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해 종을 울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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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희ㆍ2020-05-2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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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이발을 한지 2달이 넘었다. 이제는 덥수룩한 더벅머리 목사가 되어 버렸다. 더욱이 나는 흰머리가 많아 보통 2주에 한 번씩 염색을 하고 지내왔는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내 머리로 올라왔는지 2달여 염색을 안하고 보니 졸지에 흰머리 할아버지가 되어 버렸다. 그뿐만 아니다, 난 특별히 구레나룻 수염이 많아 매일 면도를 해야 했다. 그 면도는 매일 아침에 세수를 하는 것과 같은 나의 일일 행사이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집에 머물게 만들면서 수염도 잘 깍지 않는 목사가 되었다.
어느 날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영락없는 산적 두목이 되어버린 것이다. 덥수룩한 머리, 하염없이 자란 수염, 그리고 흰머리가 2달 전 강대상에 섰던 목사가 아니다. 변해도 너무 확 변해버렸다. 그런 변한 모습에 마스크를 쓰고 모자까지 눌러 쓰고 다니니 누가 나를 알아보겠는가? 교회가 문을 닫고 설교를 녹음 파일로 교인들에게 보내다보니 교인들 앞에 나설 일이 없어진 이후 나의 모습이다.
흰머리에 덥수룩한 나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일까 뭔가 좀 자유스런 그런 느낌이 든다. 어쩌면 2달 전까지 남에게 보여주는 이런 스타일에서 벗어나 나만이 갖는 나의 진짜 모습을 가진 것같은 느낌 때문에 자유자가 된 것 같다는 의미다. 그렇다! 머리가 길어졌다고 나라는 존재가 변한 게 아니라 어쩌면 다듬지 않은 지금의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고, 머리가 하얗게 쉰 할아버지의 모습이 진짜 내 얼굴이고, 구레나룻 수염을 가진 내가 진짜 내 모습이기에 자유스러운 것 아닌가 본다. 하지만 이런 나의 모습이 거울을 들여다 볼 때면 뭔가 익숙하지가 않다.
어쩌면 매일 면도를 하고, 이발을 하고, 염색을 하고 얼굴에 스킨로션을 바르고, 조금이라도 멋을 내려고 고급 안경을 쓰고, 멋진 넥타이에 명품 양복을 입고 교회로 거리로 활보하면서 오랜 세월 살다 보니 이제는 당연히 그렇게 염색을 하고, 당연히 면도를 해야 하는 목사로 각인되었으니, 지금에 나의 모습이야 나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난 나라는 존재를 감추고 살고 있었던 나에게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과의 만남을 중지시키면서 새삼스럽게 나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나게 해 준 것이다.
목사는 누구를 위해 사는 사람인가? 제목같이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면서 살아왔나? 나를 위해서 사는 존재인가 남을 위해 사는 존재인가? 물론 해답은 성경이 나와 있다.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사는 존재가 목사다.
그래서 매주일 말씀에 종소리를 울린다. 성도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보니 가장 좋은 말로 좋은 예화로 말씀을 합리적으로 논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설교가 성도들만 위한 말씀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나를 위한 말씀인 것을 목사들은 잘 안다. 그런 의미에서 외모가 깨끗한 모습이 타인을 위한 모습이도 하고 또 나를 위한 모습도 내재되어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양면성이 있는 외모와 내면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오랜 세월 주일이 되면 더욱 외모에 신경을 쓰고 머리와 수염을 잘 다듬고 관리하여 누가 봐도 거룩한 모습을 가지고 목회를 해 왔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그런 나의 모습이 다 깨져버린 것이다.
2달이 지나도록 집안에서만 있는 나는 별로 외모에 신경 안 쓰면서 본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산다. 이유가 간단하다. 아내 외에 누가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수염 기르면 어떠냐고... 보는 사람 없는데, 머리가 덥수룩하면 어떠냐고.. 누가 본다고, 옷을 뭘 입든 무슨 상관이야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런데 문득, 익숙하지 않은 덥수룩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보실까 의문이 든다. 타인들 앞에서는 깨끗한 모습으로, 나 자신 앞에서는 너저분해도 된다는 인식?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아중적인 나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보여진 것은 얼마 전이다.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가 보는 사람 없다고 본래의 내 모습 그대로 자유스럽게 산다면 모두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나를 보는 사람 때문에 내 존재를 알고 내가 남을 봄으로써 내 존재가 보여지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우리가 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비춰져서 나라는 존재가 확인이 되고 나또한 다른 사람에게 비춰져서 다른 사람이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 이 세상사 아니던가.
나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빅토르 프랭클 박사가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먼저 온 사람이 충고한다. “살고 싶으면 매일 면도를 해라.” 아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왜 면도를 하나? 그 이유는 면도를 안 한 사람은 이미 삶의 가치를 포기한 사람으로 알고 가스실로 보내버린다는 것이다.
오늘 나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깨끗하게 면도를 하고 다시 염색을 하고 머리도 깎고 단정하게 거울 앞에 서서 오늘 하루를 준비한다. 외모가 깨끗해져서일까 내면도 깨끗해진 것 같아 하나님 앞에서 서서 묻는다. “하나님 오늘 제 모습 어때요, 괜찮죠!”
