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세상, 두려운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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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8-07-1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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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를 상징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파도의 격랑 위에서 시달리고 있는 배 그림입니다. 그 배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타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교회가 처한 상황이 이 배와 같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예수님께서 함께 타고 계시는 배, 즉 교회가 격랑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그림은 초대교회가 처한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한 동안 그와 같은 특별한 역사적 상황 가운데 처하여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거칠고 무서운 파도가 작은 배를 삼켜버릴 것 같은 불같은 시련과 박해의 한 가운데 처하여 있었습니다.
교회가 이런 시련에 직면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초대교회 당시의 세상은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세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웠지만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두려웠습니다. 그 이유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믿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세상이 그렇게 무서울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로마가 온 세계를 지배하였지만 당시 세계는 로마의 통치 아래서 나름의 평화를 누렸습니다. 로마 황제를 신과 같은 존재로 인정하면 로마가 그들을 지켜주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황제를 신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에 로마로 상징되는 세상이 무서웠습니다. 얼마나 무서웠든지 땅굴을 파고 그 안에서 살았습니다. 카타콤이라는 것이 그래서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무서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세상이 무서운 존재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세상이 무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점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무섭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세상이 더 무섭습니다.
초대교회의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구가하는 하나님 나라와 너무 다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정복하고 지배할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처럼 교회가 세상을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되지만,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그러한 세상은 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침투하여 들어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 나라가 지금 여기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두 나라는 영향력에 있어서 공유하는 부분도 있고 전혀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공유하는 부분은 같기 때문에 그 영향력에 있어서는 서로 간의 긴장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 사람들이 자연법과 사회법을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도 그 법들을 지킵니다. 도덕과 윤리와 예의 같은 것도 하나님 나라 백성과 세상 사람들이 함께 지킵니다. 그런 것이 공유하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전혀 공유하지 않는 영역이 있습니다. 우상을 섬긴다거나 사람을 숭배한다거나 명시적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세상 나라 사람들과 다릅니다. 간음이나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거짓 같은 것은 계명으로 금한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도 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그 외의 세계 여러 나라가 간음은 죄가 아니라고 결정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으로 금지한 것을 국가가 죄가 아니라고 결정한 것입니다. 간음이나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거룩하고 신성한 혼인과 가정을 파괴하는 짓입니다. 간음이나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혼인과 가정을 파괴하는 행위인데, 개인이나 국가가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불신앙의 핵심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는 불법과 폭력과 거짓과 사기와 속임수 같은 것이 삶의 능력으로 이용됩니다. 한국은 경제적인 면이나 과학이나 문화 같은 것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불법과 폭력과 거짓과 사기와 속임수와 선동 같은 것에서도 앞서는 나라입니다. 일반적인 경우 정치와 경제와 문화가 발전할수록 불법과 폭력과 거짓과 사기와 속임수 같은 것도 줄어듭니다. 그런데 한국은 정치 경제 문화가 성장하고 발전하는데도 불법과 폭력과 거짓과 사기와 속임수 같은 것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러한 사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불신자도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는 주위의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는 주위의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서 배운다는 사실입니다. 역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서 배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불신자들은 하나님 두려워하는 것을 배울 데가 없습니다. 따라서 불신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신자들의 책임입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처럼 이렇게 발전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불법과 폭력과 거짓과 사기와 속임수가 판을 치는 나라가 이렇게 발전한다는 것은 비정상적입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을 불쌍하게 여기셔서 오늘과 같은 경제적 발전을 하게 하셨습니다. 한국인이 근면해서, 똑똑해서, 정직하고 부지런해서 발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바라보면서 이해할 수 없는 나라라고 한다고 합니다. 저렇게 불법과 폭력과 거짓과 사기와 속임수가 만연한 사회가 어떻게 저렇게 발전할 수 있냐며 고개를 갸우뚱한다고 합니다. 거의 모든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이 도둑이나 다름없는 나라가 이렇게 발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불법과 폭력과 거짓과 사기와 속임수 같은 것은 아프리카나 남미의 저개발 국가보다도 심합니다. 막연한 추측이 아니고 과학적 통계가 그렇습니다. 한국 정부에서 나온 통계와 일본에서 나온 통계와 OECD에서 나온 통계와 영국에서 나온 통계에서 한국의 도덕적 수준이 아프리카나 남미의 저개발 국가 수준이고 그 저개발 국가 중에는 한국보다 나은 나라가 많다고 합니다. 이런 통계는 이미 다 공개된 것이기 때문에 일일이 제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불법과 폭력과 거짓과 사기와 속임수가 삶의 능력으로 통용되는 사회는 한 미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없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영향력이 큰 지도자일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정적 영향을 크게 미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형교회 지도자를 손가락으로 꼽으라면 아무라도 열손가락이 모자랄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의 영향권 아래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리라고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한국은 지금 정치 경제 외교 안보 등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모든 혼탁하고 심각한 문제의 탁류가 한국 사회를 뒤덮고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 불법과 폭력과 부패와 거짓의 강이 학계와 예술계와 종교계까지 범람하였습니다. 그 불법과 부패와 거짓과 왜곡의 탁류는 어디에서 발원한 것일까요? 정치일까요? 언론일까요? 기업일까요? 학문일까요? 문학이나 예술일까요? 불법과 폭력과 거짓과 사기와 속임수 탁류의 발원지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가 그 탁류의 발원지입니다. 한국 문제, 정치와 경제 문제, 안보 문제, 북한 핵 문제, 복지 문제, 교육 문제, 전교조 문제, 노동조합 문제, 교회 문제, 교단과 총회 문제, 신학교 문제, 예술과 문화 문제, 갑질 문제 등 모든 문제의 발원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자연재해나 전쟁이나 핵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무서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입니다.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무서워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을 얕잡아 보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착각합니다. 그것은 믿음도 용기도 평안도 아니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영적 청맹과니와 영적 무지렁이의 특징일 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겉모양만 그럴 듯하게 꾸미고 경건의 내용이 없는 영적 어정잡이가 아닌가 하는 나의 느낌이 제발 나의 잘못 된 느낌이었으면 합니다.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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