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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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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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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우리가 예수를 믿어 받은 구원을 은혜라고 하는데, 이 은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법률적 관계에서 은혜의 관계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법률적 관계는 행한 만큼 상이나 벌을 받는 관계입니다. 상을 받으려면 합법적 행동을 해야 하고 불법을 행하면 벌을 받습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상 받기 싫고 벌 받아도 괜찮다면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그만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관계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은혜의 관계는 다른 말로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 사랑의 관계에서는 “내가 나쁜 짓 하고 내가 벌 받으면 될게 아니냐.”는 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이 공부 안 하고 인터넷 게임만 하고 친구랑 문자 메시자나 주고받으면서 놀기만 하다가 부모가 꾸중한다고 “대학 안 가면 될게 아냐”라고 한다면 “아, 그래, 까짓것 대학 가기 싫으면 공부하지 마라.”라고 할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부모는 그런 자식에 대해 “너 죽고 나죽자! 살아서 뭐 하냐, 차라리 너 죽고 나 죽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관계가 법률적 관계보다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괴로운 관계입니다. 부모 자식 관계, 부부 관계,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가 그런 사랑의 관계입니다. 남 같으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지만 사랑의 관계에서는 말할 수 없는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부부간이나 부모 자식 간에는 아주 사소한 문제로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부부관계에서나 부모 자식 관계에서 서로가 부족하고 모자라고 무식하고 성질이 고약하기 때문에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전혀 문제 되지 않을 사소한 문제로 다투게 되는 것은 그 관계가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부부나 부모 자식 관계에서만큼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고 위하는 관계도 없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어떤 면에서 가장 편한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는 격식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편합니다. 격식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서로가 서로의 장점과 약점을 다 알기 때문에 잘난 체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귀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기진한 몸 텅 빈 가슴으로/ 돌아와 문을 열면/ 부스스 잠 깨어/ 강아지들처럼 기어 나오는/ 아이들을 보고야 텅 빈 가슴이/ 출렁 채워집니다.”가족은 존재 하는 것 자체로 서로의 빈 가슴을 채워주고 기진하여 쓰러질 것 같이 지친 몸과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가족끼리 기 싸움을 하고 긴장 관계 가운데 사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결혼 선배가 후배에게 하는 충고 중에 가장 무식하고 독이 되는 충고가 “여자는 처음부터 잡아야 한다.”거나 “남자는 처음부터 길을 잘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충고를 듣고 서로가 상대를 잡으려 하다가 그 부담을 한평생 안고 고생하며 사는 부부도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를 잡으려고 하는 것은 바위를 걷어차는 것과 같고 누워서 침 뱉기와 같은 것입니다. 서로를 제압하려고 머리를 굴리고 힘쓰는 만큼 그 부담과 고통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 모두를 불행하게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길들이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기도를 강조하는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도 길들이기 나름이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망령되고 참람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조종하면 꼼짝하지 못하고 요구를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인간이 신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상종교의 특징입니다. 기독교인이 하나님 우상을 섬길 위험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이 조종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반대편에는 하나님의 뜻은 절대 불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뜻을 돌이키지 않으시는 불변의 신이 아닙니다.

희랍의 신은 절대 불변의 신이고 기독교의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불변의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분히 희랍 철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은 불변의 하나님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베푸시는 방법까지 불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기로 결정하셨다가도 우리가 매달려 기도하면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선지자 요나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시려고 하시다가 니느웨가 회개하자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그러한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욘 4:1-4).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너무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가 크신 분이라서 심판하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셨다가 뜻을 돌이켜 심판을 거두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그러한 점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자기에게는 그런 하나님이 좋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런 하나님이 되시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보여줍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곳에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언제나 서로가 망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던 중 한 편 사람이 하나님께 소원을 들어달라고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상대방을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조건은 내가 너에게 해 주는 것의 갑절을 네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해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만약에 자기가 하나님께 백만 불을 달라고 구하면 주실 테지만 그렇게 되면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이백만 불을 주실 테니 그것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하고 머리를 굴러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중대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가 한 결심은 하나님께 자기의 한 쪽 눈을 빼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는 그 결과를 생각하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상대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면 자기 눈 하나를 잃게 되는 것까지를 감수하고 기뻐하는 것이 인간의 못된 심사라는 것을 지적하는 유머입니다.

인간이 하는 고민을 잘 분석해 보면 이런 경향의 고민이 많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잘되기를 바라는 욕망보다 보다 남이 망하게 되는 것을 바라는 욕망이 더 크다고 합니다. 자기의 한쪽 눈을 뽑는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상대방의 양쪽 눈을 뺄 수만 있다면 행복하겠다는 것이 인간입니다. 요나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원수인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랐습니다. 우리가 요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그 어떤 보장도 없습니다. 요나서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하여 너무도 중요한 진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창세기 18장에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 받아 망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도시들을 심판 하시려는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십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그 같은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기 위해 그가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에 호소합니다. 그 도시에 몇 명의 의인이라도 있다면 도시 전체를 멸망시키는 것은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어필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심판을 유예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의인 50명에서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으로 여섯 차례나 제시하며 간청을 하였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 도시에 의인 다섯 명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멸망을 면하게 해 주셨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대화를 유의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소돔 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에 대하여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나누는 대화는 너무나 인상 깊은 장면입니다. 마치 마음이 넓은 아버지와 사랑스러운 아들이 진지하게 나누는 대화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말씀하신 이유를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 두 도시를 심판하시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리신 이유는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는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서로 나누며 부담이나 기쁨을 함께 하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가를 보여줍니다. 그 사랑의 관계가 모든 인간관계의 모델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위대한 중재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대게 좋은 집안에서는 모든 일을 온 가족이 함께 의논합니다. 하지만 가족 관계가 좋지 않은 집안에서는 가족끼리 서로에게 일어나는 일을 서로에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고 그로 인해 오해와 싸움이 쉽게 발생합니다. 나와 아주 가까운 한 소꿉친구 가족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어쩌다가 그 친구 집에 놀러 가게 되면 식사 시간 내내 온 식구가 단 한 마디의 대화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분위기가 마치 무슨 원한이라도 맺힌 사람들처럼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만 흐릅니다. 모든 식구가 묵묵히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어쩌다가 아버지가 꾸중을 해도 꾸중이 끝나기 전에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아내는 남편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습니다. 남편도 아내가 하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자식에 관한 문제를 친구인 나에게 물어보곤 하였습니다. 이런 좋지 못한 습관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반영이 됩니다. 사람들과는 온갖 이야기를 다하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하면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깊이 상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전 13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롬 3장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를 나타내시는 방법은 죄인을 죄 지은대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길이 참으시는 중에 사람들이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한 것은 인간이 행해야 할 사랑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 25장에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대한 묘사에서 오른 편에 있는 자들과 왼 편에 있는 자들에게 각각 복과 저주가 선포 될 때 양 편에 있는 자들 모두의 반응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복 받을 자들은 선한 일을 하였고 저주를 받을 자들은 저주 받을 일을 하였는데 그들 모두가 자기들이 하는 일이 선하거나 악한 것인 줄을 모르고 행했다고 하였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자기가 행하는 것이 악인 줄 알지 못하고 하였고, 사랑을 행한 자들도 자기들이 한 행동이 사랑인 줄을 알지 못하고 행했습니다. 가족은 사랑의 관계이고 가족이 가족을 위해 행하는 일은 사랑을 하고 있다는 의식 없이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은 악을 악인 줄 알지 못하고 행하지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전제 된 사람은 위대한 일도 위대한 일을 한다는 의식 없이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cf. 마 25:34-40)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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