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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때에 노아 언약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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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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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인류 문명이 고도로 발전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지나치리만치 편리와 풍요를 누리면서, 좋은 일이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재난이 닥치지나 않을까 막연하게 두려워하는 것처럼 21세기는 환경 재난에 따른 생명 위기의 순간이 오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의 그러한 두려움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은 종말론적 환경음모론입니다. 환경음모론은 마치 시한부종말론처럼 인간의 환경 파괴로 말미암아 머지않아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지나친 개발과 그에 따른 자원 낭비가 환경을 오염시키고 어느 정도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기의 온도가 점점 올라가 북극의 얼음이 다 녹고 해수면의 온도가 높아지므로 이상 기후를 일으켜 낮은 지대가 침수된다거나 빙하기가 온다고 하는 것은 믿을만한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주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한부 종말론 자들의 세상 끝 날에 대한 예언이 빗나가듯이 환경음모론 자들의 지구 종말에 대한 예언도 거의 모두 빗나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예언이 맞지 않으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또 다른 종말을 예언하여 사람들이 공포심을 갖게 합니다. 인류는 대 지진이나 큰 홍수나 화산폭발 같은 자연재해를 겪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어서 근거 없는 환경음모론에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지구와 자연의 질서는 환경오염에 의해서 그렇게 쉽게 파괴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며 자원을 아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자연 질서의 파괴나 지구의 종말은 함부로 주장해도 안 되고 쉽게 믿어도 안 됩니다.

