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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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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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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역사적 사실과 개인의 믿음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정통신학자들과 이성을 앞세우는 사상가들 사이에 오랫동안 계속되어왔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역사 초월적 토대를 가지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지 않고, 심지어 바울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그에 대한 믿음도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 자체를 믿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아닙니다. 이순신이 역사적 실제 인물임을 인정하고 믿는 것처럼 예수님이 역사적 실존 인물임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역사를 통해 행하시고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주어졌고, 비록 역사 자체는 불완전하여도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합니다. 불완전한 역사를 통해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우리가 그것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완전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역사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역사 내재적입니다.

역사적 사실이란 단순한 이론이나 관념적 사실이 아닌 역사상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나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사란 실제로 일어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사실이 왜곡되었거나 없었던 일이 덧붙여졌거나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일 수가 있습니다. 역사상에 일어난 일이나 사건을 여러 사람이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역사가의 해석에 따라 역사가 달라질 수가 있듯이 목격자의 관점과 이해에 따라 역사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한 사건이 역사상에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은 종교적 측면, 정치적 측면, 문화적 측면, 도덕적 측면, 교육적 측면, 사회적 측면 등 다층적 측면과 관련을 갖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목격자나 역사가의 해석이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고 다양한 역사해석은 옳을 수도 있지만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역사에 대한 바른 성경적 이해를 갖게 되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을 통해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되지만 비 성경적 역사관에서 접근하게 되면 하나님과 성경을 왜곡하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독일의 개신교신학자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는 역사가 믿음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면 훈련 받은 역사가만 계시를 알 수 있다고 해야 합니다. 또한 일반인들은 믿음에 관하여 역사가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기에 이성과 믿음, 즉 철학과 신학을 갈라놓았고 이는 곧 카톨릭 사상이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이 되었습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모든 사안에 대한 진리는 이성을 통해서나 그렇지 않으면 믿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경우 하나님의 존재는 그 모든 사안에서 예외에 해당합니다. 아퀴나스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없지만, 만약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믿음이 아닌 이성적 지식의 문제로 규정할 경우 일반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려 할 때 철학자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철학자의 논증과 관계없이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믿습니다. 반넨베르그의 생각대로라면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일반인들을 역사가의 은총에 맡기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나 부활을 믿을 때 역사가의 도움을 받아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움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 증거가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충분조건이라면 역사적 증거를 아는 경우에는 믿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객관적 증거와 타당한 논증을 통해서도 믿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믿음은 객관적 진리와 성령의 주관적 역사에 대한 반응이라고 해야 합니다. 믿음을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는 초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특정 사람들에게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판넨베르그의 역사접근방식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경우,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본 사람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많지만 부활을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던 그 순간에 거기에 누군가 있었다고 해도 부활의 광경을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물리적 또는 생물학적 생명으로 되돌아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유한한 생물학적 육체에서 불멸의 영원한 생명 영역으로 변화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을 목격한다거나 객관적으로 논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활을 눈으로 볼 수 없고 객관적으로 논증할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람들은 부활 자체를 비역사적 사건으로 비틀어 정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그 부활을 믿는 믿음은 중요하다고 하는 주장은 헛된 믿음입니다. 역사적 사실이 믿음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역사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모든 이들의 믿음은 헛것이라고 성경은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페린(N. Perrin)은 믿음과 역사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지식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그 세 가지는 역사적 지식, 역사적 의미가 있는 지식, 믿음의 지식입니다. 역사적 지식이란 과학적 역사 기술이 과거에 관해 주는 지식으로 그는 이를 ‘확실한 지식’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지식은 후대인들에게 얼마나 유용할 것인가와 관계없이 추구되는 지식으로 새로운 정보에 의해 비판할 수 있고 고칠 수 있는 객관적 지식입니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지식이란 한 묶음의 역사적 지식에서 개인이나 동시대인과 연결되거나 의미 있는 정보들을 골라낸 지식입니다. 마지막 믿음의 지식은 과거에 대한 지식으로, 그보다 더 중요한 지식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지식입니다. 페린은 이 믿음의 지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였습니다.

