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 목사 "삶의 허상과 실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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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2-10-0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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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나타나 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것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허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물체를 보면서 그 곳에 물체가 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물체나 발광체가 그곳에 없는데도, 어떤 반사체 또는 발광체가 그곳에 있다고 느끼는 경우 우리는 그곳에 ‘상(image)’이 있다고 말합니다. 광학에서 말하는 ‘상(image)’은 빛이 굴절 혹은 반사되어서 생깁니다. 내가 본다는 것은 광원에서 나온 광자가 광속으로 그 물체에 부딪히고 튕겨져 나온 광자가 눈에 들어와 망막을 지나 시신경을 타고 뇌로 들어가면 뇌가 전기적 신호를 분석하여 그려낸 이미지를 보는것입니다. 그런데 뇌가 그려낸 이미지는 나의 내면 세계와도 같다고 합니다. 즉 내가 경험한것들, 내가 아는것들, 내가 상상하는 것들로만 만들어진 나의 내면 세계이지 물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자신이 보고싶은 대로만 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삶에 대하여 이렇게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이들은 자신의 내면 세계를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물체와 개념은 나의 내면 세계를 통해 보기 때문에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만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는것에 더더욱 집중하면 자신의 내면을 성장시킬 수 있고 중요하지 않거나 덜 중요한 나머지 것들에 신경을 덜 쓸 수 있어서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삶의 모든 것은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만큼만 의미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인간 삶에 대한 일종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란 인간의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철학으로 19세기의 합리주의적 관념론 또는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 시작하여 분석철학과 함께 현대철학의 주류를 형성하였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이전에 후설(Edund Husserl)은 현상학적 입장을 통해 철학의 관심을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실존주의 생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후설의 그 같은 주장은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의 비극적 체험을 통해 더욱 더 촉진되었습니다. 게다가 과학과 기술문명의 발달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반면에 인간의 주체성을 손상시키는 역현상도 초래하였습니다. 이같은 현상 또한 실존주의 생성을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이처럼 실존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면서 현대문명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항으로 등장한 철학입니다. 그것은 기술문명과 관료주의 그리고 객관주의에 대한 항변이며, 산업사회의 조직화로 인한 인간소외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현대사회는 불특정 다수인으로 형성된 대중사회 즉 익명성의 사회이며, 획일화된 일반법칙을 강요하므로 개체성과 주체성을 말살하는 사회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현대사회 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기를 상실한 비본질적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나'의 새로운 탄생을 갈망하고, '나 자신'의 주체성과 개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 실존주의가 추구하는 핵심 사상입니다. 사실 실존주의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실존이라 함은 말 그대로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고 실존 철학이라 함은 그러한 실존의 모습을 규명하고자 하는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어 적인 의미에서만 보았을 때는 실존주의는 방법론 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의 모습을 신 앞에 존재하는 고독자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니체를 비롯한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낭만주의와 쇼펜하우어의 허무적인 철학에서 그 사상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의 실존이라 함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와는 달리 인간의 모습을 아무 것도 아닌 무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의 모습에서 인간의 길을 찾고자 하는 철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존주의는 그 이전의 철학이 진리와는 동떨어진 모색만을 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랄 수 있으며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데카르트 이후의 신을 잃어버린 시대에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존주의에 대하여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실존주의는 실존 그 외의 것은 그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명제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인데, 실존주의는 인간이 삶을 느끼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종전의 모든 철학적 관념이나 종교의 우매함을 떨치고 실존적 인간과 삶을 이야기 하는 것, 이러한 삶에 대한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방식, 이것이 바로 니체의 생애 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입니다.
플라톤으로부터 헤겔에 이르는 전통철학은 그 관심이 주로 본질에 관한 문제였기에 철학자들은 철학의 주요 임무가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본질을 실존에 종속시켰습니다. 실존주의는 실존을 본질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신을 부정하게 되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만약 인간의 창조자를 가정한다면, 그 창조 신을 설명해야만 하고 그렇게 되면 또한 그 신의 창조자를 가정하는 것이 되어 그 신을 창조한 창조자의 창조를 설명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끝없이 따라가다가 결국 창조자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이 먼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그 자신의 본질을 결정해 나간다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창조주도 본질도 들어갈 일체의 여지가 없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 했는데 실존주의자들은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 생각이 가능하다고 하며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I choose, therefore I am.)라는 명제를 사용합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에 의해 확인된 실존 이외의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가 아니고 허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존주의는 기독교 인간관의 심각한 오해이고 또한 왜곡입니다. 이러한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본질을 결정함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결정하는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이 믿음은 실로 무서운 믿음입니다. 이러한 철학은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준거까지도 결정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절대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선택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절대 자유를 가진 인간이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나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절대 자유에는 당위가 요구될 수 없습니다. 