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가난한 자 구제하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반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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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9-02-1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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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후 20여 년 어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가난한 자, 묶인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라고 특징짓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들어 줄 것이라는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으며 이사야의 그 메시지가 당신에게서 성취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얼마 후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20).라는 질문에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를 복음의 일차적 선포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가난과 억압과 질병은 포로에서 돌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상황이 아니라 복음이 필요한 인간의 보편적 실존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성경은 인간 불행의 상황을 한 마디로 ‘가난’이라고 전제합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경제적 가난뿐만이 아니라 심령의 가난, 즉 영적 가난을 천국의 복과 대비하셨습니다. 영적 가난이 개인의 문제라면 경제적 가난은 개인 뿐 아니라 집단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가난한 자를 복음 선포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난의 문제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에게 복음이 필요함은 죄를 지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은 인간이 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이고, 죄의 지배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인데, 그 구체적 현상의 대표적인 것이 가난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난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가난이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다는 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가난의 문제를 기복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현대교회의 복음에 대한 오해를 가장 쉽게 지적할 수 있는 경우입니다.
먼저, 가난의 원인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난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게을러서 가난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한 낭비, 사업 실패, 장애, 자연재해, 전쟁 등의 원으로 가난하게 되기도 합니다. 게으름이나 낭비로 인한 가난은 동정을 받을 수 없지만 그 외의 불가항력적 원인으로 가난하게 된 경우는 모두가 동정을 해야 하고 또한 도와주어야 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는 교훈을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측은지심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뜻을 따라 생활해야 합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특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모든 하나님 나라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심을 쏟는 그 일에 특별한 관심을 집중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에 대해 그렇게 특별한 관심을 쏟으시는 것은 가난이 당신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당신의 형상을 파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원인에 상관없이 어떤 가난이라도 인간성에 치명적으로 해를 끼칩니다. 조선 시대에나 그 이후까지도 신성한 혼인이 가난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이 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몹시도 가난했던 시절에 입 하나 덜기 위해 딸을 일찍 시집보냈다는 이야기를 우리세대는 부모님 세대에게 수 없이 많이 들었습니다. 아들 없는 부잣집에 아들을 양자로 보내는 것도 가난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린 딸을 부잣집 후처로 보내는 경우도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노예까지는 아니더라도 종이나 다름없는 머슴살이도 가난 때문에 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노동자의 권리에 비기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던 조선 시대의 노비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이나 인권상황은 가난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서 근대 국가로 넘어 온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머슴, 식모, 공장노동자 등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인권 유린은 근대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장애물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춘 또한 가난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매춘이 없었던 때나 사회는 없었지만 그것이 가난과 관련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요즘 한일 관계의 위안부 문제와도 관련이 있지만, 그것이 조선 시대의 노비나 관비 제도와 가난 때문에 딸을 팔아야 했던 수많은 조선의 가난한 부모들의 아픈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가난은 자유와 인권과 신념과 정조와 심지어 신앙까지도 포기하게 하는 무서운 악입니다.
가난의 문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대처해야 하지만 인간이 완전하게 해결 할 수 없는 딜레마입니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도 이 땅에서 가난한 자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속담도 가난 문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짐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고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노력으로 가난의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의 해”즉 희년을 제정하시고 이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으로 정하게 하시고 희년이 되면 가난 때문에 종이나 노예가 되었거나 집이나 땅을 팔았거나 돈을 빌리고 갚지 못했거나 그 어떤 부채라도 다 탕감되고 모든 것은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희년을 “은혜의 해”라고 하신 것입니다. 희년 제도는 가난의 문제가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무리 잘 해도 50년이 되면 인간 세상은 장기판을 둘러엎고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심각한 딜레마의 문제들로 총체적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가난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해결하시겠지만 50년이 되기 전에도 하나님의 관심을 따라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가난한 자를 돌아보면서 동시에 가난하게 되는 원인을 잘 파악하여 예방해야 합니다.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가난을 극복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성경은 일하지 않는 것, 일하기 싫어하는 것을 정죄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노동의 신성함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그 결과 성실한 노동에 의해 부가 창출되었고, 또한 낭비를 죄악시했기 때문에 창출된 부가 축척되었습니다. 그 축척된 부를 재투자하는 방법으로 산업을 발전시켰는데,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자본주의가 발생하고 성장하였다고 보았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그 자체로 칼 막스의 이론을 부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정신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해명은 가난 문제를 인간이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성경적 전제에서 자본주의를 가난 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으로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자본주의가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고 계속하여 발전하고 개혁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다. 자본주의 역시 불완전하기 때문에 많은 부작용과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는 실현하였습니다. 자본주의로 인하여 가난의 문제가 상당할 정도로 극복되었습니다. 자본주의를 채택한 나라는 거의 부하게 되었고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난하게 되는 또 다른 심각한 원인 하나를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가난하게 될 이유가 없는데 결과적으로 가난하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하는 이념과 제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칼 막스의 공산주의 이론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를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를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구분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분할 때,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사회주의로 이해하고,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진정한 공산주의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핵심적인 차이는, 사회의주는 국가가 생산수단만 통제하는 것이고, 공산주의는 국가가 생산수단뿐만 아니라 분배까지 통제하는 것입니다. 칼 막스 이론을 추종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론들의 학문적이고 논리적인 주장들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는 결과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한 마디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가난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상대적 빈곤은 자본주의 아래서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갈 수 있지만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절대적 빈곤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 이념과 제도를 포기하기 전에는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많은 진보주의 학자들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성공하지 못한 것이 자본주의와 서구사상, 즉 기독교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는 거의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대안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북구의 몇몇 나라가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을 수용하면서도 나름 성공한 것은 인구가 적고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구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나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가난은 단순한 경제적 궁핍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억압, 갇힘, 장애, 질병 등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존엄성이 가난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악 때문에 파괴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도 매춘이 있지만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 국민들의 매춘은 그 동기와 차원이 다릅니다. 러시아, 중국, 북한, 베네수엘라, 그리고 지금은 아니지만 과거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했다가 그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많은 나라에서는 가난 때문에 매춘을 하게 되는 여자들이 많고 외국에까지 나가서 매춘을 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도 인권 문제가 있지만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의 인권 상황은 자본주의 사회의 인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고 열악합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역사적 임상실험을 통해 가난을 만들고 그 가난은 곧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파괴하고 있다는 증거들이 차고 넘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를 구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의 원인을 제거하고 예방하는 일도 해야 합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것도 가난을 예방하는 일입니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사회주의를 강조했는데 트럼프는 신년사에서 사회주의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은 소극적인 일이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일을 가난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일입니다. 바울 사도는 게을러서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는데,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인간을 게을러지고 일하기 싫어하게 만듭니다. 복잡한 이론이 필요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게 만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반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적극적인 태도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가난한 자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여 가난한 자를 돕고 사람을 일하기 싫어하게 만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반대해야 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 19)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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