첫째, “믿음의 지식은 종교적 헌신과 떼어놓을 수 없다.” 즉 역사적 지식과 역사적 의미가 있는 지식은 일종의 중립성이 있을 수 있지만 믿음의 지식은 중립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지식은 종교적 믿음이나 헌신이 들어올 때만이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음의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머문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하나의 역사적 정황만으로도 믿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경험에서도 역사적 지식이며 동시에 역사적 의미가 있는 지식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지식은 예수님의 죽음에 중요한 한 차원이 더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역사적 진술이 아니라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셨다는 역사적 진술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진술은 역사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진술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진술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이고 신학적 해설입니다. 역사가는 예수께서 죽으신 것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지만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검증하는 것은 역사가의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의 지식이 역사적 지식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앞의 두 지식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보수적인 이들이라도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었지만 이 세 번째 지식에 대해서는 멈춰 설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먼저는 역사적 지식이 아닌 것이 역사적 의미가 있는 지식이 될 수 있는가 이고 둘째는 사실로서의 역사가 아니면서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불트만이나 페린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복음주의 권 안에 있는 신학자나 목회자들 중에도 의미 있는 역사가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는 마치 기독교의 믿음을 건국 신화를 믿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를 믿는 믿음은 일반적 믿음, 즉 서술적 믿음이지만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규범적 믿음입니다. 규범적 믿음은 서술적인 일반 믿음처럼 비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으로부터 나올 수 없습니다. 불트만이나 페린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은 정통 기독교 믿음에 주관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정통 기독교가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과 설명을 인간이 알 수 있기 때문이지 역사적 지식이 믿음의 내용을 주는 원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페린의 의도는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극단적인 좌우의 생각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의 오른 쪽에는 역사적 지식의 필요를 강조하는 요아킴 예레미아 같은 사상가들이 있고 그의 좌편에는 칼 야스퍼스와 슈베르트 같은 사상가들이 있습니다. 오른 쪽에 있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믿음의 지식을 역사적 지식과 더 밀접하게 관련시키고, 좌편에 있는 사람들은 믿음의 지식과 역사적 지식을 구분하지 않으려 합니다. 불트만이나 페린은 자신들이 역사적 지식을 강조하다가 그 지식이 거짓임이 드러나게 될 경우 그에 따라 기독교의 믿음이 좌우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하면서 언제라도 수정될 수 있는 불완전한 역사를 계시와 동일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 역사적 지식이 거짓으로 드러나더라도 믿음의 지식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여 기독교를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훌륭한 기여를 했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주장처럼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이를테면 심리적 확신을 갖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한다면 성경이나 신학을 공부할 필요 없이 유능한 최면술사를 고용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에는 심리적 안정이 아닌 역사 안에서 본질적인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도 의심과 위험이 모두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역사와 믿음은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믿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역사가의 연구를 믿어야 하고, 역사가는 증인과 기록을 믿어야 하고, 증인들은 자신의 감각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고지식한 믿음은 아니지만 믿을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이성적 확실성 정도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알리 후버(Arlie J. Hoover)라는 분에 의하면 역사에는 두 얼굴이 있습니다. 하나는 객관적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적 얼굴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이 이중성 때문에 신비주의나 실증주의라는 두 극단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극단적 주관주의이고 실증주의는 지나친 객관주의입니다. 역사와 믿음은 다 같이 이성주의와 주관주의의 가장 좋은 요소를 서로 결합하여 손을 맞잡고 갑니다. 믿음과 역사 모두 지식과 소망 사이에 섬세한 균형을 만들어 냅니다. 또한 이성과 의지 사이에, 분석과 선택 사이에, 머리와 가슴 사이에, 논리와 자명함 사이에 친절한 긴장을 만들어 냅니다. 믿음은 확실성과 고지식함 사이에 있는 확신의 상태입니다. 이와 같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드러내시는 형태와 완전히 은폐하시는 형태 사이에 있는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보여 주신 계시가 올바르기 때문에 우리가 순전한 가슴과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지만 믿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역사가 불확실하고 우연적이며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역사적 지식의 필요조건이고 그 둘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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