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배반에 대한 인식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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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9-05-1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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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계 프랑스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는 탈무드에 나오는 “용서”에 대한 주석에서 “우리는 많은 독일인들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하기가 어려운 몇몇 독일인들이 있다. 하이데거를 용서하기는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레비나스는 1906년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에서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1923년 17세의 나이로 프랑스로 건너가 쉬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28-29년에는 독일의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에게서 배웠습니다.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그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사상을 프랑스에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의 철학자로서의 활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되었는데, 그의 철학적 경향은 전쟁동안 그가 겪은 경험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정에서 희생되었습니다. 그 자신은 프랑스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하던 중 독일 군에게 포로가 되어 독일에서 강제노동을 했으며, 그의 부인과 딸은 그가 포로에서 돌아올 때까지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지냈습니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그는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협력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까지의 하이데거에 대한 존경과 열렬한 지지를 철회하고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겪은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히틀러와 나치즘에 의해 유대인으로서 입은 피해 등이 그의 철학에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그의 철학의 뿌리는 히브리적 사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철학적 인간 이해를 살펴보면 그의 사유의 근저에 히브리적 사유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히브리적 사유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유일신 사상이 그의 하이데거 비판에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제공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이데거의 나치 협력에 대한 비판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하이데거에 대한 부정적 비판이 집요한데,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는 후설이나 하이데거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프랑스인들의 반독 감정과 프랑스 철학자들의 학문적 자존심이 하이데거 비판에 일종의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천재적인 철학자가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와 나치즘에 협력한 것을 두고 몇몇 철학자들은 정치권력에 학자의 양심을 판 것으로 현대 우파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하이데거의 나치 행각은 그의 철학의 기본 틀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므로 하이데거의 나치 행각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히틀러의 나치 협력에 대한 비판을 좌나 우의 문제와 연관 짓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한 지식인의 사상과 철학을 그의 행위와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여 취급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율배반이라는 용어는 한 사람의 사상과 행위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생겨난 용어입니다. 하이데거는 일개 소시민이 아니고 대 철학자입니다. 그러한 그가 히틀러와 나치즘의 독재를 이용하여 나름의 바른 혁명을 도모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나치 행각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변명할 수 없는 그의 나치행각이 집요하게 비판을 받아오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하이데거의 번뜩이는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아무리 탁월해도 미친 독재자에 협력한 그의 나치 행각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철학적 사유와 통찰이 아무리 천재적이라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히틀러와 나치즘이 인류에게 저지른 만행을 생각할 때 그의 나치 행각은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그의 철학과 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그의 철학이 인간에게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인도적인 독재자에 협력한 그의 행위로 인하여 그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이 되었고 그의 나치 행각은 나치의 공범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를 비판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어떤 변명이나 정당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그의 철학과 행위가 그를 이율배반적 인간으로 만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만큼 그 자신이 어리석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의 번득이는 지성적 사유의 능력으로 그 정도는 충분히 알았을 텐데, 알면서도 나치 행각을 한 것이라면 더욱 비난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어쩌면 철학적 사유의 능력은 탁월하지만 자신의 이율배반에 대한 인식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론적으로 탁월한 학자들 중에 이율배반적인 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지식수준으로 하이데거를 비판한다는 것은 주제 넘는 태도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가 아무리 탁월해도 그도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대 지식인들 중에는 이율배반에 대한 의식이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천재적인 철학자가 단순하게 나치 행각을 하였다고 볼 수 없고 어떤 원인이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 원인을 무신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신론자가 무신론자 된 것은 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존재는 초월적이기 때문에 어차피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합리적 사고로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믿어야 하는데, 믿지 못하기 때문에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철학자와 믿지 않는 철학자의 인간 이해와 설명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레비나스의 하이데거 비판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무신론자였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가 하나님을 믿었는지 아닌지 논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가 무신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한 개인의 전 생애 중에 감쪽같이 감추어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철학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그 어떤 물음에 대해서도 판단을 유보했다고 한다면 무신론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의 하이데거 비판도 그와 같은 전제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가 하이데거를 비롯한 서구 철학을 비판하는 것은 “절대타자를 절대자아로 환원”(reduction of the Other to the Self)시켜 실재를 파악하는 존재론이라는 것입니다. 타자에 대한 자아의 우위성의 전제를 레비나스는 비판합니다. 타자에 대한 자아의 우위성을 전제하는 서구 철학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예수님의 교훈과도 맞지 않습니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우리가 섬겨야하는 주인(the Master)으로 인식하는 윤리적 관계의 토대 하에서만이 책임감과 의무를 의미하는 진정한 진리가 발생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으며 무엇을 알 수 없을까요? 우리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하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성을 비판적으로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성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른 이성의 사용과 함께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앎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제대로 알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이성의 사용을 통한 앎의 목표이며 바랄 수 있는 것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우리는 기술문명과 온갖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 목회자들조차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다음 세대를 책임져야 할 지도자가 참 교육이 무엇인지 모르고, 경제 정책을 시행하는 행정부 책임자들이 경제를 잘 모르고, 나라의 안보를 책임져야 할 통수권자와 군인들이 안보가 무엇이지 모르는 자들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를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지렁이 같은 국민은 철없는 청소년처럼 나라 살림이 거들나건말건 선심 복지 정책만 좋아합니다. 일자리를 늘이겠다는 정책이 일자리를 줄어들게 하고, 에너지 정책, 환경 정책, 교육 정책, 안보 정책 등이 모두 이율배반적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와 국민 다수가 어떤 정책이나 주장의 이율배반에 대한 의식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철학과 신앙의 부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 3절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면서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자들이라고 하셨으니까 그들이야 말로 이율배반의 전형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라고 하신 것이 그들의 가르치는 행위의 정당성을 지지해 준 것이라는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말로만 가르치고 행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가르침을 정당하다고 지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이론이나 사상이나 철학이 바르고 정당하다고 믿는다면 믿는 바를 행해야 합니다. 믿기는 하지만 행하지 않는 것은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이율배반도 심각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이율배반적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율배반적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도 이율배반적인 지도자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율배반적 태도는 인간 스스로에게 해악을 끼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악입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 나라에서도 이율배반이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이율배반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개혁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 개인에게 이율배반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용서하면 되지만 공공의 영역에서 이율배반은 절대 용서하면 안 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2-7)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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