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비판의 견지에서 이성을 활용하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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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9-06-0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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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신앙과 이성의 문제에 대한 상반 된 주장들이 줄기차게 계속되어 왔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생을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일에 바쳤습니다. 그는 원칙적으로 신앙과 이성은 둘 다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모순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신학과 철학은 서로 다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진리를 추구하지만 방법에서 다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철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물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고, 신학은 하나님에게서 출발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간다고 본 것입니다. 그는 중세 기독교를 지배한 대표적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입니다. 그는 죽은 지 49년이 되는 1323년에 성인으로 추증(追贈)되었고, 1568년에는 공식적으로 교회박사(doctor ecclesiae)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교회박사는 교의상 교회에 큰 기여를 한 학자에게 주는 영예로운 칭호로 학문만 깊다고 받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경건의 덕을 인정받는 자에게 주는 것이기에 그의 주장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14세기 화가 프란체스코 트라이니가 그린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하는 “성 토마스의 승리”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토마스가 가운데 서 있는데, 책을 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양 옆에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고, 그의 발밑에는 한 이교도가 엎드려 누워 있습니다. 이는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도움을 받아 이교도를 발아래 쓰러뜨린 신학의 승리자로 묘사된 그림입니다. 그의 기독교 교리에 대한 철학적 논증은 교회를 해치는 이단들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자들은 그의 논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어서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였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복음이 지중해 연안 국가들로 전파 된 이래 철학과 복음과의 관계 즉 이성과 신앙과의 관계에 대하여 교회는 많은 혼란을 겪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칼타고의 터툴리아누스의 갈등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갈등은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클레멘트는 철학을 복음에 이르는 준비 단계로 생각하였지만 터툴리아누스는 철학을 이단의 어머니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서 복음을 받은 안디옥에서는 복음의 역사성과 에수님의 인간성을 강조했습니다. 안디옥 학파의 선구자인 사모사타의 바울은 예수님의 인간성을 강조하면서 “나사렛 사람 인간 예수는 기름 부음을 받아서 우리 주가 되시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로부터의 인간이시다.”라고 하였습니다. 네스토리우스도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인간적인 순종을 강조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초대교회에 형성된 복음과 철학과의 관계에 대한 주장들을 종합하고 평가하여 포괄적인 입장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이성과 신앙과의 관계에서 신앙의 우위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32세가 되기까지 신플라톤주의를 비롯하여 고전 이성과 철학의 방식으로 신앙에 이르기를 힘썼으나 자신의 노력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그가 고뇌에 빠져 있을 때 동내 아이들이 부르는 “톨레 레게”(tolle lege)라는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톨레 레게란 책을 집어 들어 읽으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어거스틴은 어린아이들의 그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집어 들어 펴서 읽다가 로마서 13장 13, 14절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깊은 감동을 체험하였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그는 이 체험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었고 그 후 줄곧 이성보다는 신앙의 우위성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서 신앙의 우위성을 강조하였지만, 그 다음 강조한 것은 신앙의 이해성이었습니다. 터툴리아누스가 믿음 후에는 탐구가 필요 없다고 극단적인 주장을 했지만 어거스틴은 개종 후 처음 저술한 “고백록”을 통하여 믿음의 내용들을 이해하기를 갈망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을 부르고 나서 진리, 지혜, 생명, 선, 미, 행복, 빛, 왕, 아버지, 원인, 소망, 부, 영예, 고향, 조국, 건강 등 온갖 명사를 나열하고 자기는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을 잘 모르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께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나는 당신께로 가기만을 소원합니다. 나는 당신께로 갑니다. 어떻게 가는지 가르쳐 주시기를 다시 간구합니다.”, “내가 기도에서 말한 모든 것들을 알기를 소원합니다. 내가 이런 것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었습니까? 내가 마음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말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 곳에서 모은 것들, 그래서 나의 기억에 저장한 것들, 그래서 내가 그저 믿게 된 것들을 말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어거스틴은 자기가 믿는 내용을 알기를 간절하게 소원하였습니다. 