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고 병들고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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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8-06-1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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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있는 존재에게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필연입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절망과 고통과 슬픔을 대동하고 찾아옵니다. 또한 늙고 병들고 죽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심각하기 때문에 아무도 희화화 하지 않습니다. 이 짙푸른 젊음의 계절 6월의 중순, 생명 약동의 절정 가운데서도 늙음은 진행되고 고통은 깊어가고 죽음은 다가옵니다. 어떤 이에게 죽음이란 놈은 때로 늙음과 병듦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찾아와서 주위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늙음과 병듦과 죽음은 고질적인 위인의 오만함도, 정치인의 허풍과 거짓과 객기도, 지식인의 노출증도, 생각 없는 사람들의 경박함도, 신앙인의 외식도 완화하거나 치료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고려 말 충신 우탁(禹倬)은 퇴계가 백세의 스승으로 부르고 흠모하였던, 정치적으로는 대쪽 같고, 학문적으로는 중국의 여러 학자들도 놀라게 하였던 석학이었고, 특히 시문학에 탁월한 인물입니다. 그의 탄로가(嘆老歌)는 인간의 늙고 병들고 죽는, 자연 질서에 맞서보려는 인간의 안간힘과 안타까움을 담고 있으며, 자신의 인간적 욕망에 대해 죄책감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春山에 눈 노긴 바람 건 듯 불고 간 대 업다
져근듯 비러다가 불리고쟈 마리 우희
귀 밋테 해 무근 서리를 노겨 불가 하노라.
봄 산에 쌓인 눈을 녹인 바람이 잠깐 불고 어디론지 간 곳 없는데, 그 바람을 잠시 빌려다가 자신의 머리 위에 불게 하여 귀 밑에 여러 해 묵은 서리(백발)를 녹여(다시 검은 머리가 되게)볼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의 돌아가신 권사님이 ‘늙고 보니 부러운 것은 젊음 밖에 없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늙지 말려이고 다시 져머 보려타니
靑春이 날 소기고 白髮이 거의로다
잇다감 곳밧찰 지날 제면 罪 지은 듯하여라
그가 1308년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충열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하자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입궐하여 상소 하였습니다. 그 때 신하가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 못하자 우탁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경(卿)은 그 죄를 아는가!”라고 호통을 치자 대신들이 어쩔 줄 몰라 말문이 막혔고 왕도 부끄러워하는 낯빛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예안(지금의 안동부근)에 은거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닦으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왕의 비행에 의분 충천하여 목숨 걸고 직고하던 그였지만 자신이‘잇다감 곳밧찰 지날 제면 罪 지은 듯하여라’고 하여 나이 늙어 백발이 성성한데도 아름다운 여인을 볼 때면 마음에 음심이 생기는 것을 죄책감으로 느꼈습니다. 늙어서도 철이 들지 않은 노인을 망령이 들었다고 하는데 우탁은 참 잘 그리고 우아하게 늙었습니다. 사람은 흔히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불만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존중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 아니고 자신의 몫임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내가 나에게 진실하고 성실할 때 다른 사람에게도 진실하고 성실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진실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면 자신을 왜곡하게 됩니다. 모르면서 아는 체, 알면서도 모르는 체, 과장, 허풍, 거만, 외식, 자랑, 비난, 오해 등 모든 나쁜 것은 자신에 대한 왜곡에서 비롯되는 것들입니다. 유치하고 격동적인 것은 버려야 할 어린아이의 특징이지만 소박하고 솔직하고 겸손한 어린아이의 수용성은 천국 백성의 모델입니다.
시인 천상병의 “귀천”이 생각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예순 네 해의 삶이 가난과 고문 후유증과 지병으로 점철되었지만 그는 자신을 괴롭혔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며 괴롭고 고달픈 일생을 즐거운 소풍이라 여기며 살았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이 세상 소풍 참 아름다웠었노라 말하리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생명에 진실하고 성실하여 육신이 피폐하게 망가졌음에도 자신의 존재가 아름답고 존귀함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영적 생명에 대한 성실함은 과장도 거짓도 왜곡도 필요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자신을 죄인임과 동시에 하나님 형상의 존귀한 존재임을 아는 정직한 앎은 초라한 외모와 구겨진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부른 인생 찬가의 가사처럼 고귀하고 아름답습니다. 모든 것은 제 자리에 있을 때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영국의 시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의 “피파의 노래”(Pippas Passes)입니다.
때는 봄(The year's at the spring)
날은 아침(And day's at the morn)
아침 일곱 시(Morning's at seven)
산허리에 이슬 맺히고(The hillside's dew-pearled)
종달새는 공중에 날고(The lark's on the wing)
달팽이는 넝쿨에 기고(The snail's on the thorn)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God's in His heaven)
온 세상 태평하여라( All's right with the world!)
만물이 창조질서를 따라 제 자리에 있을 때 온 세상은 태평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고 하나님을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시게 하였습니다. 제 자리를 이탈한 세상과 인간은 아스팔트 위를 기는 달팽이처럼 위험하고 고통스럽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자리, 짐승은 짐승의 자리, 남자는 남자의 자라, 여자는 여자의 자리, 노인은 노인의 자리 젊은이는 젊은이의 자리, 선생은 선생의 자리, 학생은 학생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준 제 자리를 지킬 때 아름답고 안전합니다. 질병은 고쳐야 하고, 장애는 바로 잡아야 하되 늙음을 젊음으로 바꾸려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남자가 여자 되려 하는 것도, 여자가 남자 되려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정하여 준 성을 취향에 따라 바꾸는 것은 콘크리트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의 무모함입니다.
어떤 이는 죽음이 있기에 비로소 삶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이는 죽음에 직면하여 삶을 바르게 보게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타락한 인생의 특징은 죽음 지향적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죽음 지향적 삶의 의미를 믿음 안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마치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의미처럼 소중하게 하셨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고, 참 믿음은 숨길 수 없으며, 가장 훌륭한 스승은 죽음이고, 성령은 기적을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게 하시지 않고 때로는 40년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인디언 어린이가 성인이 되려면 반드시 거처야 하는 과정이 있는데, 이는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정글에서 혼자 밤을 보내는 것입니다. 아이는 어른이 되기 위해 두려움과 공포와 어둠의 밤을 눈이 아프도록 온 신경을 곤두새우고 두리번거리며 응시합니다. 찰나가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지는 공포의 밤을 보내고 어둠이 새벽빛에 밀려 날 때쯤 아이는 나무 뒤에서 자기 주위를 향해 밤새 활을 겨누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행여 맹수가 아들을 해칠까 자지도 졸지도 않고 아들을 지키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아들은 용기가 아니라 믿음을 갖게 됩니다. 언제나 아버지가 자기를 지켜 준다는 믿음, 그 아버지에 대한 믿음은 아버지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인디언 아들은 죽은 아버지가 자기를 지켜 준다고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용기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를 지켜주신다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늙어도 병들어도 죽어도 나를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이들은 생로병사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4-6)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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