당위가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자유가 절대적 자유가 아니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존주의가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더라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 자유와 책임의 이율배반적인 관계에서 결국 인간은 자기가 좋은 것을 선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동성결혼과 남여 성 구별을 철폐하는 현대 사조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창조 질서와 가치를 부인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에게 좋은 것이 선이라고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기 자기에게 좋은 것을 선이라고 믿는 것은 상대주의의 특징이며 이는 걷잡을 수 없는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며 이미 심각할 정도로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조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절대자 하나님과 창조 질서와 보편 가치는 점점 폐기되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이 성숙한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지혜롭다고 믿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어리석음이라고 질타하십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0-2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실존주의(Existentialism)란 인간의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철학으로 19세기의 합리주의적 관념론 또는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 시작하여 분석철학과 함께 현대철학의 주류를 형성하였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이전에 후설(Edund Husserl)은 현상학적 입장을 통해 철학의 관심을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실존주의 생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후설의 그 같은 주장은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의 비극적 체험을 통해 더욱 더 촉진되었습니다. 게다가 과학과 기술문명의 발달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반면에 인간의 주체성을 손상시키는 역현상도 초래하였습니다. 이같은 현상 또한 실존주의 생성을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이처럼 실존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면서 현대문명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항으로 등장한 철학입니다. 그것은 기술문명과 관료주의 그리고 객관주의에 대한 항변이며, 산업사회의 조직화로 인한 인간소외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현대사회는 불특정 다수인으로 형성된 대중사회 즉 익명성의 사회이며, 획일화된 일반법칙을 강요하므로 개체성과 주체성을 말살하는 사회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현대사회 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기를 상실한 비본질적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나'의 새로운 탄생을 갈망하고, '나 자신'의 주체성과 개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 실존주의가 추구하는 핵심 사상입니다. 사실 실존주의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실존이라 함은 말 그대로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고 실존 철학이라 함은 그러한 실존의 모습을 규명하고자 하는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어 적인 의미에서만 보았을 때는 실존주의는 방법론 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의 모습을 신 앞에 존재하는 고독자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니체를 비롯한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낭만주의와 쇼펜하우어의 허무적인 철학에서 그 사상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의 실존이라 함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와는 달리 인간의 모습을 아무 것도 아닌 무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의 모습에서 인간의 길을 찾고자 하는 철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존주의는 그 이전의 철학이 진리와는 동떨어진 모색만을 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랄 수 있으며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데카르트 이후의 신을 잃어버린 시대에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존주의에 대하여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실존주의는 실존 그 외의 것은 그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명제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인데, 실존주의는 인간이 삶을 느끼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종전의 모든 철학적 관념이나 종교의 우매함을 떨치고 실존적 인간과 삶을 이야기 하는 것, 이러한 삶에 대한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방식, 이것이 바로 니체의 생애 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입니다.
플라톤으로부터 헤겔에 이르는 전통철학은 그 관심이 주로 본질에 관한 문제였기에 철학자들은 철학의 주요 임무가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본질을 실존에 종속시켰습니다. 실존주의는 실존을 본질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신을 부정하게 되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만약 인간의 창조자를 가정한다면, 그 창조 신을 설명해야만 하고 그렇게 되면 또한 그 신의 창조자를 가정하는 것이 되어 그 신을 창조한 창조자의 창조를 설명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끝없이 따라가다가 결국 창조자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이 먼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그 자신의 본질을 결정해 나간다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창조주도 본질도 들어갈 일체의 여지가 없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 했는데 실존주의자들은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 생각이 가능하다고 하며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I choose, therefore I am.)라는 명제를 사용합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에 의해 확인된 실존 이외의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가 아니고 허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존주의는 기독교 인간관의 심각한 오해이고 또한 왜곡입니다. 이러한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본질을 결정함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결정하는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이 믿음은 실로 무서운 믿음입니다. 이러한 철학은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준거까지도 결정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절대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선택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절대 자유를 가진 인간이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나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절대 자유에는 당위가 요구될 수 없습니다. 당위가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자유가 절대적 자유가 아니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존주의가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더라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 자유와 책임의 이율배반적인 관계에서 결국 인간은 자기가 좋은 것을 선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동성결혼과 남여 성 구별을 철폐하는 현대 사조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창조 질서와 가치를 부인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에게 좋은 것이 선이라고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기 자기에게 좋은 것을 선이라고 믿는 것은 상대주의의 특징이며 이는 걷잡을 수 없는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며 이미 심각할 정도로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조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절대자 하나님과 창조 질서와 보편 가치는 점점 폐기되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이 성숙한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지혜롭다고 믿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어리석음이라고 질타하십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0-2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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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ㅂㄷㄱ님의 댓글
ㅂㄷㄱ
황상하 목사님, 요즘 우크라이나 정세는 어떤가요? 한때 우크라이나에서 나오는 뉴스들이 다 잘못되었고 러시아는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거짓뉴스"?에 현혹된 사람들을 안타까워 하시더니 요즘은 잠잠하시네요. 그 때 러시아 편에서 거짓뉴스를 퍼뜨리던 서울대 출신의 악질 보수 유튜버가 기소된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잠잠하신 것 같은데 맞나요? 주장하시는 거의 출처를 밝히신 적이 없어서 이렇게 추측할 수 밖에 없네요.
요즘은 목사님의 글을 안읽어서 비판할 내용이 없네요. 목사님 글은 너무 길어서 읽기엔 시간이 아까와요. 좀 짧게 쓰시면 다음에 읽고 비판해 드릴께요. 건강하세요 목사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