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힘이 정의인 세상 방법 사용하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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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9-12-0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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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에게 “신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는“나는 신을 믿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신을 알고 있으니까.”라고 대답을 합니다. 지독한 무신론자인 그가 신을 알고 있다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믿는 자를 비웃는 비아냥거림이고 교만입니다. 그가 쓴 “긍정의 배신”이나 “노동의 배신”은 긍정적 사고방식이나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상황을 합리적으로 직시하지 못하게 하고 기업주나 지배자들의 정당하지 못한 정책이나 생각을 정당화 하는 현실을 비판한다는 면에서는 나름의 기여를 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금융위기나 정책의 실패 등으로 경기가 침체되는 경우 기업의 CEO들은 직원들을 해고하고 난 뒤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남아있는 직원들로 최대한의 능률을 끌어내야만 하는 과업에 직면하게 될 때 가장 값싸고 효율적으로 당면한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이 긍정적 동기를 유발시키는 강사를 초청하여 직원들로 듣게 하는 것입니다. 저자의 주장이 이 시대에 만연한 맹목적인 긍정이나 지나친 낙관주의를 비판한 것에는 일면 일리가 있지만 자유시장 경제 시스템 하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으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자유시장경제는 단순한 사회과학이나 감성적 심리학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자유시장경제에서 “자유”란 본래 인과 관계의 차원을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자유시장경제라고 했을 때 시장의 기능은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담 스미스가 시장의 기능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한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이는 단순히 시장의 기능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과 역사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역사에서나 경제에서나 결코 보이지 않는 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은 방법으로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합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싸구려 긍정적 사고방식이나 낙관주의를 비판하므로 독자들에게 어필하고 있지만 철저한 무신론자인 저자가 감추고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기독교를 부인하고 보편 가치를 폄하한다는 점입니다. 무신론자의 정의와 도덕, 또는 상황 진단이나 대안은 바른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긍정적 사고방식을 복음으로 믿는 것만큼이나 유치한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든지 아니면 인간 자신을 믿고 섬기는 길 외에 제3의 길은 없습니다.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는 ‘초인’을 제시하였고, 래그나 레드비어드는 “힘이 정의다”라고 하였지만 그들의 주장은 결국 한 마디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조잡한 주장입니다. 래그나 레드비어드나 니체 같은 대가들의 주장을 조잡하다고 일갈하는 것이 학문이나 철학에 나름 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에게는 한 없이 교만한 주장으로 들리겠지만 정통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하여 그의 신학대전을 집필하다가 도중에 중단하였습니다. 1273년 12월 6일, 토마스는 여느 때처럼 성 니콜라오 성당에서 미사 도중에 영적 체험을 한 이후 그의 신학대전 제90문 제4항으로 저술을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토마스는 친구 레지날도에게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입 밖에 내지 말 것을 서약시킨 후“내가 보고, 내게 계시된 사항에 비하면 내가 쓴 것은 모두가 나에게는 지푸라기처럼 보인단 말이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믿게 된 이들은 모두 자신을 무지하고 무익한 존재로 깨달았습니다. 욥이 그랬고, 다윗이 그러했으며, 이사야, 베드로, 바울, 어거스틴, 칼빈 등 수많은 기라성 같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 앞에 인간의 무가치함과 무지함을 절감하며 고백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현실적으로 직면한 인간과 인간 사회와 자연의 모든 난제들을 다 이해하거나 긍정하고 받아들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납득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에 직면하여 고민하고 괴로워하였습니다. 자연재해나 전쟁이나 질병과 고통 같은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도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시지만 이성과 합리적으로 바라볼 때 현실은 힘이 정의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편을 비롯하여 성경 여러 곳에는 불합리한 현실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며 부르짖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주 받은 것처럼 죽는 의인도 있고 은총 가운데 생을 마감하는 것 같은 악인들도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악인은 형통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의인들은 끝내 고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같은 불합리한 현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한 이들이 래그나 레드비어드나 니체 같은 무신론자들입니다. 그들의 주장과 논리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농후하게 배어 있습니다. 래그나 레드비어드는 “가명을 쓴 니체다”, “빨간 수염”등 온갖 추측을 불러일으키며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문제작을 세상에 던져 놓고 사라졌습니다. 지금 보아도 도발이라 할 그의 주장은 1800년대 후반에는 엄청난 반발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세상을 향해 돌을 던지고 사라진 것입니다.