그가“Credo ut intelligam”(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한 말은, 그가 신앙의 우위성을 강조하면서도 또한 이해성을 강조하므로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성의 필요를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함에 있어서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다(Trinity is beyond human understanding).”라고 하여, 인간이 자신 즉 이성을 부정할 수 있는 용단은 지극히 진솔한 참된 신앙인의 용단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수많은 저술들은 신앙과 이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토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은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르고 발전시킨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믿음의 내용에 대한 이성적 이해 뿐 아니라 신앙의 신비를 알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는 신앙의 신비를 알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하고 붙잡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한 그의 소원은 그의 “신국론”마지막 부분에서 “거기서 우리는 쉬고 보며, 보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찬양하게 될 것이다.”라고 진술한 말 가운데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고백은 사도 바울이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고 한 말씀으로부터 배운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도 바울이나 어거스틴이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성비판적 견지에서 이성을 수용하고 활용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이성비판의 견지에서 이성을 수용하지만 왜곡된 신앙은 신앙비판적 견지에서 이성의 판단과 설명과 이해를 따릅니다. 어거스틴이 이성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것은 이성을 무시한 것이 아니고 이성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성과 신앙의 관계가 줄기차게 갈등을 계속해 온 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이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전통 기독교는 언제나 “오직 믿음”으로 믿음의 우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마치 이성을 무시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지만 신앙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이성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신앙과 이성을 구분하여 이해하고 설명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이성과 신앙은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을 하나님 형상의 일부라고 생각할 때 이성 없는 신앙은 상상할 수 없고 신앙 없이 이성만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성경은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 이성은 놀라운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이성만으로 하나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다는 것은 이성의 한계 때문입니다. 이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은사이지만 이성비판적 견지에서, 즉 이성의 한계를 알고 잘 활용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더욱 풍성하고 깊게 누릴 수 있습니다.
이성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성 없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고 이성의 능력 즉 인간의 능력으로 구원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할 때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을 낙관적이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이성비판적 견지에서는 비관주의가 되고 믿음 안에서는 낙관주의가 되기 때문에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모든 그리스도인은 비관주의적 낙관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문화 일반에 대해서 역설적이게도 양면적이고 역설적이며 포괄적 입장과 자세를 갖게 됩니다. 터툴리아누스는 세상과 문화 일반이 죄악의 세력에 지배를 받아 타락하고 부패되었기에 부정적으로만 보았지만 어거스틴은 정치, 사회, 문화 활동이나 인생 자체에 대해 비관주의적 낙관주의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현세의 복이란 장차 누릴 복과 비교할 때는 불행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만 믿음 안에서 그 복은 장차 누릴 복을 선취하여 누리는 것이기에 이방종교나 이원론이나 반문화적 입장이 설명하는 복과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은 인간과 자연과 세상 문화 일반의 회복까지를 포괄합니다.
기독교 안에서의 이성과 신앙의 갈등은 아마도 주님 다시 오실 때가지 계속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념과 철학과 사상과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도 이러한 갈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성과 신앙의 갈등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지금은 온 세계가 진보와 보수의 갈등으로 심각한 분열의 폐해를 겪고 있습니다. 진보나 보수가 다 이성의 산물이기에 그 가치는 상대적이지만 진보는 사악한 면이 심각하고 보수는 어리석어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성비판적 견지에서, 그리고 신앙 우위성의 튼튼한 토대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이성을 잘 활용한다면 상대적 가치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 이성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모든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한 이들이 이 땅에서 풍성한 하나님 나라의 복과 은총을 날마다 더 풍성하게 누리며 사는 것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입니다. 이성비판적 견지에서 성실하게 이성을 활용하여 상대적 가치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가치를 노래하고 감사하는, 세상의 불신자들이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차원의 행복을 누리는 빛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점점 늘어났으면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5-17)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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