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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허는 오스카, 벽을 쌓는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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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20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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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미국에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대부분의 한인들이 흥분되어 이구동성으로 외친 말. 언제? 바로 오스카 시상식이 벌어진 지난 9일 밤이었다.

오스카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 ‘기생충’이 영화 본고장 할리웃을 완벽하게 접수하자 감격적인 탄성이 한인사회를 뒤덮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카 각본상이 발표 되었을 때 한국영화 최초라니 감격이었다. 뒤이어 외국어 영화상도 받게 되니 더 놀라웠다.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감독상까지? 그럼 오스카 3관왕이라고? TV를 지켜보던 한인들은 1세, 2세, 3세할 것 없이 난리가 났다. 그런데 오스카 최고상이라 할 수 있는 작품상까지! 단박에 4관왕을 차지하며 오스카를 점령하자 한인들은 모두 까무러치는 눈치였다. 우리 아들이 감격해서 카톡축하 문자를 보내왔다. 노스캘로라이나에 사는 외숙모, 텍사스를 여행 중인 이모까지 우리 집 친척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스카 나잇이 아니라 그날은 ‘코리안 나잇’, ‘기생충의 날’이었다.

우리는 오스카 혹은 아카데미 영화상하면 모두 백인들이나 나눠먹는 상으로 알고 있었다. 그냥 구경꾼에 불과했다. 레드카펫이 어쩌고 어느 배우가 디자이너 누구의 옷을 걸치고 나왔느니 그런 것은 딴 세상 가십거리 정도로 알고 살아왔다.

그런데 끊임없이 시대의 요청을 경청해 온 오스카가 금년에는 확실하게 ‘백인·남성’으로 독식되던 종래의 이미지를 벗고 한국영화에 4관왕을 안겨주다니! 흑인과 다인종, 여성에게 야박하다고 비판을 받아왔던 오스카가 벽을 헐고 과감하게 변신을 시도한 영화축제였다.

우선 이번 시상식에선 지난해처럼 사회자가 따로 없었다. ‘힙합황제’, ‘랩의 신’이라 불리는 래퍼 에미넴이 바지가 흘러내려 팬츠를 훤히 내보이며 정신없이 노래하는 모습도 고급드레스와 나비넥타이로 존엄을 과시하는 오스카 무대에 도발적으로 등장했다. 역시 벽을 허무는 모습이었다. 특별히 기독교적 가치를 배경으로 제작된 ‘브레이크스루’나 ‘해리엣 터브먼’이 후보작으로 오른 것도 그랬다. ‘두 교황’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란 실존인물을 연기한 조나단 프라이스가 남우주연상 후보가 된 것도 그래 보였다.

그러나 ‘기생충’에게 작품상까지 안겨준 것은 오스카의 높은 벽을 과감하게 헐어버리는 할리웃 영화사의 새 역사였다. 시상식 마지막 작품상 수상작을 발표하던 여배우 제인 폰다의 얼굴에서 “어찌 이런 일이?”라는 놀랍고 씁쓸한 반응이 바로 영화 본고장의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스카는 유색인종, 한국영화, 비영어권이란 높은 벽을 과감하게 헐어버리고 기생충을 선택한 것이다.

오스카가 벽을 헐고 있다면 지난주 워싱턴에서는 계속 높은 벽을 쌓아 올려 이 나라를 갈라놓고 있었다. 대통령의 연두교서하면 정치에 관심 없는 일반국민들도 그날만큼은 우리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나보자 눈 여겨 보는 날이다. 그런데 지난 4일 트럼프 대통령은 의사당에서 열린 연두교서를 시작하면서 뒤에 앉은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가 내민 악수를 기분 나쁘다는 듯 외면해 버렸다. 국정연설이 끝나자 낸시 펠로시는 이에 보복이라도 하듯 트럼프의 연설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트럼프 입장에선 자신의 탄핵을 주도한 펠로시가 미워도 한참 미웠을 것이다. 그래도 악수를 거절한 것은 대통령의 품격에 맞지 않는다. 국정연설에서 트럼프가 알맹이는 모두 빼고 자신의 치적자랑으로 재선성공을 위한 리얼리티 쇼를 벌였다고 하자. 그래도 전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연설문을 찢어 버린 행동은 폭력적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미국인들은 모두 허탈감에 빠졌을 것이다. 워싱턴 정치가 저렇게 높은 벽을 쌓고 으르렁대고 있으니 ‘아메리카 퍼스트’고 나발이고 정치에 희망을 걸고 살기엔 날 샌 것 아니냐는 절망감이었다.

그런데 연두교서가 끝나고 며칠 후에 워싱턴DC 힐튼호텔에선 제68차 연례국가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트럼프와 낸시 펠로시는 설교자인 하버드대학교 아서 브룩스(Arthur Brooks) 교수의 설교를 듣고 아마 침을 맞을 때처럼 가슴이 꼭꼭 찔렸을 것이다.

브룩스 교수는 “오늘 미국의 위기는 경멸과 분노의 사회 양극화”라고 한탄하면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원수를 포용하거나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여러분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반쪽으로 벽을 쌓고 있는 모두에게 아픈 도전이었다.

워싱턴이 지금처럼 원수처럼 으르렁대던 때가 있었던가? 오바마나 부시, 클린턴 등 역대 어느 대통령 때도 민주, 공화 양당이 이렇게 벽을 쌓고 분노와 경멸의 언어로 상대를 저주한 적이 있었는가? TV를 켜도 폭스는 폭스대로 민주당을 헐뜯기 바쁘고, CNN이나 MSNBC는 이들대로 트럼프와 공화당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오스카 무대에서 네 번째 트로피를 안고 소감에 나선 봉준호는 함께 작품상 후보에 오른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을 지목하면서 “영화를 공부하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란 저 분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공부했는데 함께 후보에 오른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말하자 관객들은 일제히 일어나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텍사스 전기톱으로 트로피를 5개로 잘라 후보 모든 분들과 나누고 싶다는 말에 관객들은 더 큰 감동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도대체 오스카에는 있는 이 감동이 왜 워싱턴 정치판에는 실종되었단 말인가? 금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지만 찍을 자가 없어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를 대선후보들은 알고나 있을까?

조명환 목사(발행인)
ⓒ 크리스천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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