그를(다윗)을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어라.(사무엘상16:12)
한준희 목사(뉴욕성원장로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어느 날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영락없는 산적 두목이 되어버린 것이다. 덥수룩한 머리, 하염없이 자란 수염, 그리고 흰머리가 2달 전 강대상에 섰던 목사가 아니다. 변해도 너무 확 변해버렸다. 그런 변한 모습에 마스크를 쓰고 모자까지 눌러 쓰고 다니니 누가 나를 알아보겠는가? 교회가 문을 닫고 설교를 녹음 파일로 교인들에게 보내다보니 교인들 앞에 나설 일이 없어진 이후 나의 모습이다.
흰머리에 덥수룩한 나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일까 뭔가 좀 자유스런 그런 느낌이 든다. 어쩌면 2달 전까지 남에게 보여주는 이런 스타일에서 벗어나 나만이 갖는 나의 진짜 모습을 가진 것같은 느낌 때문에 자유자가 된 것 같다는 의미다. 그렇다! 머리가 길어졌다고 나라는 존재가 변한 게 아니라 어쩌면 다듬지 않은 지금의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고, 머리가 하얗게 쉰 할아버지의 모습이 진짜 내 얼굴이고, 구레나룻 수염을 가진 내가 진짜 내 모습이기에 자유스러운 것 아닌가 본다. 하지만 이런 나의 모습이 거울을 들여다 볼 때면 뭔가 익숙하지가 않다.
어쩌면 매일 면도를 하고, 이발을 하고, 염색을 하고 얼굴에 스킨로션을 바르고, 조금이라도 멋을 내려고 고급 안경을 쓰고, 멋진 넥타이에 명품 양복을 입고 교회로 거리로 활보하면서 오랜 세월 살다 보니 이제는 당연히 그렇게 염색을 하고, 당연히 면도를 해야 하는 목사로 각인되었으니, 지금에 나의 모습이야 나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난 나라는 존재를 감추고 살고 있었던 나에게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과의 만남을 중지시키면서 새삼스럽게 나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나게 해 준 것이다.
목사는 누구를 위해 사는 사람인가? 제목같이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면서 살아왔나? 나를 위해서 사는 존재인가 남을 위해 사는 존재인가? 물론 해답은 성경이 나와 있다.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사는 존재가 목사다.
그래서 매주일 말씀에 종소리를 울린다. 성도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보니 가장 좋은 말로 좋은 예화로 말씀을 합리적으로 논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설교가 성도들만 위한 말씀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나를 위한 말씀인 것을 목사들은 잘 안다. 그런 의미에서 외모가 깨끗한 모습이 타인을 위한 모습이도 하고 또 나를 위한 모습도 내재되어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양면성이 있는 외모와 내면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오랜 세월 주일이 되면 더욱 외모에 신경을 쓰고 머리와 수염을 잘 다듬고 관리하여 누가 봐도 거룩한 모습을 가지고 목회를 해 왔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그런 나의 모습이 다 깨져버린 것이다.
2달이 지나도록 집안에서만 있는 나는 별로 외모에 신경 안 쓰면서 본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산다. 이유가 간단하다. 아내 외에 누가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수염 기르면 어떠냐고... 보는 사람 없는데, 머리가 덥수룩하면 어떠냐고.. 누가 본다고, 옷을 뭘 입든 무슨 상관이야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런데 문득, 익숙하지 않은 덥수룩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보실까 의문이 든다. 타인들 앞에서는 깨끗한 모습으로, 나 자신 앞에서는 너저분해도 된다는 인식?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아중적인 나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보여진 것은 얼마 전이다.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가 보는 사람 없다고 본래의 내 모습 그대로 자유스럽게 산다면 모두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나를 보는 사람 때문에 내 존재를 알고 내가 남을 봄으로써 내 존재가 보여지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우리가 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비춰져서 나라는 존재가 확인이 되고 나또한 다른 사람에게 비춰져서 다른 사람이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 이 세상사 아니던가.
나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빅토르 프랭클 박사가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먼저 온 사람이 충고한다. “살고 싶으면 매일 면도를 해라.” 아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왜 면도를 하나? 그 이유는 면도를 안 한 사람은 이미 삶의 가치를 포기한 사람으로 알고 가스실로 보내버린다는 것이다.
오늘 나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깨끗하게 면도를 하고 다시 염색을 하고 머리도 깎고 단정하게 거울 앞에 서서 오늘 하루를 준비한다. 외모가 깨끗해져서일까 내면도 깨끗해진 것 같아 하나님 앞에서 서서 묻는다. “하나님 오늘 제 모습 어때요, 괜찮죠!”
그를(다윗)을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어라.(사무엘상16:12)
한준희 목사(뉴욕성원장로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댓글목록
Kate님의 댓글
Kate
학교다닐때 어떤 성형외과 교수님의 강의첫마디가 " 여자는 예뻐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게 죄가 된다" 라고해서 한바탕 웃게 만들었는데요,
그런 인위적인 성형및 피부시술, 화려한 치장까지는 굳이 할필요가 없겠지만, 매일 자신을 잘가꾸는 모습은 건강위생에도 우선 좋고
그 정갈한 태도는 참 아름답다고 여깁니다.
우선은 내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주고, 또한 상대방에 대한 기본예의라고 생각됩니다. " 핸섬 한준희 목사님"께 Two Thumps (최고)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