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세상적인 복을 구하는 것은 잘못인가요?
페이지 정보
홍삼열ㆍ2019-03-29관련링크
본문
한편, 어떤 사람들은 한국 기독교는 한국 특유의 샤머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기복주의(祈福主義)를 추구했는데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현재 부정적 열매를 거두고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생활이 어렵고 이성적 사고가 덜 발달된 상태에서는 샤머니즘에 기초한 기복주의가 사람들에게 큰 매력이 있지만, 현재와 같이 생활이 편해지고 시민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질 때는 더 이상 기복주의가 힘을 쓰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더 나아가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은 기복주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진실한 기독교인, 성서적 기독교인은 세속의 복을 추구하지 않고 언제나 영적인 복을 추구하며, 심지어는 반(反)세속적인 하늘의 복만을 추구하고 주님을 위한 고난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세속의 복을 지향하는 샤머니즘적 기독교를 믿어 왔기 때문에 당연히 침체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위의 분석들이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기독교의 샤머니즘적 특성을 지적한 분석이 한국 기독교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지역의 기독교에 비해서 왜 한국의 기독교가 그렇게 급성장하고 급쇠락하는 현상을 보이는지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기복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세속적인 복을 구하면 안 되는 것일까? 신앙이 올바른 사람은 하나님께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복, 예를 들어 자녀의 복, 재산의 복, 장수의 복과 같은 세속적인 복을 구하면 안 되는 것일까?
성경을 읽어 보면 성숙한 신앙의 사람도 세속적인 복을 구하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소원대로 응답하시는 예들을 많이 발견한다.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2)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영적인 복뿐일까? 큰 민족이 되는 것, 그의 이름이 창대하게 되는 것이 육적인 복과는 상관이 없을까? 그렇지 않다. 그에게 약속된 복은 당연히 육적인 복, 특히 자녀의 복과 재산의 복을 포함한다. 신명기 28장에도 보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에게 약속된 복이 나열되어 나오는데 당연이 이 목록에는 세속적인 복이 포함된다.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28:4-5)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28:7)
그러면 신약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신약성경은 우리가 영적인 복을 위해서만 기도하라고 가르치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응답의 내용이 육적인 것 곧 음식에 관한 것이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9-11)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기도할 때 그것만 구하면 곤란하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해 기도하고, 그다음에 먹을 것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이 맞다.
신앙이 올바른 사람은 하나님께 영적인 복만 구해야지 세속적인 복은 구하면 안된다는 주장은 성서적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은 세속적인 복 자체를 정죄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목적에서 벗어난 복의 추구를 정죄할 뿐이다. 많은 사람이 “기복신앙”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기독교인으로서 재산, 건강,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면 떳떳하지 못하게 혹은 송구스럽게 기도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복 받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적으로도 복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 자녀가 영적으로만 복을 받고 세상적으로는 힘들고 어렵게 살기를 원하겠는가? 그런 아버지는 없다. 자녀가 잘못 사는 것이 아니라면 이왕이면 세상적으로도 복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더욱 그러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잘 되고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보면, 기도문의 전반부는 하나님에 관한 기도, 후반부는 우리의 요구에 관한 기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구분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전반부는 신령한 기도이고 후반부는 세속적인 기도라고 규정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포함한 여러 일상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도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해서 구하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복을 위해 구하는 기도도 목적이 올바르면 신령한 기도 즉 영적인 기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전서 10:31절은 이렇게 권면하는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 세상적인 복을 구하는 것은 잘못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물질을 위해서, 자식 성공을 위해서 당연히 기도해야 한다. 단 이것이 나쁜 종류의 기복신앙이 되지 않기 위해 그 목적이 올바라야 한다.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
홍삼열(산타클라라연합감리교회 목사)
ⓒ 크리스천위클리
댓글목록
황서경님의 댓글
황서경너무 좋은 해석 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 우리가 사업을 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하루에도 여러번 고민하게 되는 문제 입니다. 알고 보면 예수님 제자 가운데 가난한 자는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방문하신 다음에 (아마도 삭개오 집에서 하신 것 같은데..) 하신 복음이 물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삭개오는 물질의 대명사로 여기면 되는데 물질에 대하여 말씀을 꺼내신 것은 어덯게 보면 삭개오의 물질을 허락 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아닌가요 ?
나그네님의 댓글
나그네
물질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인식은 영적인 것과 연결된 것으로서의 물질로 귀결돼야 마땅합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창조는 이 세상의 물질창조였습니다. 하지만 그 창조의 모습을 보고, 물질을 허락하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틀리기도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단지 지구와 우주적인 것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나라에 관한 것을 포함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설명을 이해하고 믿고 그것을 바라보고 사는 존재이겠지요.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모습이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투영되어 나타납니다. 물질세계는 심판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만 남습니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떡 일용한 양식을 하루 먹을 양식(식량) 밥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것을 빗대어 부의 축적을 하지 말고 하루먹을만큼만 소유해야 한다는 식의 해석을 하면, 현재 모든 삶과 대치됩니다. 아니 무수한 교회들 역시 한달 이상의 렌트비용과 유지비용을 갖고 있습니다. 설명도 되지 않고, 적용도 되지 않는 부분이지요. 따라서 일용할 양식=떡은 겉으로 보면, 창조세계에서도 하루하루 먹으며 존재가 이어지는 것 처럼 하늘나라의 존재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은혜 를 하루하루 경험하며 살아야 한다는 해석이지요. 그것이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양식, 그 뜻은 2000년전 골고다에서 성취됐습니다. 예수님이 그 은혜요 그 떡이니까요.
따라서 이 세상에 속한 물질로서의 떡만을 의존하는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서 반드시 악인이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떡이 없어 의지할 것이라곤 절대자 하나님뿐이라면 그는 의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많은 떡을 소유하지 않는데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무관합니다. 많은 떡을 소유하세요. 단지 그 소유하는 많은 떡을 의지하느냐, 많은 떡을 갖고 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경우, 우리를 대표하시고 대신하여 모든 것을 잃으셨습니다. 생명까지 잃습니다. 그가 끝에 보여준 모습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존적 태도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못삽니다. 악인이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일을 다 하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를 껴안고, 자신이 하신 놀라운 일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구속이며 은혜입니다.
삭개오는 물질에 절대 의존적 존재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물질을 놓습니다. 예수님 의존적 존재로 변하는 예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십자가 후에 일어날 일을 예시적으로 삭개오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성령님께서 강권하여 우리를 하나님의존적 존재로 만드십니다. 이것이 새 피조물이요 새 창조겠지요.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씀의 진짜 뜻, 그렇습니다. 부모를 의존하며 사는 어린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만이 천국백성이 된다는 설명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