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된 평화, 직무유기로 화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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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9-08-0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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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Calm before a storm”라는 뜻입니다. 큰 폭풍이 휘몰아치기 바로 직전 잠간 동안 놀라울 정도로 고요하고 잔잔한 자연현상을 폭풍전야라고 합니다. 모든 폭풍에 폭풍전야가 동반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폭풍은 비와 바람의 엄청난 예고현상을 동반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특이하게도 폭풍전야를 통하여 닥치는 폭풍이 있습니다. 폭풍전야는 도무지 폭풍이 몰려 올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이 고요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폭풍전야가 고요하고 잔잔하지만 폭풍과는 반대되는 그 고요함과 잔잔함이 엄청난 폭풍이 임박했음을 예고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철저하게 대비하게 됩니다. 폭풍전야가 발생하는 이유는 버섯구름 모양의 단일 셀 뇌우(Single-cell Thunderstorm)에서 바닥 근처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위로 상승하여 부분적으로 진공상태를 형성하고 이 때 차가운 공기도 함께 끌어올리게 되어 주변의 공기를 끌어당기면서 모든 공기를 폭풍 위로 올라가게 한다고 합니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공기가 폭풍을 벗어나면서 아래로 내려오게 되는데 이 건조하고 따듯한 공기는 매우 안정적이기 때문에 고요하고 잔잔한 상태를 만들어 폭풍전야 현상을 만든다고 합니다.
이러한 폭풍전야의 의미가 확장되어서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지기 직전에 차가운 분위기가 형성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상황의 적절성과 가능성의 폭발이라는 극적인 요소가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폭풍전야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그런데 자연 기상의 폭풍은 고요함과 안정적인 현상인 폭풍전야 말고도 곧 폭풍이 닥쳐올 것이라는 여러 다른 현상이 있습니다. 공기는 고요하고 안정적이지만 먼 곳에서 몰려오는 비바람 현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너무나 복잡한 이념과 사상과 가치가 혼합되어 있어서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듯 큰 사태가 시시각각 다가와도 개인과 집단에 따라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종말론적 경고를 하면서 어둠에 속한 자들과 빛에 속한 자들을 구분합니다. 어둠에 속한 자들에 대한 경고에서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빛의 자녀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임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빛의 자녀들은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도둑은 밤을 이용하여 남의 집에 침입하여 돈과 중요한 물건을 훔칩니다. 도둑이 몰래 남의 집에 침입하여 도둑질을 하다가 들키면 강도로 돌변하여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도둑이나 강도는 악한 인간이고 밤은 불법과 폭력과 거짓과 위장과 사기와 왜곡과 과장과 축소와 악한 선동 등 모든 나쁜 것들의 상징입니다. 밤은 어두움이고 악이지만 위장을 잘 하기 때문에 낮과 같고 선과 같아서 사람들이 쉽게 속습니다. 악한 사람의 배후에는 언제나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은 거짓과 왜곡과 위장과 과장과 축소 등으로 사람을 속이고 선동하고 유혹하고 심지어 위협하기까지 합니다. 인간이 사탄에 사로잡히게 되면 악한 인간이 됩니다. 사탄은 거짓되고 무모하고 폭력적이지만 또한 논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설득력이 있고 무엇보다 위장술의 천재입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가 바로 사탄의 전술입니다. 사탄의 전략에 언제나 평화, 평안, 정의, 평등, 인권, 자유 등의 개념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양의 탈을 쓴 이리”의 전술 때문입니다. 그러한 전술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속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는 사탄은 사람들의 경계심을 해제시키기 위해 평화와 안전을 앞세웁니다. 사탄은 사람의 영혼만 사냥하는 게 아니고 육체도 망가뜨리고 국가와 사회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안보 윤리 등 모든 선한 가치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탄은 그러한 의도는 숨기기 때문에 사람들은 망하고 죽는 길을 살고 성공하는 길인 줄 알고 따라가게 됩니다. 사탄에 사로잡힌 자들의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말을 믿고 죽는 줄도 모르고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탄이 “평화”를 앞세우는 것은 그것이 가장 귀중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구원의 특징이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평화를 형성하고 사람들과의 사이에도 평화를 이룹니다. 성경이 평화, 평강, 평안 등 여러 단어로 묘사하지만 결국 같은 뜻의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은 평화를 이룹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하였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평화가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영적 세계나 인간 세상에서나 평화는 최상의 가치입니다. 평화를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 예외가 있는데 사탄은 평화를 싫어합니다. 하나님도 천사도 인간도 평화를 좋아하지만 사탄은 평화를 싫어합니다. 사탄은 평화 자체를 싫어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나 천사나 인간이 평화를 사랑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평화를 더욱 싫어하고 증오합니다. 그러면서도 사탄은 철저하게 자신이 평화를 사랑하는 존재인 것처럼 위장합니다.
