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메신저 세례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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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8-12-1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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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신약 시대 기독교인들에게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림의 메시야를 기다렸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재림의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초림의 메시야와 재림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딱히 구별되지 않고 겹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초림의 메시야만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초림 메시야에 대해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야 예언은 초림과 재림을 마치 한 사건인 것처럼 예언하고 있습니다. 초림 메시야 예언과 재림 메시야 예언의 내용이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뒤섞여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던 시대적 배경은 유다의 멸망이라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망하였습니다. 그 당시 바벨론은 근동의 신흥 제국이었습니다. 유다는 그 바벨론과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약소국 유다가 대제국 바벨론과 맞장 뜰 수는 없었지만 앉아서 당할 수만 없어서 다투며 저항하였습니다. 그 저항이 그저 무모한 저항은 아니었습니다. 애굽을 믿고 바벨론에 저항을 한 것입니다. 기원전 588년에 바벨론이 저항하는 유다를 공략하였습니다. 바벨론은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그 때 유다는 애굽에 구조를 요청하면서 1년 동안 버텼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국제적인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애굽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유다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애굽에게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약소국은 견제하는 강대국 사이에서 더 강한 나라 편에 서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데 유다는 어리석게도 그 선택에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기원전 587년 7월에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전쟁에 패하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땅과 거기서 나는 생산물과 문화적 유산은 물론 모든 재산과 사람까지 승자의 소유가 되고 맙니다. 그 모든 것을 부수고 죽여 버리든지 보존하고 살려서 재물은 취하고 사람은 노예로 부리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승자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바벨론은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기물들 중에 값나가는 것이나 쓸 만한 것은 다 가져갔습니다. 사람도 왕족이나 귀족은 포로로 잡아가고 무지렁이 서민들만 남겨 두고 식민통치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식민정책으로 이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자기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나라와 민족들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맞게 되면 가장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다른 것은 받아들이고 포기하고 살 수 있지만 신앙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저주하라든지 우상을 섬기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수십 년 전부터 유다의 운명이 이렇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그는 줄곧 백성을 깨우치려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조국 유다가 처참하게 멸망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눈앞에 다가온 조국의 운명을 생각하며 백성들을 깨우치다가 다른 선지자들과 다투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생활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같은 그의 주장에 가장 심하게 반대한 선지자가가 바로 하나냐 입니다.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치시고 유다를 다시 일으키신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백성들의 여론은 모두 하나냐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처참한 바벨론 포로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유다 인들은 절망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깊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유다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그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이 왜 이방민족에게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잠시 이런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 자기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곧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리라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암담한 미래를 생각하며 깊은 절망감에 빠졌던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었지만 사실 응답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살 수 있는 길을 여러 차례 제시하시고 권고하시고 책망하시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잠시 회개하였다가 곧 다시 불순종의 길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불순종 가운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적하신 것은 동족을 노비와 종으로 삼는 행위였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유다의 구원을 정의와 공의의 실현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이 정의와 공의 구현의 모습으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면 유다가 구원을 받는다고 본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런 전망은 망상처럼 보이지만 예레미야는 조국 유다가 불의한 세력에 의해서 억압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사견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의한 세력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근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대제국이었고, 유다는 여러 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겨우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약소국입니다. 초강대국 바벨론이 약소국 유다에 대해 공의와 정의로 대할 리가 없습니다. 국가 간의 관계에는 힘이 정의입니다. 그러한 국제 관계에서 정의나 공의를 판단의 잣대로 삼는 것은 현실감이 없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힘이 정의이고 공의라는 사실은 국제 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벌하시지만 바벨론은 메시야와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는 불의한 세상 권력의 상징입니다. 바벨론만 불의한 것이 아니고 세상 나라는 모두 불의합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도 불의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조직과 집단과 제도와 이념과 사상 안에는, 명분은 인권과 자유와 정의이지만 실제는 힘이 정의로 작동합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 나라는 바벨론처럼 하나님 나라와 대조되는 불의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것만이 진정한 희망이고 소망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전할 메시지는 그 날이고 메시야이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다른 것은 진정한 복음이 아닙니다. 임시적인 것이고 가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것은 그 날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유다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정의와 공의 실현이라는 모습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같이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이 여전히 불의를 행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시고 메시야도 공의와 정의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실 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실 메시야를 대망하는 신앙은 너무도 당연하게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고 정의와 공의 편에 서야 합니다.
