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력이 요구되는 계시와 거짓의 은폐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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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9-11-1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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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피스트들을 궤변론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기변술(奇辨術)로 부정(不正)을 정의(正義)라고 우겼습니다. 소피스트의 대표적인 인물이 프로타고라스입니다.‘프로타고라스의 재판’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프로타고라스에게 찾아가 수사학을 배우고 싶은데 돈이 없어도 가르쳐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수사학은 오늘날 법학에 해당하여 수사학을 배우면 오늘 날로 말하면 변호사가 되는 것입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수사학을 배우고 싶지만 돈이 없는 청년에게 “그것은 너에게 달렸다”고 하며, “공부가 끝난 뒤, 맡게 될 첫 재판에서 이기면 그 돈으로 수업료를 내는 조건으로, 수업료를 외상으로 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청년은 그의 배려로 수사학 공부를 마치고 변호사가 되었지만 어떤 재판도 맡지 않고 놀기만 하였습니다. 그러자 프로타고라스는 수업료를 받기 위해 제자를 고소하였습니다. 그가 재판정에서 그 제자에게 “어차피 너는 수업료를 물게 되어 있다. 재판에서 네가 이기면 나와의 계약으로, 지면 재판에 졌기 때문에 수업료를 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제자는 오히려 스승에게 “저는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재판에서 이기면 이겼으니까 수업료를 안 내도 되고, 지면 재판에서 이기면 수업료를 내기로 한 스승님과의 계약에 따라 물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다른 버전에 의하면 프로타고라스가 마지막 변론을 다음과 같이 했다고 합니다. “재판장님, 저는 이 재판에 져도 수강료를 받아야 하고, 이겨도 받아야겠습니다.”그 이유를 묻는 재판장에게 “제가 이 재판에서 진다면 제가 얼마나 제자를 잘 가르쳤으면 스승인 제가 재판에 지겠습니까? 그러니 수강료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재판에 이기면 이겼기에 당연히 받아야 하겠지요.”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소피스트들에게는 사실과 진실이 중요하지 않고 궤변과 기변술로 진실을 덮을 수도 있고 새로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젊은이들은 그와 같은 수사학을 배우기 위해 유명한 소피스트에게 몰려갔고 수사학을 가르치는 소피스트들은 국민을 속이는 온갖 기발한 기변술을 개발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무지한 국민을 가장 잘 속일 수 있는 수사학을 가르치는 소피스트가 인기를 누렸고 젊은이들은 그러한 소피스트에게 몰려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소피스트들의 궤변과 기변술의 수사학으로부터 젊은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다가 오히려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지도자와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지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바른 길”, 즉 선이나 옳은 것에 대한 기준이 없거나 그 기준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 사회는 소피스트들이 활개를 치던 때와 같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는 옛 소피스트들이 수사학이라는 소위 학문의 이름으로 국민 대중을 속이는 것을 능력이라고 가르쳤던 때를 방불케 하는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보편 가치의 기준을 부정하는 시대정신은 궤변과 기변술로 없는 일을 있는 일로 만들고,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며, 죄인을 의인으로, 의인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흔히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하지만 지금이야 말로 진리와 절대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가치질서의 암흑시대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 세상은 언제나 어둠이 지배하는 곳이고 예수님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무신론과 상대주의는 그 빛을 거부하고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모든 시대가 다 어두운 시대이지만 이 시대의 어두움이 더욱 극심한 이유는 너무도 당당한 무신론과 상대주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지만 그 빛을 세상에 비춰야 할 교회마저도 그 빛을 가리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는데 이는 교회까지 무신론과 상대주의논리에 설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정치권과 언론과 법조계와 대학과 교회 안에서조차 소피스트와 같은 궤변이 통용되는 것을 보아 사실임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 같은 궤변이 통용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신론이고 그 무신론으로부터 나온 상대주의가 혼돈과 무질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어둠을 빛보다 더 좋아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천둥 같은 음성으로 “이놈들!”하시며 번개 칼을 휘두르신다면 겁이 나서라도 악행을 그칠 텐데...,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은폐의 방식을 취하시기 때문에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여 계속하여 악행과 불법을 그치지 않습니다. “계시”란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인데, 그 계시가 은폐의 방식을 취하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을 드러내는 계시가 무엇을 감추고 숨기는 은폐의 방식을 취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점에서는 신비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자들에게는 확실하고 명료한 계시이지만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은폐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지심으로 오신 것은 인간에 대한 그분의 은총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지 않으시고 하나님으로 오셨다면 그것 자체로 인간에게 재앙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계시의 은폐성은 인간에게 올무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계시 가운데 은폐의 방식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인간이 인식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폐의 문을 여시고 자신을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특별 계시 뿐 아니라 일반 계시도 역시 은폐의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폐의 문을 여시고 당신을 보여주셔서 하나님을 믿게 된 자들은 일반 계시 가운데 은폐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은폐의 방식을 취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섭리를 깨달아 알만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능력을 활용하여 더듬어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찾아내야 합니다. 