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이 확인해 준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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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0-04-2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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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차를 몰고 달릴 때 가능하면 큰 트럭 옆에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작은 차를 몰고 큰 트럭 가까이 가서 얻을 유익이 없습니다. 큰 트럭은 추월을 하든지 아니면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게 상책입니다. 미국의 파크웨이에는 트럭이 안 다니니까 그런 일이 없지만 고속도로나 일반도로에서는 대형트럭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국제 관계에서 미국은 다른 모든 나라에게 등치 큰 트럭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제 관계에서 각 나라가 보편 가치보다 실리를 챙기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국가란 인격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도덕이나 정의나 책임 같은 것은 명분에 지나지 않고, 각 나라의 자국을 위한 정책은 다른 나라에 피해를 주어도 자기 나라에게는 애국이 되는 것입니다. 인격적 존재가 아닌 국가들의 관계에서 도덕이나 정의나 법이나 체면 같은 것은 사실상 명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명분에 지나지 않는 국제 관계에서의 국가들의 노력이라도 지나치거나 노골적으로 보편 가치를 무시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부정의와 비도덕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국제관계에서는 그 수준에서 만족해야 하고 실현 불가능한 도덕적 이상에 집착하면 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를 비롯한 모든 인간 집단 안에는 힘이 정의로 통하는 경향이 있지만 국제 사회는 힘이 곧 정의로 통용되는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국제기구는 국가들이 전쟁을 통하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가 주장하는 것이 부당해도 어쩔 수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 나라는 국제관계에서 가능한 손해를 줄이고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북한처럼 강대국을 무시하며 늘 강수를 두는 것은 그들에게 선택의 폭이 좁기 때문입니다. 북한이라는 나라가 좀 열린사회라면 그렇게 강수를 둘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닫힌 사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기에는 약점이 너무 많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언제나 극단적인 말이나 행동을 취하는 것은 자기의 약점을 감추기 위함입니다.
대한민국은 역사와 지리적인 이유와 조건 때문에 미국의 보호를 받게 됐고, 미국과의 동맹관계에서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많습니다. 미국이 더 너그럽게 대한민국을 배려해 주면 좋겠지만 지나친 기대를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성경 말씀처럼 비둘기처럼 순결 할 수는 없고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러시아나 중국이나 일본이 대한민국을 집어삼키지 못하게 한 것도 따지고 보면 미국입니다. 한반도의 주변 강대국들은 언제나 대한민국을 차지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지만 미국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지도자나 국민이 이러한 현실을 염두에 두고 늘 처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미국에게 지나치게 비굴하게 처신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국도 미국의 필요와 이익 때문에 대한민국과 동맹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과 미국이 동맹관계라는 것은 대한민국에게는 그 어떤 조건보다 큰 이익입니다.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대한민국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 대한민국에게는 계산할 수 없는 안보와 경제의 인프라가 되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는 언제나 그것을 냉정하게 인정하는 전제에서 대응해야 그 수준에서 상생하고 윈윈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그러한 의도는 인간을 매우 기분 나쁘고 자존심이 상하게 합니다. 인간의 창조 목적이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인간은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할 수도 없는 존재란 말인가 라는 불만을 제기하게 됩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아이러니이고 영적으로는 신비로운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 가운데 인간을 위한 최고의 가치와 행복을 넣어두셨습니다.
약한 나라가 자존심 상해가며 강대국의 비위를 맞추는 외교를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안보와 경제의 보장이 되는 것과 같이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의 최고의 가치와 행복이라는 사실은 외적 프레임이 비슷합니다. 다만 강대국은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반면에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도 전혀 기분 나쁘거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존재의 차이를 비교하여 생각할 때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정해진 것은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이고 특권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 인간의 삶은 은혜와 특권을 거부하는 불행한 것입니다. 임금의 신하가 되는 것이나 대통령의 비서가 되는 것이 특권이라면 인간이 하나님의 종과 자녀가 된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이 큰 은혜요 특권이며 영예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인데, 이 약속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그 약속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 보장된다는 점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임마누엘의 약속을 받고서도 그 약속에 대해 의심하고 염려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극심한 고통가운데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대하고 바라던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의를 위해 살다가 핍박을 받으면 임마누엘의 약속을 의심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신의 불완전함과 무능과 허물을 생각하며 임마누엘의 약속이 취소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허물이나 불완전함 때문에 취소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표현이 무려 104번이나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을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드러내시지 않으시고 말씀과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과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계시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을 통하여서도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필요할 때만 찾아오셔서 그의 백성을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 가운데서 언제나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인격적 관계란 곧 사랑의 관계이고 사랑의 관계에서는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창제기 21장 22절에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전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였다가 하나님께 혼이 난 경험이 있습니다. 온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뻔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브라함이 그를 위하여 기도를 해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21장 22절이, 아브라함의 가정이 이스마엘로 인하여 발생한 가정불화 사건에 대한 기록과 연결되어 기록되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서 아브라함이 아내의 말을 듣고 첩을 들인 일과 첩 하갈이 임신하여 사라를 무시한 일,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일 등 지금까지 누적되어 온 갈등들이 폭발하여 첩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는 일련의 사건들을 아비멜렉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보기에 아브라함은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좋은 사람도 아닙니다. 아비멜렉은 이미 전에 아브라함의 거짓말 때문에 그의 아내를 취하는 잘못을 저지를 뻔 한 경험을 하였고 아브라함이 오갈 데 없는 첩과 서자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는 것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오래 전에 애굽에 내려가서도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 하여 바로 왕을 속인 경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이 어느 날 갑자기 그의 군대장관 비골을 대동하고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한 것이 아닙니다. 아비멜렉은 오랫동안 아브라함을 지켜보아온 사실은 그가 아브라함에게 찾아 와서 한 말 가운데 암시되어 있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이 말은 그가 아브라함이 하는 무슨 일이든지 다 지켜보았다는 의미입니다.
두 나라 관계에서 먼저 화친을 청하는 일은 대게 약한 나라가 하는 일입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관계에서 강자는 아비멜렉입니다. 아비멜렉은 그랄 지방의 블레셋 족속의 강력한 통치자였습니다. 그러한 아비멜렉이 먼저 아브라함 찾아와서 화친을 맺자고 제안한 이유가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지켜 본 결과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하나님이 그의 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한 국가라도 감당할 수 없는 분이라고 본 것은 분명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브라함 함께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브라함과 화친 조약을 맺는 것이 화를 예방하는 최선책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가 이런 제안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든지”입니다.
대게 신들은 권선징악의 신으로서 선을 행하는 자를 돕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하여 아비멜렉이 놀라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선하거나 악한 것의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이방인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을 더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임마누엘 약속은 인간의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아비멜렉은 그 사실을 너무도 인상 깊게 목격하였습니다. 아비멜렉이 생각하기에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벌을 내리실 법도 한데 아브라함이 하는 행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를 돕더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베멜렉은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약자의 편에서 화친을 청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거짓과 불의를 정당화 하거나 무시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정직하고 선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약속이 유효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직하고 선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마땅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구원은 받아 놓은 보증 수표처럼 생각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악한 말과 거짓을 일삼는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증거일 수도 있음을 두렵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구원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은 사람은 임마누엘의 약속이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좌우 되는 것이 아님을 인하여 감사해야 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정직하게 행하고 거짓과 불의와 폭력을 피하며 경건과 구원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든지 그와 함께 하는 것을 본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화친 조약 체결을 요청하면서 요구한 사항이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고 한 것이 너무도 의미심장합니다.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창 21:22,2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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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ㄷㄱ님의 댓글
ㅂㄷㄱ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