인간이 누리는 거의 모든 자원은 자연 환경에서 얻습니다. 지나친 개발이 자원을 고갈시키고 자연은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보복으로 생태계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지적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수적 환경주의는 그러한 문제를 과학기술로 해결하려고 하고, 진보적 생태주의는 산업문명을 환경 파괴의 뿌리라고 지적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에 근거한 문명 전환을 도모합니다. 환경주의자들 중에는 아시아의 생태 친화적 자연관과 가치관 또는 문화적 양태에 관심을 쏟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시아의 자연관이 서구에 비해 생태 친화적이라고 보는 것도 그렇게 폭 넓은 지지를 받는 주장은 아닙니다. 심지어 백두대간을 자연 친화적이라고 보고 태백산맥을 자연 착취적이라고 하는 주장은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개발이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는 주장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상당부분 사실이 아닙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땅은 당연히 오염되지 않았지만 저개발 국가와 산업과 문명이 발전한 나라를 비교하면 저개발 국가보다 문명국의 자연 환경이 더 잘 보호되고 또한 관리 되고 있습니다. 이상적 환경주의자들은 자연과 양립 가능한 새 문명의 패러다임을 주된 연구 내용으로 삼지만 현실적으로 환경운동은 순수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새로운 문명 전환의 패러다임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환경운동가들의 주장이 룻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라면 나는 반대합니다. 나는 룻소의 주장도 반대하지만 무엇보다 룻소가 살았던 삶의 여정에 어느 부분에도 지지를 보낼 수 없습니다. 한 번도 자기가 맡은 일을 책임을 다하여 성실하게 해 본 적이 없었던 그가 전통적 제도와 가치를 비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묵었던 여관 하녀와 즐기기 위해 사귀다가 동거를 시작하여 결혼하지 않고 23년을 살면서 다섯 아이들을 낳았지만 모두 고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던 그가 모든 전통과 보편 가치를 부정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을 잘 이해하지 못한 무지나 반발에서 비롯된 주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당대 최고 지성인 볼테르는 루소의 사상을 '거지의 철학'이라고 평가하고 '이 책을 읽고 네 발로 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며 비꼬았습니다. 게다가 루소는 프랑스 노래를 '쉴 새 없는 개 짖는 소리'라고 비난하여 프랑스 전체 음악계가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성과 학문과 문명은 인류를 불평등과 부정 속으로 타락시킨 원인이라고 하여 타락 전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것인데, 그가 성경을 제대로 공부했다면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라고 외쳤어야 할 것입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창조된 것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연을 관리하고 개발하고 보호하라고 하신 것은 인간이 자연을 잘 다스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리도록 하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자연 질서를 보장하시는 토대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연을 다스리도록 권한이 주어졌지만 또한 인간이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자연 질서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 자체 때문이 아니라 자연 질서가 하나님의 절대 통치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이 과학의 원리를 이용하여 온갖 것을 개발하지만 과학의 원리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고 지배하지만 자연의 질서를 만들거나 다스리거나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생존에 편리를 위해 문명을 발전시키고 문화를 구축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고 이성이나 학문이나 문명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전혀 성격적이지 않습니다. 문명을 발전시키는 인간 이성의 능력이 아무리 위대하여도 자연 질서 보장이라는 인프라가 없으면 불가능하고 인간이 이미 이룩해 놓은 위대한 업적도 자연 질서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위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언약 신앙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홍수 후에 일어난 노아 계시에서 나타나는 원리들은 구속의 시행과 직접적인 관련이 아니라 간접적 관련을 갖습니다. 노아 전까지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셈 족속에서만 시행되어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노아 언약에서 드러난 것은 그 언약이 인류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과 땅, 즉 자연까지도 포함된 언약이라는 사실입니다. 언약이 자연과 맺은 언약이라는 사실은 언약의 증표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지개는 우주적으로 적용되는 하나의 자연 현상입니다. 구속과 연관 된 표증들은 모두가 성례적으로 쪼개어 피를 내는 표증들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노아의 계시를 세 단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하나님의 독백 형식으로 진술되었습니다. 창세기 8:21,22에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자연 질서가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땅이 있을 동안에는”라는 단서가 붙어있습니다. 21절에서는 하나님의 선언에 대한 동기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홍수 이전인 창세기 6:5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와 거의 동일한 말씀을 하시면서 그것을 심판이 반드시 있어야 할 이유로 제시하셨습니다. 심판의 불가피성의 이유가 다시 심판이 반복되지 않을 이유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사람들이“어려서부터”악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6:5에서는 인간이 부패로 치닫는 과정이 역사적으로 절정에 이르러서 심판이 불가피했다는 것이고, 창세기 8:21절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본성적으로 악한 상태라는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이 너무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심판으로도 치료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심판을 내리지 않고 참으시는 계획을 가능하게 하고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제정되는 규례들이 제시됩니다. 이 규례들은 사람과 동물 모두에게 해당되는 번식과 생명 보호와 유지에 관한 것들입니다. 짐승으로부터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창조 시에는 짐승들이 자발적으로 인간에게 복종하였으나 죄의 상태에서는 동물들에게 두려움을 주어 사람에게 굴복하게 하셨고, 사람도 짐승을 마치 야생의 짐승들처럼 먹어서는 안 된다고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동물을 음식으로 허용하셨지만 육식의 야생 동물처럼 살아 있는 동물을 먹는 것은 생명의 신성함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규례는 레위기의 제사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짐승의 생명이라도 존중해야 하는 것은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물의 생명에 대한 이 같은 규례는 사람의 생명을 사람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규례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창 9:5). 이러한 규례들은 오늘 날 문제가 되고 있는 사형 제정의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이들은 살인자에게 사형을 가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 없다고 하지만 성경은 그 근거를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 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형 제도의 최종적 정당성은 살인을 억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셋째 단계는 그 새 질서가 언약의 형식으로 확인되는 과정을 진술(창 9:8-17)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하신 약속에다 엄숙한 표증을 덧붙이심으로써 그 약속에 일종의 언약의 형태를 부여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그 질서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의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레미야 33:25은 이런 의미에서 주야와 맺은, 즉 낮과 밤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4:9의 경우는 노아의 언약이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영속 될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형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노아에게 주신 약속은 땅에 종말을 가져올 그 종말의 위기가 오기까지만 적용됩니다. 마지막의 대 재난이 올 때에는 자연 질서가 혼란하게 되어 산이 갈라지고 언덕이 사라지겠지만, 그때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고, 평화의 언약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지개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 무지개를 보고 그 표증의 언약을 기억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노아의 언약에는 자연 질서가 불변할 것이라는 약속이 들어 있고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구속의 언약을 보증하는 표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지난겨울 심하게 춥지 않아서 텃밭의 여러 종류의 채소들이 살아서 겨울을 났습니다. 그 잎들을 뜯어 몇 번이나 쌈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텃밭을 정리하면서 온갖 생명들이 힘차게 활동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자연의 질서와 원리가 정직하고 질서 있게 작동하고 있음을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느낍니다. 세상은 온통 코로나바이러스로 두려움과 고통을 겪으며 혼란이 심화되고 있는데 자연은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평화롭게 질서를 따라 작동하는 자연의 생명들을 보면서 이 재난의 코로나바이러스를 생각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지만 이 재난이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연의 평화로운 생명들을 관찰하면서 이 평화롭고 정연한 질서가 단순한 자연 질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보증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만큼이나 예측을 불허하고 파괴적이고 거짓되고 폭력적인 정부나 집단이나 개인들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지만 그 어떤 재난이나 폭력도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할 수 없음을 우리는 확신하고 안심하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합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 “이는 내게 노아의 홍수와 같도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사54:9)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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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ㅂㄷㄱ님의 댓글

ㅂㄷㄱ

이분은 글이 다 비슷해요. 이것저것 아는거 어려운 말 써가면서 늘어놓은 후에 끝부분에 (때로는 중간에) 정부 욕을 슬쩍 끼워넣는거지요. 오늘도 CTRL+F 누르고 "정부"를 찾아보니까, 이 글의 핵심(?)인 이 문장이 나오네요.
"코로나바이러스 만큼이나 예측을 불허하고 파괴적이고 거짓되고 폭력적인 정부나 집단이나 개인들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지만..."
이분 글은 다 읽을 필요도 없고 "정부"만 찾으시면 되요. 그게 글을 쓰시는 목적이고 요점입니다. ㅎㅎㅎ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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