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만 바꾼다고 일제 청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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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ㆍ2019-02-1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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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란 말이 언제부터인가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내가 미국 이민 오기 전만해도 모두 국민학교인줄만 알았는데 지금은 ‘국민학교’라고 타이핑을 하면 컴퓨터가 알아서 저절로 초등학교로 바꿔준다. 국민학교는 1995년 일제 잔재 청산차원에서 초등학교란 말로 바꿨다고 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것저것 청산거리를 찾는 중에 이번엔 유치원 차례라고 한다. 유치원도 ‘유아학교’로 변경해야 맞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는데 나는 그 말이 우리말인줄 만 알았다. 그런데 아닌가 보다. ''유치원''이란 이름은 1897년 일본인을 위해 만든 부산유치원에서 비롯되었고 그래서 이 명칭은 일제잔재 용어이므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아학교’로 바꾸자는 여론이 일고 있는 모양이다.
청산해야할 일제 잔재가 있다면 진작 했어야지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이 늦은 시간에 뜬금없이 청산 타령을 하고 있나 해서 조금은 의아스럽다.
우리말에 들어온 일본어. . 이게 모두 일본제국주의 잔재이니 몰아내겠다고 해서 고분고분 사라지겠는가? 전기다마에서 다마는 일본말이다. 공이나 알이란 뜻이다. 겐세이도 일본말이다. 견제란 뜻이다. 시다(아래), 와꾸(틀), 고데(인두), 소데(소매), 노가다(막벌이), 노깡(토관) 이게 다 일본에서 온 말들이다.
서양외래어가 일본에 들어가 일본식 발음으로 굳어진 것이 우리말로 들어온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빠데리, 카텐, 타이루, 바께쓰, 샤쓰, 세타, 도란스 등등이다.
우리가 식당에 가면 자연스럽게 요구하는 다대기. . 물론 일본말이다. 일본어로 다진 고기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건만 우리는 너무 편하게 이 말에 익숙해 있다. 우동, 오뎅, 뎀뿌라도 일본 말이다. 오뎅은 가락국수란 말로 바꿔 볼 수는 있다. 그럼 오뎅은 뭐라해야 할까? 오뎅은 일본에서 온 말이지만 일본엔 실제로 오뎅이란 음식이 없다고 들었다. 완전히 한국화된 음식이 되었다. 그럼 일제 청산차원에서 오뎅이란 말을 다른 말로 바꾸는게 어렵다면 오뎅이란 음식을 아예 대한민국에서 추방시키면 잔재청산이 될까?
언론계 기자들이 쓰는 말에도 일제 청산대상은 수도 없이 많다. 사쓰마리는 사회부 경찰기자를 뜻한다. 출입처는 나와바리, 미다시는 제목, 다른 언론사의 기사를 손질해서 쓴다는 의미의 우라카이 등은 관행적으로 쓰이는 일본어다. 핵심 주제란 뜻의 야마는 또 어찌나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는지. . .
그뿐인가? 모찌(찹쌀떡), 분빠이(분배), 시다(조수), 아나고(붕장어), 유도리(융통성), 입빠이(가득), 찌라시(선전지), 후까시(부풀이), 빵꾸(구멍), 사라다(샐러드). . . 우리 생활 속에 깊게 뿌리 내린 이런 언어들을 도려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일본제국주의를 두둔하고 한일합병을 합리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런 말들은 이미 우리들이 쓰는 말로 생활화되었으니 변형된 우리 문화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자는 말이다.
일제차 캠리를 보고 ‘하나님이 내려주신 차’라고 찬사를 쏟아내는 어느 집사님을 보았다. 우리는 보통 자동차의 실용성과 가격을 보고 승용차를 고르지 이 차는 쪽발이들(일본 사람들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 만든 Made in Japan 이니까 타서는 안 될 차라고 일제차 거부운동이라도 벌여야 애국하는 길인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사랑하는 조국을 등지고 등 따시게 살겠다고 미국으로 이민 온 동포들은 모두 매국노로 매도해도 된다는 말과 비슷해진다.
일본 제국주의, 결코 잊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나 더 나은 세상, 우리 후세들이 만들어 갈 더 넓고 아름다운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 용서와 포용의 문을 걸어 잠그면 안된다. 더 큰 것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엔 태어나지도 않았기에 일제의 만행을 실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나에게도 있다. 그러나 지난해 우리 가족들이 함께 본 넷플릭스 오리지날 TV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보면서 침략자 일본, 나약한 조선에 얼마나 분노를 느꼈는지 모른다.
일제 청산의 길은 대한민국 역사에 더 이상은 어떤 외세의 침략이라도 절대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벼르고 벼르면서 나라를 강성대국으로 만들어가는 길이다. 어떻게 해서 쟁취한 대한민국 독립이요 어떻게 해서 얻은 자유민주주의인가? 그런데 그걸 팔아먹을 것 같이 대한민국을 위기로 몰고 가는 작금의 정치적 혼돈 속에 자꾸 조선말기 매국노들의 얼굴이 떠올려지는 게 아닌가?
이미 우리 문화요 언어의 한 부분으로 엄연하게 자리잡은 유치원과 같은 말을 놓고 일본의 잔재라고 파내고 들쑤시는 걸 무슨 애국애족인양 떠드는 일에 마음 쓸 때가 아니다. 조선말기 강대국들 틈에 끼어 결국 나라와 겨레를 지켜주지 못했던 허약하고 무능했던 권력을 거울삼아 이제는 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길, 그 길만이 아직도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를 완전 청산해가는 길이 될 것이다.
조명환 목사(발행인)
ⓒ 크리스천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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