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두 신앙-표적신앙, 지혜신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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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8-04-2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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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가리켜 계시의 종교라고 합니다. 계시의 종교란 그 교리가 인간 경험이나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독교가 인간 경험이나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의미는 경험이나 이성을 통해 이해하거나 수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기에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믿게 되는 것이 이성이나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천명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복음을 믿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따라서 복음을 증거 하는 이들도 논리와 합리적 설명을 통해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바울은 아주 구체적으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바울의 학문이나 논증 능력을 생각할 때 누구와의 논쟁에서도 학문과 논리가 부족하여 곤란을 겪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언제나 학문이나 논리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고 복음을 듣고 믿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전도의 미련한(?)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의 모든 가르침과 전파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바울 뿐 아니라 모든 복음 증거자들도 동일한 전제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쳤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복음 증거자들의 태도와 방법은 “미련한”것이었습니다. 성경 계시의 이러한 특징은 초대교회 때부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고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문제는 일부 기독교인들에게도 그 같은 복음이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하나님이나 복음은 논리나 합리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이성의 잣대로 접근하게 되면 납득할 수 없는 어리석은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하나님의 초월적 계시를 이성과 감성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 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는 일종의 신앙엘리트주의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순진한 신자들을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업신여기며 무시하고 조롱하였습니다. 사도들과 그 외의 많은 복음 증거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의 비난과 조롱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초이성적이지만 반이성적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를 오해한 자들이 하나님의 계시와 이성이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기독교 안에서 계시와 이성이 대립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교부들 중에는 복음이 헬라의 철학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오리겐 같이 개인적으로 경건하고 모범적인 신앙의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들은 기독교 복음도 헬라 철학 못지않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의 노력은 진정성에 있어서는 눈물겹도록 진지하였지만 계시가 밝히 드러난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 복음을 가지고 철학에 아부를 한 모양새입니다.
반면에 헬라 철학에 친화적이었던 자들과는 달리 그러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입장의 대표적인 사람이 터툴리안입니다. 그가 한 “나는 모순되는 고로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 “예루살렘과 아덴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Quid Athenue Hierosolumis)”는 유명한 말들이 계시의 초월성과 절대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의 진리를 헬라 철학과 버금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적극적 반작용에서 나온 것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전통 기독교는 그와 같은 헬라 철학적 영향력으로부터 기독교 진리를 지키고 변증하기 위해 지금까지 싸워오고 있는데, 보수주의자들은 터툴리안과 같이 저돌적인 방법으로 싸우다가 반지성적이 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이성적 자유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때로는 터툴리안처럼 할 필요도 있지만 지나치게 저돌적인 태도는 반이성적, 반지성적이 될 위험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지만 결코 반이성적이거나 반지성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인간 이성과 지성은 하나님 형상의 일부이고 인간 존엄성의 토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반이성적 반지성적이 되면 기독교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인간을 도우실 때 이성과 지성을 존중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와 같은 전제에서 바울처럼 지혜신앙을 분별하고 배격해야 합니다.
표적신앙 반대편에 지혜신앙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이라는 면에서는 표적신앙이나 지혜신앙이 같습니다. 바울 시대에 지혜는 특별히 헬라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이라는 말의 뜻이 지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지혜는 단순히 지식이 많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열심 덕분에 학문과 문명이 발전하기도 하였습니다. 표적이 그렇듯이 지혜도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지혜를 얼마나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지혜신앙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최고의 권위로 생각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의 그러한 생각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신앙일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지혜를 구하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목숨 걸고 반대하고 배척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까지 그렇게 무례하고 거칠게 십자가를 반대했던 것입니다. 인간 지혜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그 길을 막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이 조금만 지혜로웠다면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자들이나 다른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은 지혜롭지 못하고 미련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지 말고 그 다음날 고쳐주었으면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렇게 큰 충돌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도 조금만 지혜롭게 머리를 쓰면 피할 수 있는데 죽을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표적신앙은 모든 것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반면에 지혜신앙은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믿습니다. 하나님 위에, 성경 위에 이성을 두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표적신앙과 지혜신앙 자들이 제기하는 이런 문제에 대해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바른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런데 그 정답이 소위 지혜로운 사람들에게는 납득이 안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이 못 박혀 죽었는데 그런 예수가 어떻게 구세주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런 논리로 비난하는 헬라인들의 조롱과 무시를 당하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에게는 기분 나쁜 존재였고 헬라인들에게는 무식하고 미련한 존재였습니다.
어쩌면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 majority가 표적신앙과 지혜신앙자들이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참 그리스도인은 minority인지도 모릅니다. 형통과 축복의 증거가 있어야 참 신앙인이라고 주장하는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많습니다. 부흥을 물리적 규모로 판단하여 메가 처치 운동에 집착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메가 처치 지도자들 중에는 도무지 저속하기 이를 데 없이 비이성적이고 비지성적인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물론이고 교리와 신학의 기본 개념도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과거 한국교회 부흥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이나 현대 한국교회 부흥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소위 복음주의 4인방을 포함)은 대부분은 표적신앙의 경향이 농후합니다. 그들에게는 당연히 전제되어 있어야 할 스스로가 표방하는 개혁신학의 개념의 기초가 열악하기 짝이 없어 정체성 없는 기독교인을 양산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은퇴 후에도 스스로의 부족이 무엇인지 바르게 진단하지 못하는 것 같고, 그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도 그들에게 배웠던 이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복음과 성경적 인간관과 일반은총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표적신앙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반대편에 WCC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경향의 교회와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오류를 수없이 많이 지적할 수 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한다면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 이성을 앉혀 놓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들을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데, 그들 자신은 고린도 교회의 지혜신앙인들처럼 바르게 믿는 이들을 무식하다고 교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표적신앙인들이 기분 나쁘게 생각하거나 지혜신앙인들이 무식하다고 무시하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는 순전한 신자가 되어 풍성한 영적 생명으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2-2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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