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두 신앙-표적신앙, 지혜신앙1 >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이곳은 2017년 이후에 올려진 글입니다. 이전에 올려진 오피니언 글은 지난 오피니언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오피니언

왜곡된 두 신앙-표적신앙, 지혜신앙1

페이지 정보

황상하2018-04-16

본문

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자장과 자하 중 누가 더 어집니까요?”공자가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모자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자공은 둘 중에 누가 더 나은지를 알고 싶어 또 물었습니다. “그럼 자장이 더 낫다는 말입니까?”그 때 공자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지나칠 과(過), 같을 유(猶), 아니 불(不), 미칠 급(及)으로“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공자를 비롯하여 옛 중국인들은 중용(中庸, golden mean)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중용이란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고대 중국의 요 임금과 순 임금의 천하 통치의 정신을 도통(道統)이라고 하는데, 이 도통의 요체가 중용에 있으므로 이를 터득하고 실천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적 욕심과 도덕적 본성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인간적 욕심이 없을 수 없으며, 형편없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덕적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욕심과 도덕적 본성을 다스리는 이치가 중용이라는 것입니다. 동양 철학에서는 중용으로 하늘의 뜻과 인간의 도를 설명합니다. 효도와 자식 사랑, 형제간의 우애, 가정의 화목, 이웃 사랑이 인간이 가야 할 도이고 그 도를 재단하고 다듬는 것, 즉 마름질 하는 것을 교라고 하는데 유교가 바로 그런 것을 가르칩니다.

 

중용은 동양철학뿐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에서 중용을 μεσοτης라고 하는데, 그 뜻은 영어로 a middle or central position, 또는 a mean between two extremes, 즉 물리적으로는 중감지점을 의미하고 사상적으로는 두 극단의 중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산술적인 중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생기는 중용을 구분하였습니다. 전자는 사물의 한가운데(the intermediate in the object)인데 비하여 후자는 우리들에게 대하여 꼭 알맞은 것(the intermediate relatively to us)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튼 중용의 개념을 동서양 철학 모두가 모든 도덕 행위의 준칙, 지침으로 삼고 강조하여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덕으로 강조였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동양에서는 중용을 강조하는 사람은 인품이 고상하고 사상이 깊은 것처럼 생각하고 대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양이나 서양에서 중용의 개념을 강조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무신론자입니다. 기독교적 중용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경계시가 밝히 드러난 오늘날에는 하등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중용이란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중용이야 말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주장하면서 현대인의 삶의 방법에는 천국으로 가는 문이 닫혀 있고 기독교는 천국으로 가는 문이 죽은 뒤에 열린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를 잘 모르는 자가 중용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하는 학문적 객기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중용의 가치를 강조할 수밖에 없고 중용의 가치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단한 설득력으로 작용합니다. 지금 한국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중용의 가치를 표방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도 중용의 가치에 소위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그런 가르침에 감동을 받는 것을 나무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복음을 바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혼란을 겪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극단적인 두 형태가 있습니다. 이 두 극단적 신앙형태는 사도 바울에 의해 지적된 것으로 표적신앙과 지혜신앙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표적신앙의 극단으로, 헬라인을 지혜신앙의 극단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표적신앙과 지혜신앙이 왜곡된 신앙이라는 사실은 참 신앙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는 토대에서 지적된 것입니다. 표적신앙이 체험과 감성의 극단이라면 지혜신앙은 이성적 극단입니다. 바울이 왜곡된 두 극단적 신앙 형태를 지적한 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바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고 복음을 중용의 가치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힘을 잃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복음을 중용의 가치로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중용의 가치로 변질시킨 경우는 넓게 보아 지혜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과 교회에서 표적신앙, 지혜신앙, 중용신앙 같은 형태의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복음은 변할 수 없고 인간의 존재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지적은 고린도교회에도 적합한 지적이고 현대 교회에도 적합한 지적입니다.

 

바울의 표적신앙과 지혜신앙에 대한 지적이 표적을 부정하거나 지혜 무용론은 아닙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는 것이 모든 유대인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 다는 것도 모든 헬라인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경향성에 대한 지적입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기독교의 참 진리는 표적신앙도 아니고 지혜신앙도 아님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표적이나 지혜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표적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는 중요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러니까 표적 자체를 나쁘다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잠언이나 전도서 같은 성경은 지혜를 얼마나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복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지혜를 의인화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본문을 잘 못 이해하면 성경이 표적과 지혜를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성경 전체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표적신앙은 건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표적의 부정적인 측면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나치게 표적에 집착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들은 수도 없이 많은 표적을 보았고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계속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표적을 구하는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신앙은 건전한 신앙이 아니라는 뜻으로 바울이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우리는 왜곡된 표적신앙과 표적을 믿는 건전한 신앙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과 영적 생명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표적신앙의 경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한 순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런 경향입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기도하고 마음으로 바랍니다. 만약에 모든 것이 표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표적 신앙은 주로 이단들이 갖는 신앙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모든 것이 기적적으로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이단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표적신앙의 특징들이 우리들에게도 상당할 정도로 농후합니다. 우리 자신들의 신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음 깊은 곳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와 책임보다는 기적으로 대박이 터지기를 기대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반드시 기복신앙이 아니라 건전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경향은 있습니다. 또한 그런 신앙을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기본적인 교훈의 토대에서 조금만 주의하여 생각하면 표적신앙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가를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결단하여 행동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럴 능력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되, 생각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결단하여 행동하며 믿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믿음의 질서입니다. 비근한 예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지키려고 하지 않고 성경책을 중요시 하는 것도 일종의 표적신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무슨 마술적 능력이라고 생각하여 외우고 읽기만 하면 능력이 나타나고 은혜를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도의 능력이라는 말도 사실은 잘 못된 말입니다. 기도를 하기만 하면 무조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간절히 오랫동안 하면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기도는 노력하지 않는 대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기도요,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으면서 기도 많이 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영적으로 게으른 사람의 주장입니다. 표적 신앙은 미신적 신앙입니다. 표적 신앙은 방법과 수단을 신앙하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 전쟁에 법궤만 가지고 나가면 이길 거라고 믿고 나갔다가 이스라엘 군인 4만 명과 함께 죽었고 법궤도 빼앗겼습니다. 그 사건은 법궤만 가지고 가면 전쟁에 이긴다는 생각은 미신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 사건입니다. 예배만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도 미신입니다. 기도만 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도 미신입니다. 선교, 헌금, 봉사만 열심히 하면 모든 다른 잘못도 탕감된다고 믿는 믿음은 미신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표적이 없으면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아무 것도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은 노아의 표적이고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홍해에서 구원 받은 표적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표적을 의미합니다. 이런 표적을 주신 것은 이제 다른 표적을 구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잘 믿고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종교적으로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표적을 추구하였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도 일종의 표적신앙이고 자본주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학자가 학문적 업적에 집착하는 것도 표적신앙과 같은 것이고 목회자가 목회 성공에 집착하는 것도 표적신앙입니다. 선교사가 선교적 업적에 집착하는 것도 표적 신앙입니다. 표적 신앙은 십자가의 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업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에 관심이 없고 성공의 방법에 집착하는 모든 인간 행위는 표적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영적 생명은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것처럼 예민한 신전의식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생각과 의식이 집중되는 것이 영적생명 현상입니다. 하나님 없이 무엇을 생각하거나 시도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오피니언 목록

게시물 검색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연락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