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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지향하는 삶의 방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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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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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죽음을 존재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으로의 이행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없는데도 세상이 잘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참 솔직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죽음이 아니더라도 인간에게는 그런 심리가 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내가 있을 때보다 잘 되는 것을 은근히 시기하고 질투하는 심리가 인간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떠나고 나면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데 화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존재하지도 않는 세상에 대하여 화를 내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죽음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이쪽에서 저 쪽으로의 이행이라고 하지만, 돌아올 수 없는 저쪽을 막연하게나마 전제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참으로 궁금한 일일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 평생을 공부한 대철학자가 죽음이란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의 떠남이라고 하니까 궁금증은 더 증가됩니다. 또한 그는 죽음을 복귀 없는 떠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죽은 사람을 가리켜 불귀의 객이 되었다고 하는 것도 복귀 없는 떠남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죽음을 주소를 남기지 않은 떠남이라고 하였습니다.

 

독일의 소설가 에른스트 융어는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사다리를 높이 들고 올라가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죽음에 대해 알아보려고 죽어가는 자를 따라가면서 자세히 관찰을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죽음의 담을 넘으면서 사다리를 가져가더라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죽음이란 인간이 경험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안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못 살아나야 진짜 죽은 것인데, 살아난 것은 안 죽었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절대로 경험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죽음을 운동 없음, 운동 정지라고 하기도 하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남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유투브에 어느 노부부의 “님아, 저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는 것을 죽음의 강을 건넌다고 이야기 합니다. 무엇보다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나 가족의 죽음이나 슬픔을 만들어 냅니다.

 

예일대학의 Nicholas Wolterstorff 교수가 쓴 <Lament for a So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비애’라는 뜻인데, 우리 말 번역에는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의 아들이 산을 좋아하는데, 독일 유학 중 알프스를 등반하다가 실족하여 죽었습니다. 그가 전화로 아들 사망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일 년 후 아들의 무덤을 찾아가는 순간까지의 일들과 생각들을 글로 담아 낸 책입니다.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그가 철학 교수니까, 그것도 기독교 철학자니까 죽음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대한 진지한 대답을 찾는 철학적 애가라고 할 수 있는 책입니다.

 

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에서 “월터스토프 씨, 말씀 드려야겠는데요. 에릭이 죽었습니다. 월터스토프 씨, 듣고 계세요? 곧장 오셔야 겠습니다. 아들이 죽었습니다.”월터스토프는 그 순간 자기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나는 몇 초 동안 포기의 평화를 느꼈다. 팔을 펼치고 축 처진 아들을 누구에게인가, 누구에게 바쳐 드렸다. 그런 뒤에 고통, 차갑게 불타는 고통이 찾아왔다.’영어로 Then the pain-cold burning pain라고 하였습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중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삶과 고통 그리고 죽음에 대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책입니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잘 나가는 판사였던 그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동료와 친구들은 안타까워하기는커녕 그가 죽게 되면 얻게 될 이익에 관심을 쏟습니다. 자기는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자기와 함께 안타까워하고 슬퍼해 주지 않아서 절망 가운데 매우 슬퍼하고 외로워합니다. 죽음은 아무도 경험할 수 없지만 죽음 직전까지의 경험을 이렇게 잘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위대한 점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가까워 오자 철저히 혼자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가족과 친구가 찾아와서 위로를 해도 결국은 죽음 앞에서는 혼자 서 있게 됩니다. 이반 일리치는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고 같이 슬퍼해 주지 않아서 외로움을 느끼지만, 그 말은 누구의 위로나 격려도 소용없음을 이야기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자기를 붙들고 울면서 자기 손등에 눈물을 떨어뜨렸습니다. ‘이게 뭐지?’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빛을 보았습니다. 가족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무엇보다 아내를 미워하며 살았는데 아내를 쳐다보니까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로 울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못하고 ‘데리고 나가, 불쌍해, 당신도’라고 말 합니다. 작가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가 평생 동안 아내를 미워하기만 했기 때문에‘미안해’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런 말을 해 본적이 없어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데리고 나가’라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미안해’대신에 ‘데리고 나가’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들을 데리고 나가 달라고 한 것입니다. 저자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가 ‘데리고 나가’라고 한 말이 아내에게 ‘용서해 줘’라는 뜻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러시아 말로 ‘프라스띠띠(Прости)’는 ‘용서해 줘’라는 뜻이고 ‘프라푸스띠띠(ПроПусти)’는 ‘데리고 나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용서해 줘’라는 말 대신 ‘데리고 나가’라고 했지만 그 말이 아내에게 자신의 지난 과오를 용서해 달라는 의미로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자기의 과오를 깨닫고 한 마디 하는 순간에 이반 일리치는 빛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아내를 용서하고 아들의 관심과 사랑을 깨달은 순간 빛을 보았습니다. 죽음 앞에서 빛을 보았다는 것은 죽음의 긍정성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우리는 죽음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끝인지, 새로운 시작인지 다 설명할 수 없어도 우리는 부활을 믿기 때문에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죽음 그 자체를 선하다 혹은 악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귀하다고 하였습니다. 개역성경 시편 116:15절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개역개정은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는 같은 뜻입니다. 여기 의미 있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음을 귀하게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보시는 관점이 참이고 진실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죽음 자체가 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도는 영생을 소유한 이들이기 때문에 죽음까지도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도는 영생을 소유한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도 나쁘지 않고, 나쁘지 않을 뿐 아니라 복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때 죽음이란 두렵고 무서운 것이지만 영생과 대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시면 귀한 것이지 왜 다른 설명이 필요하냐 라고 하겠지만, 사실 성경에 하나님께서도 죽음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말씀하신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많은 믿음의 선진들도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이런 설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 자체를 두렵게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우리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는 죽음이 두려운 것만은 아닌, 오히려 복되다는 죽음의 긍정성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성도의 죽음은 복된 것입니다. 성도는 불신자처럼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참 성도라면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 중에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물론 믿음이 깊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라고 모두 초연하게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죽는 순간의 모습이나 태도를 가지고 믿음의 유무나 신 불신을 판단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 중에도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시 73:1-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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