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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왜곡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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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8-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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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행여 사랑을 왜곡하거나, 예찬한다면서 폄하할 것만 같은 불안함 같은 것을 느낍니다. 이 세상에 사랑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사상이나 철학이나 이념이나 정신은 없습니다. 내가 사랑을 높이고 강조한다고 해서 사랑이 좀 더 위대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에 대해 잘 못 설명을 하면 사랑의 위대함을 드러내기보다 사랑의 가치를 손상시킬 위험이 있음을 압니다. 나 자신이 사랑을 강조하면서 사랑을 왜곡하고 오해하고 그 진가를 손상시켰던 경우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는 마치 성경을 강조하면서 성경을 왜곡하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나 글을 통해 강조했던 성경과 사랑이 지나고 보면 장님의 코끼리 인식처럼 오해였고 왜곡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입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오해와 왜곡을 혼자만 깨달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으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오만한 허세에 도취되어 있는 자신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비단 성경이나 사랑에만 국한 된 문제는 아닐 것이고 또한 나 자신만의 문제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지나치게 낙심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을 비롯하여 온 세상이 온통 거짓과 오해와 왜곡으로 혼란스러워 잘못을 지적하고 진리를 옹호하는 것조차 잘못된 정보에 의한 것이 될까 두렵지만,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한 심정으로 거짓을 배척하고 진리를 위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예찬”이라는 말은 요한일서 4:7-13절에 붙인 제목입니다. 이 내용은 사랑에 대한 금과옥조(金科玉條)입니다. 사랑에 대한 가치를 이만큼 제대로 드러내고 규명하는 성경도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요한일서 4:7-13절에 “사랑예찬”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사랑에 대한 성경은 고린도전서 13장이 가장 유명합니다. 고전 13장과 요한서신은 같은 사랑에 대한 말씀이지만 강조점이 좀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현상이나 특징이나 혹은 성격 같은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랑의 근거와 동기가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사랑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인가를 이야기 합니다.

남녀가 이성적으로 나누는 사랑도 그 깊이와 오묘함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눈을 떠도 보고 싶고 눈을 감아도 보고 싶고 아무리 보아도 또 보고 싶고 하루 종일 보아도 성이 안 차는 사랑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신비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진실 된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얼굴과 눈의 근육이 완전히 이완된 부드럽고 착한 표정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사랑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그런 사랑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여 기대하지도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받아보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늘 받고 있지만 아직 철이 들지 않아서 자기가 받고 있는 것이 사랑인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어린아이라고 부릅니다. 어린아이가 이 사랑을 알기 전에는 부모를 모릅니다. 부모를 안다는 것은 이 사랑을 안다는 것입니다. 왜 부모가 그런 것은 하지 마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공부해라, 거짓말 하지 마라, 돈을 아껴 쓰라, 전기 불을 끄라, 수돗물을 아껴 쓰라, 뭐든지 미리미리 좀 준비해라! 이 모든 잔소리가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인 줄 어린아이는 모릅니다. 그래서 김소월 씨가 그랬습니다.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누군가 작은 사랑은 눈에 잘 띄지만 큰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랑인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큰 사랑에 속합니다. 그래서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애인끼리 하는 사랑이나 친구끼리 하는 사랑은 작은 사랑이기 때문에 눈에 잘 띕니다.

요한은 사랑을 알면 하나님을 알고 사랑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눈물 글썽이는 감상적인 사랑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신론자처럼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제대로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을 제대로 모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지만 철없는 어리아이가 부모를 제대로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온갖 철없는 짓들을 다 하게 됩니다.