비록 은폐의 문을 열어 보여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하나님을 알만한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찾지 않아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심판의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같은 일에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것처럼 원망과 불평의 이유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계시의 은폐성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배려와 사랑을 발견하고 더욱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더욱 힘들고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사탄도 은폐의 방식으로 활동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의 활동 목적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인간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절대로 그러한 목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인양 자신을 가장하거나 천사처럼 처신하여 사람들을 속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활동하지만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가 숨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사탄이 은폐의 방식을 취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활동한다면 덜 위험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폐의 방식을 취하신 이유는 인간에 대한 은총과 배려와 사랑 때문이지만 사탄이 은폐의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은 속이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따르는 길은 좁고 협착하고 고통스럽고 손해보고 욕을 먹고 핍박 받는 형태로 은폐되지만 사탄이 유혹하는 길은 넓고 화려하고 인기와 명예와 이익이 따르는 형태로 은폐되어 있습니다. 어느 길이 하나님의 길이고 어느 길이 사탄의 길인지 분별할 수 없을 때는 그것을 분별하는 방법이 있는 데, 넓은 길은 사탄의 길이고 좁은 길은 하나님의 길이라고 판단하면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입니다. 사탄은 전쟁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합니다. 땀과 피를 요구하는 지도자는 참 지도자이고 장밋빛 내일을 약속하는 지도자는 거짓 지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나라를 망하게 한 지도자들은 다 장밋빛 내일을 약속한 지도자들이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땀과 피를 흘려 생산을 극대화 하고 나라를 지키자고 요구한 지도자는 참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폐의 방식이나 사탄의 은폐의 방식은 모두 우리로 하여금 경계와 분별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과 사탄, 참과 거짓, 진실과 허위, 선과 악, 미움과 사랑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분별하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분별을 잘 할 수 있는 지혜도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분별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드러난 악보다 드러나지 않는 악이 더 위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차리고 예민한 영성과 지성으로 모든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 자유민주주의인지 인민민주주의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인지 사회주의 경제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참 인권과 거짓 인권을 분별해야 하고 진실 된 환경론과 거짓된 환경론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에 위협이 되고 있는 신천지라는 이단이 있습니다. 이곳 뉴욕에도 신천지가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신천지는 전형적인 사탄의 은폐 방식으로 활동합니다. 일단 기성 교회에 들어가 충성된 교인으로 가장하여 인정을 받은 후에 기성 교회를 비판하며 자기들의 거짓 교리를 주입시켜 다니던 교회를 떠나 신천지에 가입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신천지의 침투를 몹시 경계합니다. 하지만 신천지가 아무리 교회에 숨어 들어와서 활동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교리가 너무 엉터리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배운 교인이라면 금방 알아볼 수 있어서 사실 그렇게 치명적으로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이단에 취약한 원인은 기성 교회 교인들이 성경에 무지하기 때문일 수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는 신천지보다 몇 배 더 위험한 이단이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 활동하고 있지만 그것이 이단인지 눈치 채지 못하는 교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 이단은 다름 아닌 기복주의입니다. 교회 강단의 거의 많은 메시지가 기복주의에 함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거의 모든 기도는 복을 비는 기도입니다. 예배까지도 복 받기 위한 방편이고, 헌금 봉사 구제 충성 등 거의 모든 활동이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략해 버렸습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몇몇 대형교회들은 기복주의 폐해의 극단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계, 언론계, 대학, 법조계, 예술계, 군인 등 모든 분야에 해괴한 소피스트들의 궤변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문제의 교회 지도자들까지 그 옛날 그리스의 소피스트들 수준의 궤변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수만의 교인들이 그런 수준의 궤변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정치현실보다 더 참담함을 느끼게 합니다.
정치계의 소피스트들이 너무 설치고 나라를 망치고 있어서 교회 안의 소피스트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정치계의 문제나 교회의 문제나 결국은 물질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물질이 점령해 버린 결과가 지금의 한국 정치이고 교회의 현주소입니다. 물질주의 기복주의는 인간 자신을 섬기는 우상입니다. 정치인들의 부정이나 교회 지도자의 부정이나 모두 바알 우상인 물질주의 기복주의에 함몰 된 결과입니다. 교인들이나 지도자들까지 기복주의가 우상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긴 것처럼 현대 교인들은 기복주의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있습니다. 신천지 같은 이단보다 기복주의가 더 치명적인 이단이지만 기복주의는 신천지보다 더 교묘한 은폐의 방식으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어서 더 많은 교인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은폐의 방식으로 계시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깨달아 순종하기 위해서 분별력이 필요하고 파괴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사탄의 은폐술을 간파하기위해서도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마 7:15, 요일 4: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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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편지님의 댓글
그리스도의편지
한국 교회의 타락적인 면을 본다면,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을 모르기에 자꾸만 "제는 이단이야!"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지는 않을런지요?! 최근에 어느 신학자가 "한국 교회는 중세 교회보다 훨씬 더 타락했다"라고 말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목사 셋만 모이면 교단을 세워서, 오늘날 광화문에서 매주 시정잡배보다 못한 말을 지껄이는 자를 온 교회가 쳐다보거나 일부 교회가 동조하는 기막힌 모습을 그냥 쳐다보고 있는 현실일 것입니다. 심지어는 지버릇 개 못준다고 그기서도 돈은 좋아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 "헌금"을 모으고 있습니다. 미쳐 날뛰는 모습을 교회 스스로 제어할 수도 없는 현실에 빠진게지요?!
특정 누구를 탓하기 전에 한국 교회는 오십보 백보인 현상입니다. 수많은 목회자나 그리스도인들이 한 발자욱 잘못 디뒤면 이단이고 사탄이 되는 것이 아닐런지요?
오십보 백보로 은폐의 숫자가 조금 차이난다고 어디 그게 이단이 아니고, 삵군 목사가 아니겠는지요? 한국 교회 예외없이 정말로 회개하며 참회해야 할 때라고 생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