욕망을 이기적이라고 하여 비난하고 억제하고 제거하려 할 것이 아니라 자원으로 활용하도록 모든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부작용 또한 적지 않지만 인간의 이기심(욕망)을 에너지로 활용한 긍정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칼 막스를 비롯하여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자들은 헤겔의 정반합의 이론을 차용하여 자본주의 이전은 ‘정’이고 자본주의는 ‘반’이며 공산주의는 가장 좋은‘합’이라고 하였지만 역사적 임상실험 결과는 매우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선용할 방법을 찾지 않고 사회과학의 잣대로 그것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제거하려 했다가 실패하였습니다. 과학과 합리는 인간에게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인간과 인간 역사는 과학과 합리만으로 이상적 목적을 이룰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인류는 유구한 역사를 통해 그 같은 사실을 수 없이 확인하였습니다. 비도덕적인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도덕적 목적을 위해 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들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순진한 지성인들에게 인간 이성이나 사회과학은 곧 절대이기 때문에 미신처럼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공리주의자들처럼 노골적으로 쾌락이 선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간과 역사의 초 합리적이고 초 과학적 측면을 인정하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 이성과 합리를 따르는 이들은 오랜 시간의 역사적 임상실험 결과를 통해서 이성과 합리의 한계에 직면하게 되면 또 다른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자유민주주의나 자유 시장경제 제도는 불완전하거나 가치중립적인 것들을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잘 활용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나은 어떤 사상이나 제도가 개발된다면 당연히 대체해야 할 상대적인 사상이고 제도일 뿐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처음부터 불완전한 것들이 완전히 제거된 사상이나 제도를 상정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인간과 역사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며 교만입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선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나 원리가 있는가를 찾아왔습니다. 철학자들에게 그것은 지상 과제이기에 지금까지도 계속 논쟁 중입니다. 공리주의가 발견한 그 기준은 쾌락입니다. 공리주의는 행복의 조건을 쾌락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철학자들이 어렵지 않게 비판할 수 있는 허점과 한계가 많습니다. 사실 행복이 무엇이냐는 것부터가 철학적으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오래 된 난제입니다. 또한 공리주의가 말하는 ‘쾌락’에 대한 정의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쾌락 자체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리주의는 고통이 없는 상태를 쾌락이라고 정의하지만, 고통이 없는 진정한 쾌락이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고통은 쾌락을 증진시키기도 합니다. 어떤 쾌락이 윤리의 한 척도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선악을 판단하는 최고 원리나 기준은 결코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사회과학적으로 볼 때 개인의 쾌락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쾌락 즉 공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러한 비판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이 상호 충돌하는 구도로만 사회를 보려고 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공리주의가 아닌 그 어떤 이론이나 사상도 쾌락 대신 절대적인 어떤 기준을 설정하고서야 윤리를 말할 수 있을 텐데 쾌락이나 이성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칸트나 볼테르가 가정으로서의 신(하나님)을 설정했던 무신론자의 고충을 이해할 만 합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절대 자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철학과 사상은 필연적으로 끝없이 철학적이고 학문적인 방황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공리주의 철학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려면 모순된 철학이 만들어낸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위험부담이 따르는 것도 인정합니다. 언어와 방법은 단순히 언어와 방법만이 아니고 언제나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가치중립적 방법을 선용하려다가 그것에 함몰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그런 것들을 피하여 살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소수보다는 다수, 다수보다는 진리를 따르도록 가르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악하거나 불완전한 것에 대해 분별하고, 또한 상대적으로 옳고 선한 것을 분별하고 선택하며, 선을 고무시키며 악을 억제하는 일에 진력하되 불의와 불완전한 것에 대에 오래 참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지만 또한 악하고 불완전한 죄인과 철학과 제도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께서 하시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살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 자라기 때문에 모든 설교와 신학과 기독교교육은 하나님을 드러내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잠 30:3-6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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