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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신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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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9-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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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교부들이나 스콜라 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나님 존재의 증명(proofs of existence of God)에 대한 철학적 노력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법을 취합니다.

첫째,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입니다. 본체론 혹은 실재론이라고도 하는 이 방법은 안셀무스에 의해 처음 시도 된 방법입니다. 존재론적 논증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오로지 선험적인 직관과 이성을 통해 증명하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개념에서 출발하여 그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분 이상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완전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간의 사고 속에만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반드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증명입니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존재가 있으나 우리는 그 이상 더 위대한 존재가 있을 수 없는 가장 완전하고 위대한 존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존재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있다'는 것은 가장 완전한 존재라는 생각 그 자체에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가장 완전하려면, 그것은 '있다'라는 것을 그 속성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은 것은 “있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며 인간이 완전한 존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안셀무스는 주장하였습니다.

둘째, 우주론적 증명(cosmological)입니다. 이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계에서 운동의 원인으로서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로 신의 존재를 추리하는 방법입니다. 부동의 동자는 자신은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움직이는 시동자(prime mover)입니다. 이 시동자는 자신보다 선행한 행위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는 능동적 존재로서 여러 설명이 있지만 이성과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셋째,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입니다. 대표적인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인식을 갖지 못하는 사물들, 즉 자연적 물체들이 목적 때문에 작용하는 것을 본다. 이런 것은 자연물들이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 항상 혹은 자주 같은 모양으로 작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우연에서가 아니라 어떤 의도에서부터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인식을 갖지 않는 것들은 인식하며 깨닫는 어떤 존재에 의해 지휘되지 않으면 목적을 지향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사수에 의해 지휘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들을 목적에로 질서를 잡아주는 어떤 지성적 존재가 있다. 이런 존재를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이 방법은 신을 물리적 원리를 통해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연 질서의 합목적성에서 그 설계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넷째, 도덕적 증명(moral argument)입니다. 도덕 법칙 및 도덕적 세계 질서에 의해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는 경우입니다. 이 밖에 완전자로서의 신 개념으로부터 그 원인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 데카르트의 증명, 즉 신은 완전하고 인간은 불완전한데, 불완전한 존재인 내가 사유를 통해서 완전한 존재를 임의로 만들어냈다고 가정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전제하여 신은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신의 존재를 이론에 의해서 증명하는 방법을 부정하고, 인간의 도덕적 의식의 요청에 따라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칸트 뿐 아니라 볼테르도 요청으로서의 신을 상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대한 설이 이렇게 많은 것은 그 설들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증명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이 존재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한 가지 증거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우주 전체를 샅샅이 뒤져서 확인한 후에 결론을 내려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논리와 합리의 범주를 초월한 하나님을 논리와 합리로 설명하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논리와 합리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논리나 합리로 증명된 사실은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초월적 존재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믿고 인정해야 할 대상인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이고 초월적 하나님을 믿는 인간도 하나님을 닮아 다른 존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이 초월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의 초월적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과학과 합리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의 초월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닮아서 초월적 존재인 인간이 초월의 본체인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는 것은 하등에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합리와 논리에 익숙해 있게 때문에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고 믿는 것이 신비롭게 느껴질 뿐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해 논리와 합리로 다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인격적이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자의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똑 같은 상황에서 똑 같은 원인을 두 사람에게 제공해도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생물학적 육체를 가지신 분이 아닌 초월적 존재이므로 논리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성으로 인식하고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드러난 하나님의 일과 뜻입니다. 교리나 신학이 철학적 방법을 빌어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지만 그 설명은 나름의 기여를 함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불완전함도 드러냅니다. 따라서 교리나 신학의 불완전함은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성을 더욱 확고히 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성이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따라서 믿을 가치도 없고 믿어서는 안 될 가짜 하나님입니다. 기독교가 상당한 세력으로 자리잡아가게 될 즈음 마르키온이라는 이원론적 이단이 교회 안에 들어와 그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르키온은 구약의 하나님은 율법적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은총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약과 모순되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구약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터툴리아누스는 “나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나 진리가 논리적 모순을 일으켜도 그 모순은 하나님이나 진리를 믿을 수 없음의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내재성은 초월성에 비해 이성적 이해의 영역이 넓습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내재성이 이성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존재의 신비는 초월성의 영역뿐 아니라 내재적 영역에도 신비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그 만드신 만물을 통해 명백히 보여 알 수 있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변명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속성들은 인간이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성들이 그분이 하신 일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란 천지를 창조하신 일이고 또한 섭리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의 결과물들인 창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들이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만물이 곧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그 만물은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드러내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인간 그 누구도 그 증거들을 보고도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보고도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만물을 보고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고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보지 못한 사람들도 본 사람들과 동일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핑계할 수 없다”는 말씀이 그러한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성경은 악한 인간들이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알 수 있는 그 능력을 활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진리를 억누른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들이 진리를 억누르는 행위 때문에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극적인 사건을 통해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출애굽 때 홍해를 갈라지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시고 추적하던 애굽의 군대는 바다에 빠져 죽게 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고 하십니다. 그 광경을 목도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 즉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이적만이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이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드러낸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홍해의 기적은 만물을 통해서도 홍해의 기적처럼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계시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들이 지향하는 것은 매일의 일상이 기적처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들을 계시한다는 것입니다.

수 없이 많은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고 일상에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들을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과학이 고도로 발전한 오늘날에는 인간의 DNA의 비밀을 다 판독했다고 큰 소리 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이성의 능력으로는 작은 벌레 한 마리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천지만물에는 하나님의 속성들이 신비롭게 드러나 있고 또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작은 벌레 한 마리도 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또한 천지만물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들과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존재가 신비롭듯이 그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또한 신비로 가득합니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초월적 내재적 신비를 통해 그분의 영광을 보고 감격하고 노래할 수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으며, 누가 주님의 조언자가 되었습니까?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롬 11:33-36-새 번역)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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