그는 인류의 역사가 인간을 무기력한 노예근성에 빠지게 하였다고 하면서 그렇게 만든 대표적 선동가로 예수를 지목하였습니다. 예수를 교활한 악령, 정복자, 사탄의 마법으로 세상을 홀린 자라고 하며 국가와 정치, 모든 강자가 예수의 제자로 강압적 폭력을 정당화하여 영화를 누려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을 강자의 이상형으로 제시하며, 세상에서는 용감하고 대범한 자만이 탈취해 누릴 수 있는 땅과 황금과 명예와 권력이 있고, 나를 정복한 자를 내가 정복하는 것이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는 방법이라고 하였습니다. 강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우위를 힘의 과시를 통해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윤리나 정의나 사랑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종교나 자선이나 민주주의 같은 것은 다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래그나 레드비어드가 니체보다 10년 정도 앞선 인물이라고 추측합니다. 니체가 래그나 레드비어드의 “힘이 정의다”를 읽었는지, 아니면 두 사람이 사상적으로 조우를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마르크스와 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래그나 레드비어드와 니체 무신론을 뼛속까지 이어받아 계승한 자들입니다. 니체는 망치를 들고 모든 우상을 파괴하려 했는데 그 우상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기독교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미워하고 증오했든지 하나님이 관심을 기울이는 여자와 어린아이와 약자까지 무시하였습니다. 래그나 레드비어드나 니체, 마르크스나 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하나님과 기독교의 반항아들이고, 그들이 기존의 전통 가치와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반항하는 것에 대해 영혼 없는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이 열광하였고 지금도 열광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와 같은 무신론자들을 비난하는 일은 쉽지만 그들의 주장과 이론이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에게 그렇게도 어필하게 만든 것이 기독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무신론자들의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한 불만과 공격은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이성과 논리와 합리와 과학으로 접근하면 하나님과 성경과 기독교는 모순투성이입니다. 시편 기자들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불합리한 현실에서 갈등하고 씨름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납득하고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하나님께 반항하지는 않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그와 같은 현실에 직면하여 하나님은 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그 다음 전개되는 모든 일은 그 결론을 내린 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또한 감당할 수 없는, 그 전보다 더 심각한 혼돈과 무질서로 함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면 선악의 기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은 자유도 아니고 인간의 자기실현도 아닌 혼란과 무질서와 두려움과 저주와 심판입니다. 하나님 없는 개인과 사회는 래그나 레드비어드나 니체처럼 노골적으로 힘을 정의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마르크스나 신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온갖 선한 주장과 정책들을 앞세우지만 그런 것은 위선에 지나지 않고 결국에는 앞선 자들처럼 힘이 정의라고 믿습니다. 래그나 레드비어드나 니체가 마르크스나 신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후대에 나타났다면 그들의 위선을 혹독하게 비난했을 것입니다. 래그나 레드비어드나 니체는 자신들의 정체를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에 위선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속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오히려 덜 위험합니다. 로마 제국이 폭력으로 기독교를 박해했다면 유대교는 위선으로 기독교를 박해하였습니다. 외형적으로는 폭력이 위협이 되지만 내적으로는 위선이 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폭력도 경계하지만 그보다 거짓과 위선을 더 경계합니다. 폭력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지만 거짓과 위선은 우리를 무장 해제시켜서 점령합니다. 이 시대의 무신론은 노골적으로 힘이 정의라고 주장하지 않고 자유, 인권, 여권, 동물권, 정치, 경제, 환경, 교육, 이민, 무역, 외교 등에서 온갖 좋은 주장과 구호를 앞세우지만 대부분의 경우가 위선입니다.
미국 하원이 2004년 북한인권법(North Korean Human Rights Act of 2004)을 만들었고, 지난 11월 20일에는 홍콩인권법을, 이어 지난 12월 3일에는 위구르인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법은 통치를 위한 것이고 통치를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미국이 남의 나라의 인권법을 제정했다는 것은 그 남의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으로 볼 때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역적 국경이 없고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미국의 통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런데 미국의 물리적인 힘이 남의 나라의 인권법 제정을 가능하게 하고 제정 뿐 아니라 통치가 가능하게 합니다. 만약에 해당 국가나 제3의 국가가 그 인권법을 어기면 미국은 물리적인 제제를 가할 수 있습니다. 약한 나라는 그런 법을 만들어도 그 법을 집행할 물리적 힘이 없기 때문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에도 북한인권법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지금의 한국 정부는 북한인권에 관해 한 마디 비판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 법을 집행할 물리력이 없거나 의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국제관계에서는 힘이 곧 정의입니다. 국제관계 뿐 아니라 모든 나라 안에서도 역시 힘이 정의입니다. 물리적 힘(정부, 국회, 법원, 검찰, 경찰, 군 등)이나 언론의 힘이나 여론의 힘이나 경제적 힘이 곧 정의라는 사실을 오늘날만큼 다방면에서 노골적으로 보여준 시대는 없었을 것입니다. 힘이 있으면 불법을 저지르고 거짓말을 해도 약간의 비난을 받을지언정 치명적 제제를 받지는 않습니다. 정치계, 교육계, 종교계, 문화 예술계 등 인간이 모인 어떤 집단이든지 힘이 곧 정의가 아닌 곳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이 시대에 누가 과연 래그나 레드비어드나 니체를 비난하거나 욕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현실이 불합리해도 그 불합리한 현실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확증하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불합리한 상황 가운데서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들이야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니까 온갖 거짓과 위선과 폭력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행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짓과 폭력을 정당화 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선과 정의를 존중하고 법과 질서를 잘 지키고 약자를 돌아보는 일에 일평생 자신을 희생한다고 해도 이 땅에서 아무런 보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기대하는 보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의 차원에서 하는 것이지 먼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그 보상으로 무엇을 받은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경우라고 할지라도 불합리한 현실을 핑계로 거짓이나 폭력을 정당화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노골적인 폭력의 정당화나 위선과 거짓을 경계할 뿐 아니라 그러한 세상을 닮아가는 자신의 태도와 경향도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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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ㄷㄱ님의 댓글
ㅂㄷㄱ
북한의 인권문제는 참 심각하고 어제오늘의 일도 아닙니다. 한국으로서는 직접적으로 그걸 푼다기 보다는 미국과 중국등의 나라들 사이에서 잘 균형을 잡고 접근해야겠지요. 북한과 정면으로 다툼을 일으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거고 그들의 도발의 빌미만 주게 될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한국 기독교 총회라는 한국 기독교를 대표해오던 곳의 회장인 전광훈 목사가 과거 빤스발언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 까불면 (내게) 죽어." 라는 발언을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문둥병이라도 내려서 온 인류가 다 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성 모독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개인적으로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미 저주를 받고 머잖아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 같습니다. 황목사님은 그의 추종자는 아니시지요? 여기 아멘넷은 아무런 논평이 없네요. 그냥 덮고 싶은가봅니다. 여기서 과거 비느하스처럼 누가 분노하여 하나님의 편에 설지 지켜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