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로 이사 오신 하나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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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9-12-2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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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성경이라 함은 구약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약 뿐 아니라 신약을 포함하여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입니다.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기독론이라고 합니다. 기독론,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심오한 진술은 요한복음 1장 1-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리와 신학의 역사에서 기독론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있어왔지만 요한복음 1장 1-14절이 가장 확실하고 심오한 결정적 진술입니다. 그 내용은 신학적 이론이나 합리적 방식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을 포함하고 있어서 자유주의자들이 이성적으로 수용하지 못할 뿐이지 기독론의 진수는 그 안에 명확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따르는 한계가 성육신을 통해 극복되었습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였는데, 여기 “거하시매”의 헬라어 에스케노센(ἐσκήνωσεν)의 본래의 뜻은 “천막을 치다”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의 배경을 가진 용어인데,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위해 구약에서 가져와 사용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 “천막을 치다.”라는 에스케노(ἐσκήνω)라는 단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장막을 치다”또는 “성막을 치다.”라고 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요한은 이 깊고도 심오한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쉬운 문장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요한의 학문이나 문장 실력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입니다. 훌륭한 선생은 어려운 내용을 쉬운 말로 설명합니다. 성령은 가장 탁월한 선생입니다. 그래서 요한으로 하여금 이 어려운 내용을 쉬운 문장으로 기록하게 하였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본문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쉬운 문장으로 기록을 하여도 그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역시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쳤다는 뜻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장막이란 곧 거주의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마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장막을 친 것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집을 짓고 사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친 장막이 바로 성막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막에 대한 지시는 매우 자세합니다. 출애굽기 25장에서부터 성막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들을 가지고 성막을 만드는데, 수를 놓는 사람, 장색, 목수, 석수 등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기술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성막에 임재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오셔서 함께 사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막에 거하심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게 되었다는 것이 요한복음 1장 14절의 설명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더 쉽게 “우리 마을로 이사 오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해 보았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초월자 하나님이 왜 굳이 이스라엘 가운데 마련한 장막에 오셔서 거하셨을까요?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고 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보다 긴 안목으로 원시적인 구속사의 지평에서 바라보면 그렇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이지만 또 한 편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신과 인식의 한계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데,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는 불안했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왜곡하는 것이기에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금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엄격하게 금지한 계명을 어겨가면서까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을 추구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입니다. 그 사건이 심각한 죄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진멸하시려 하자 모세가 중재하여 진멸은 면하였으나 모세는 레위 족속을 불러내어 방자한 이스라엘을 죽이라고 하여 그 날에 3천명이 레위인들의 칼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이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오늘날 우리도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고 또한 보이는 하나님으로 왜곡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아예 이스라엘 진 가운데 장막을 치고, 이를테면 이사를 오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보이는 장막 가운데 오셔서 사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장막이 성막인데, 그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막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성막이 완성되자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성막 위에 나타났고 그것에 따라 이스라엘은 머물기도 하고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막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당신께서 그곳에 임재하시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치시고 보여주셨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말라는 교훈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거나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거듭된 당부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었고, 심지어 모세조차도 출 33:18절에서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하였지만 하나님의 대답은“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고 하셨습니다. 신 4:15절은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고 하였고, 신 4:16-18절은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하였으며, 그 뿐 아니라 하늘의 일월성신이나 그 무엇도 섬겨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그 외 모든 것은 피조물인데,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이라고 섬기게 되면 창조주를 피조물로 왜곡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은 엄격히 구별됩니다. 이것에 대한 혼동을 하나님께서는 엄격하게 금하셨습니다. 성막은, 너희가 비록 나를 보지는 못하지만 내가 너희들 중에 한 장소를 정하여 거기에서 너희와 함께 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장막 중에 거하신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성취이며 또한 약속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들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진행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한 곳에, 어떤 때는 며칠을 머물기도 하고, 몇 달을 머물기도 하고, 몇 년을 머물기도 합니다. 머무는 기간은 얼마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미리 계획된 스케줄에 의해 떠나고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머물고 떠나는 문제는 이스라엘이 의논할 문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면 머물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머물 때는 장막을 치는데, 아무렇게나 장막을 치는 것이 아니라 각 지파를 따라 동서남북으로 지역을 나누어 장막을 쳤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막 한 가운데 성막을 쳤다는 사실입니다. 성막을 한 가운데 두고 백성들이 사방으로 장막을 쳤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은 그들의 장막 문에서 누구나 성막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들의 동네 중앙에 하나님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을 드나들 때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성막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그들의 마을에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만질 수 없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이웃만이 아니라 지도자, 사령관, 주인, 왕, 또한 아버지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장막에 거하신다는 것은 은혜요 복이지만 또한 두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성막 안에는 아무렇게나 드나들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성별 된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조심 없이 성막에 들어갔다가는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성막 안에 지성소가 있고 지성소 안에는 범궤를 두었습니다. 법궤는 극도로 거룩하게 구별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옮길 때에도 엄격한 규정을 따라 아무나 메거나 접촉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규정을 무시하다가 참변을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거룩하게 구별된 법궤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왜곡하거나 침범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지 그 자체에 마술적 신통력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수행할 때 법궤를 앞세우고 나가서 승리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법궤 자체의 신비한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신실하게 순종하고 법궤를 앞세울 때는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견고한 여리고 성도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법궤를 메고 전쟁에 나갔다가 참패를 당하고 법궤까지 빼앗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건이 바로 하나님 우상화에 대한 경고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법궤나 십자가나 기도를 앞세운다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삶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순종할 때 그러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을로 이사를 오셔서 우리와 물리적으로 가깝게 지내신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너무도 감사하고 고마운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이지만 그것을 영적 갑질을 해도 된다는 것으로 오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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