성탄절, 대림절과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현대인들에게 낯설고 이질적인 것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풀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까지 요한에게 나아갔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마3:7)이라고 질타했습니다. 그 당시 나름대로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요한에게 찾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도록 보냄을 받은 인물이고 그가 외친 회개의 메시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야를 맞이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았던 것은 요한의 메시지가 구약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군인들도 요한에게 나아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그 대열에 참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려하시자 요한은 매우 당황스러워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 대림절을 최대한 즐기려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카드에는 온갖 좋은 축복의 말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만약 모두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들떠 있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누군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라고 한다면, 성탄절 설교에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한다면 용납하기 힘든 이질감을 느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대림절에 가장 중요한 메신저이고 그의 메시지는 대림신앙에 가장 적합한 메시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 역시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은데 세례요한이라는 인물을 나의 성탄절, 대림절 무대에서 물러 나 있게 할 성경적 근거를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정의와 공의의 실현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러 오실 메시야를 불의와 불법을 행하면서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7-10)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예레미야 선지자가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던 시대적 배경은 유다의 멸망이라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망하였습니다. 그 당시 바벨론은 근동의 신흥 제국이었습니다. 유다는 그 바벨론과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약소국 유다가 대제국 바벨론과 맞장 뜰 수는 없었지만 앉아서 당할 수만 없어서 다투며 저항하였습니다. 그 저항이 그저 무모한 저항은 아니었습니다. 애굽을 믿고 바벨론에 저항을 한 것입니다. 기원전 588년에 바벨론이 저항하는 유다를 공략하였습니다. 바벨론은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그 때 유다는 애굽에 구조를 요청하면서 1년 동안 버텼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국제적인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애굽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유다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애굽에게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약소국은 견제하는 강대국 사이에서 더 강한 나라 편에 서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데 유다는 어리석게도 그 선택에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기원전 587년 7월에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전쟁에 패하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땅과 거기서 나는 생산물과 문화적 유산은 물론 모든 재산과 사람까지 승자의 소유가 되고 맙니다. 그 모든 것을 부수고 죽여 버리든지 보존하고 살려서 재물은 취하고 사람은 노예로 부리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승자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바벨론은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기물들 중에 값나가는 것이나 쓸 만한 것은 다 가져갔습니다. 사람도 왕족이나 귀족은 포로로 잡아가고 무지렁이 서민들만 남겨 두고 식민통치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식민정책으로 이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자기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나라와 민족들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맞게 되면 가장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다른 것은 받아들이고 포기하고 살 수 있지만 신앙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저주하라든지 우상을 섬기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수십 년 전부터 유다의 운명이 이렇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그는 줄곧 백성을 깨우치려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조국 유다가 처참하게 멸망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눈앞에 다가온 조국의 운명을 생각하며 백성들을 깨우치다가 다른 선지자들과 다투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생활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같은 그의 주장에 가장 심하게 반대한 선지자가가 바로 하나냐 입니다.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치시고 유다를 다시 일으키신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백성들의 여론은 모두 하나냐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처참한 바벨론 포로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유다 인들은 절망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깊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유다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그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이 왜 이방민족에게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잠시 이런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 자기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곧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리라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암담한 미래를 생각하며 깊은 절망감에 빠졌던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었지만 사실 응답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살 수 있는 길을 여러 차례 제시하시고 권고하시고 책망하시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잠시 회개하였다가 곧 다시 불순종의 길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불순종 가운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적하신 것은 동족을 노비와 종으로 삼는 행위였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유다의 구원을 정의와 공의의 실현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이 정의와 공의 구현의 모습으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면 유다가 구원을 받는다고 본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런 전망은 망상처럼 보이지만 예레미야는 조국 유다가 불의한 세력에 의해서 억압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사견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의한 세력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근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대제국이었고, 유다는 여러 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겨우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약소국입니다. 초강대국 바벨론이 약소국 유다에 대해 공의와 정의로 대할 리가 없습니다. 국가 간의 관계에는 힘이 정의입니다. 그러한 국제 관계에서 정의나 공의를 판단의 잣대로 삼는 것은 현실감이 없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힘이 정의이고 공의라는 사실은 국제 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벌하시지만 바벨론은 메시야와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는 불의한 세상 권력의 상징입니다. 바벨론만 불의한 것이 아니고 세상 나라는 모두 불의합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도 불의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조직과 집단과 제도와 이념과 사상 안에는, 명분은 인권과 자유와 정의이지만 실제는 힘이 정의로 작동합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 나라는 바벨론처럼 하나님 나라와 대조되는 불의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것만이 진정한 희망이고 소망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전할 메시지는 그 날이고 메시야이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다른 것은 진정한 복음이 아닙니다. 임시적인 것이고 가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것은 그 날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유다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정의와 공의 실현이라는 모습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같이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이 여전히 불의를 행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시고 메시야도 공의와 정의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실 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실 메시야를 대망하는 신앙은 너무도 당연하게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고 정의와 공의 편에 서야 합니다.
성탄절, 대림절과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현대인들에게 낯설고 이질적인 것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풀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까지 요한에게 나아갔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마3:7)이라고 질타했습니다. 그 당시 나름대로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요한에게 찾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도록 보냄을 받은 인물이고 그가 외친 회개의 메시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야를 맞이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았던 것은 요한의 메시지가 구약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군인들도 요한에게 나아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그 대열에 참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려하시자 요한은 매우 당황스러워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 대림절을 최대한 즐기려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카드에는 온갖 좋은 축복의 말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만약 모두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들떠 있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누군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라고 한다면, 성탄절 설교에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한다면 용납하기 힘든 이질감을 느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대림절에 가장 중요한 메신저이고 그의 메시지는 대림신앙에 가장 적합한 메시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 역시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은데 세례요한이라는 인물을 나의 성탄절, 대림절 무대에서 물러 나 있게 할 성경적 근거를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정의와 공의의 실현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러 오실 메시야를 불의와 불법을 행하면서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7-10)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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