사랑을 알면 하나님을 알고 사랑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사랑이 곧 시금석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믿음의 바른 길에서 벗어난 이단이나 적그리스도를 사랑으로 구별한다고 하였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바른 믿음과 이단은 말씀이나 교리나 신학으로 구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식은 나름의 정당성과 유용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과 이단을 교리나 신학으로만 구별할 수 있다면 일반 교인들은 잘못된 가르침이나 이단을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요한의 바른 믿음과 그릇된 믿음을 사랑에 의해서 구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진리와 비 진리, 참 복음과 잘못된 복음, 이단과 정통,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는 모두 사랑에 의해서 구별됩니다. 왜냐하면 비 진리와 그릇 된 복음과 이단과 적그리스도의 특징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릇 된 가르침은 아무리 논리적이고 심오하고 신령한 것처럼 보여도 이기적입니다. 기적을 행하고 표적을 보이고 많은 선행을 실천하고 설득력이 있어도 이기적인 특징은 숨길 수 없습니다. 순교자처럼 행세해도 이기적인 사람의 이기심은 마치 낭중지추(囊中之錐)와 같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가 마치 진리 편인 것처럼 결연한 태도로 죽기를 불사하고 옳은 것을 주장하는 사람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편에 선 사람은 어느 선까지만 주장하고 그 이상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차라리 손해 보는 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 동기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으로 서로 물고 먹는 자들을 향해 바울은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고 권합니다. 자기가 옳다는 것을 관철시키고 사랑을 놓치게 된다면 차라리 지는 편을 택하라는 교훈입니다.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교회가 이단도 아니고 적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여도 바른 믿음의 길에서 벗어날 위험은 언제나 있습니다. 목사가 교인을, 또는 교인이 목사를 사회법에 고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예배 중에 경찰이 교회에 들어가서 지키고 교인을 체포해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인들이 서로에게서 테러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눈만 마주치면 험악한 욕설과 저주와 악담을 내 뱉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진리 편이라고 믿으며 진리를 위한다고 하겠지만 그런 열정과 싸움이 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되고 사랑의 목적을 지향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분쟁의 골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지고 속는 편을 택하는 것이 낫습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소유와 획득을 지향하기 때문에 집착하고, 아가페는 희생을 통한 생명을 지향하기 때문에 지고 포기하고 오래 참고 견디는 쪽을 택합니다.

성경은 교회 뿐 아니라 결혼한 부부에게도 아가페의 사랑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아예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가페의 사랑을 강조할 때 흔히 놓치기 쉬운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로스와 필레오가 무시되는 것입니다. 본래 에로스가 이성간의 사랑만을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의 아가페 사랑 때문에 그렇게 취급되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에로스를 이성간의 사랑으로, 필레오는 우정이라고 정의합니다. 에로스나 필레오는 아가페에 비하면 수준이 낮습니다. 아가페가 이타적인데 반해 에로스와 필레오는 이기적입니다. 그렇다고 에로스나 필레오가 아가페에 역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가페는 에로스와 필레오 같은 것을 다 포괄합니다. 이기적인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게 이기적인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입니다. 아가페는 이기적인 것까지 다 포괄하기 때문에 아가페입니다. 이것이 논리적으로는 비약일지 모르나 사실이고 진리입니다.

아가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에로스나 필레오의 소중함도 알아야 합니다. 아가페 안에는 그 모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잘 가르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독일의 루터파 신학자 앤더스 니그렌(Anders Nygren)입니다. 그가 쓴 『아가페와 에로스』에 의하면, 아가페를 단순히 고차원의 사랑, 그리고 에로스를 저속한 사랑으로 양분하여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아가페가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이라면, 에로스는 그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천상적 사랑입니다. 때로는 에로스를 포기해야 아가페를 실천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가페의 사랑은 에로스나 필레오를 통해 실현되는 것입니다. 에로스나 필레오가 아가페를 지향한다면 그 또한 아가페인 것입니다. 문제는 에로스나 필레오가 그 자체로 목적을 삼을 때 왜곡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가페의 사랑을 나타낸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지식이 뛰어나고 생각이 깊고 논리가 분명하고 진정성이 있어도 그의 삶에 사랑이 나타나지 않으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의 사랑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복음의 진수를 가장 훌륭하게 잘 드러낸 말입니다.

하나님 계시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이고 계시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사랑으로 하나님을 증거 합니다. 그 사랑으로 진리와 비 진리를 분별하고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를 분별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랑의 구체적 실현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천상적인 것이지만 이 세상에 다리를 굳게 내리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주후 33년 4월의 어느 날 만찬석상에서, 본디오 빌라도의 영내에서, 골고다의 로마군 십자가 위에서 역사적 사건들로 실현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안에서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와 하나님을 하나 되게 하였습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였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심은 나를 통해 당신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은 나의 어떤 능력이나 지식이나 경험을 통해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을 통해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실현되고 성취되게 하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 분도 성령님이시고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신 분도 성령님이시고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실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나를 통해 하시려는 모든 일은 이 사랑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1-1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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