구약의 모든 거짓 선지자들은 평화를 강조하고 앞세웠습니다. 평화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복이지만 인간이 그것을 쉽게 얻거나 성취할 수 없는 이유는 사탄의 계략 때문입니다. 평화가 깨어지는 모든 곳에는 사탄의 세력이 침투하여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가정이나 교회나 정치나 사회에 평화가 이루어지고 확산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사탄은 평화를 파괴하기 위해 평화를 강조하고 앞세우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평화를 성취하고 누리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그 같은 사탄의 악한 계략과 위장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사탄의 위장된 평화에 속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택함 받은 자라도 넘어뜨려 망하게 하려고 안간 힘을 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탄의 그와 같은 전략을 알기 때문에 평화를 얻기 위해 고난과 역경의 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마치 평화와는 반대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둠에 속한 자들은 평화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고 빛의 자녀들은 고난과 갈등과 역경의 길을 자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진실과 거짓을 간파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탄의 위장술에 속기 쉽습니다. 사탄의 위장술에 속지 않을 지혜는 화려하고 넓고 멋있어 보이는 것을 일단 경계하는 것입니다. 넓은 길은 피하고 좁고 협착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길이 좁고 협착하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얻는 길도 그와 같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평화는 평화를 외친다고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과 싸워서 쟁취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둘기처럼 순결해야하지만 또한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둘 모두가 필요하다고 일러 주신 것입니다.
고대 로마의 장군 베게티우스(Vegetius)는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군사학 논고는 거의 모든 현대 군사학의 고전이 되고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를 비롯한 후대의 많은 군사학자들이 가장 중요한 자료로 베게티우스의 군사학을 활용 했습니다. 그가 이 군사학 논고를 저술할 무렵에 로마는 군사 전술 면에서 극도로 쇠퇴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철저하게 현실을 직시할 것을 강조하였고 철저한 전술과 전쟁 기술을 개발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군사학에 있어서 개혁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당대의 황제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베게티우스의 진언을 경청하지 않았습니다. 베게티우스의 군사학 논고는 오히려 후대인들에게 진가를 더욱 인정받게 됩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유럽 각국의 개혁적인 지도자들이 군사 개혁을 논할 때마다 베게티우스의 군사학 논고를 최고의 지침서로 활용 해 온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현대군사학에서도 베게티우스의 군사학 논고가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훈련과 군기를 강화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군사학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베게티우스의 주된 논지는 군대의 생명은 부단한 훈련과 엄격한 군기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는 그의 책 첫 문장을 “전쟁에서 승리는 전적으로 숫자나 단순한 용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기술과 군기만이 승리를 보장 할 것이다”로 시작했습니다. 당시 군기가 느슨하여 지탄의 대상이 된 로마군은 이 문장을 몹시도 언짢아했을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문재인 정부도 이러한 말을 몹시 언짢아하겠지만, 문재인 정부의 평화정책은 한 마디로 위장된 평화입니다. 대한민국 뿐 아니라 군대를 양성하는 나라라면 어느 나라든지 베게티우스의 이 말을 사려 깊게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평화를 원하는 자는 전쟁을 준비해야한다.”, “용맹은 숫자보다 우월하다. ”, “지형의 특징은 때때로 용기보다 더 중요하다. ”“피아의 전력을 제대로 평가하는 장군은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 “선천적으로 용감한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이 훈련과 군기를 통해서 용감해진다.”등의 그의 군사학의 금언들이 절실하게 들리는 것은 대한민국의 현재의 상황 때문입니다. 그가 남긴 말 중에 “검보다 굶주림으로 적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최고의 기술이다.”는 말이 나의 뒤통수를 때렸습니다. 북한에 식량지원 하는 문제를 두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갈등했었는데, 적을 굶게 하여 항복하게 만드는 것이 칼로 정복하여 승리하는 것보다 희생을 줄이는 승리라는 뜻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평화가 결과이고 수단이 아닌 것은 사탄이 어둠의 세력으로 사람과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방법으로 평화를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평화를 모르고 인간과 세상을 모르기 때문에 표방하게 되는 유치한 생각입니다. 그 유치함이 위장된 평화를 위장된 평화인 줄 모르고 주장하고 따르는 어리석음입니다. 위장된 평화는 직무 유기이며 필연적으로 화를 부른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고 또한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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