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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삶과 상속의 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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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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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인간의 문화에는 죽은 자에 대한 집요한 애착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시신을 정중히 다루고 명당을 찾아 장례를 지내는 것이나 시신을 썩지 않게 하는 미이라 기술이 발전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 대한 살아 있는 자들의 이 같은 애착은 죽은 자가 살아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종교적 희망의 인간심리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영화를 헛되게 합니다. 아무리 죽은 자의 시신을 정성들여 장례를 지내고 시신을 썩지 않게 보존하고 무덤을 화려하게 꾸며도 죽음의 허무를 상쇄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요즘은 기독교에서도 화장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지만 내가 어릴 때만해도 화장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화장을 하면 부활 할 때 곤란할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강조하는 기독교에서나 확실한 내세가 없는 민간 신앙에서나 고금을 막론하고 죽음 앞에 인간은 그 허무함을 노래하였고 그러한 노래에 모두가 공감합니다.

나는 어릴 때 동네 할머니나 아주머니들로부터 춘향가, 한양오백년가, 회심가 같은 노래를 많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 중 회심가는 스님들이 중생들에게 회개하여 공덕을 쌓으라는 염불노래이지만 유행가처럼 노래 가사가 인간 심리에 공감되어 민가에 널리 퍼져서 불러졌습니다. 아주 긴 내용으로 되어 있는 회심가 가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여보아라 청춘들아 네가 본래 청춘이며 낸들 본래 백발이냐/ 백발보고 웃지 마라/ 나도 엊그저께 소년행락 하였건만 금일백발 원수로다/ 시름없이 가는 인생 한심하고 가련하다/ 인간 칠십 고래희요 팔십 장년 구십춘광(九十春光)/ 백세를 산다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과 걱정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을 못사는 인생/ 한번 아차 죽어지면 싹이 날까 움이 날까 이내 일신 망극하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설워마라/ 동삼 석 달 죽었다가 명년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인생 한번가면 어느 시절 다시 오나/ 세상만사 헤아리면 묘창해지일속(渺滄海之一粟)이라/ 단불의 나비로다 뿌리 없는 부평초라/ 하루살이 같은 인생 천년 살며 만년사오/ 천만년을 못사는 인생 몽중 같은 살림살이 태평하게 사옵소서!”묘창해지일속(渺滄海之一粟)이란 넓고 푸른 망망한 바다에 한 알의 좁쌀이라는 뜻으로, 매우 큰 것 속에 하나의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 끼여 있다는 뜻입니다. 불교의 인간 죽음에 대한 이해는 민속 신앙이나 무속 종교처럼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옛 복음성가 “허사가”는 12절로 되어 있는데 1,2절이“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홍안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마라/ 유수 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지 널 기다린다...”로 되어 있고 나머지 내용도 거의가 인간 생의 허무함을 노래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다는 면에서는 불교의 회심가와 다릅니다. 불교의 회심가는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지만 이 세상에서 착하고 선하게 공덕을 쌓으며 살라는 교훈이 강조 된 반면 기독교의 허사가는 내세에 대한 소망은 확실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윤리적인 삶에 대한 교훈이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절에 만들어진 복음성가의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자칫 하나님 나라를 이원론적으로 오해할 수 있게 합니다. 즉 믿는 자는 이 세상에서는 어떤 애착도 가질 필요가 없고 오직 내세만 바라보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이 땅에서의 의무와 책임을 소홀히 하게 합니다.

창세기 23장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어 장사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에서부터 노아까지의 족보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족보의 특징은 모든 사람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족보에서 죽은 사람은 남자뿐이고 여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여자들은 죽지 않고 남자만 죽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수를 셀 때 어린이와 여자와 노인은 세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여자와 노약자를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약자에 대해 그 어떤 이방 사회나 문화에서보다 더 배려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자들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록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자를 무시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대로 한 것입니다.

요즘은 여성스럽다는 말도 성차별적이라고 반발하는 여자들이 많습니다. 사회적으로 남녀의 동등한 권리 주장이 너무 강해서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여성의 권리를 강조하는 이들의 주장에 일리도 있지만 남녀의 구별까지도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해이고 왜곡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녀를 서로 다른 존재로 지으시고 역할도 다르게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언약을 맺을 때에도 남자와만 맺고 어떤 명령을 하실 때에도 남자에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은 하와에게도 유효한 언약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질서입니다. 모든 인류는 이 질서 안에서 안녕과 평화를 보장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 질서를 따라 역사와 사건을 남자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죽음에 관한 경우에는 아주 예외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통상적은 예를 깨고 사라의 무덤에 대하여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을 한 것은 이 사건이 특별한 사건임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37세였고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가 127세였을 때 그녀가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빈소에 들어가서 “슬퍼하며 애통했다”했고 하였습니다. 여기 “슬퍼하다”는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는 것을 뜻하고 “애통하다”는 스스로의 감정을 자제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함께 나그네의 생을 살아 온 아내 사라가 먼저 죽은 사실에 대하여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가 비록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사랑하는 자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셨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성도라도 사랑하는 자의 죽음 앞에서는 슬퍼하게 마련입니다. 다만 성경은 성도에게 과도한 슬픔을 자제하라고 권고합니다(살전 4:13).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죽음을 대하는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의 시신 앞에서 무엇인가 비장한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그는 슬퍼하고 애통하였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막상 장례를 치러야 할 텐데 매장지가 없었습니다. 가장이 되어서 아내의 시신을 묻을 매장지 한 필도 마련 못한 것이 한 편 부끄럽기조차 하였을는지 모릅니다. 물론 지금 헷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생각하면 아브라함이 어느 곳에 아내를 매장한다고 해도 거절하거나 방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신다고 하였는데 이방인에게 무상으로 얻는다는 것이 한 편 내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참에 아예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대한 확실한 소유권을 획득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의 관습으로 그 땅에서 아무리 부를 누리고 살아도 땅을 소유하지 못하면 거류민에 불과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땅의 백성”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아주 작은 토지라도 일단 토지의 소유주가 되면 신분상 그 땅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분상 큰 변화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이 거래는 증인의 입회하에 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당시에는 이러한 거래는 성문에서 장로들과 협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빈소에서 나와서 곧장 헷 족속을 찾아가서“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 23:4)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의 합법적 소유권을 취득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계약은 그 지역 공동체 전체의 동의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이 거래를 제시하자 헷 족속들은 아브라함에게 매장지를 무상으로 주겠다고 제의하였고 아브라함은 정중히 그러한 제안을 거절하고 정당한 값을 받고 팔라고 하면서 땅 값을 이야기 해달라고 하자 “땅 값은 은 400세겔이지만 우리 사이에 그런 거래가 웬 말이냐?”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제안대로 합법적인 매매 거래가 많은 증인 입회하에 이루어졌고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그 곳에 장사지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을 합법적으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성경에서 특이하게도 여자의 나이와 매장지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언급된 사라의 장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사라의 묘지에 대한 사건이 특별하게 다루어진 이유, 즉 사라의 묘실에 대한 사건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이 사건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살아서는 나그네이고 죽어서는 상속의 땅을 소유한다는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그 땅을 실질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소유하게 되는 것은 400년 후에나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족장들은 살아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가 기록한 대로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며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족장들은 죽은 후에는 모두 다 이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 그 굴은 그들의 합법적 소유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이 땅에서의 삶을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나그네 로라 증거 하는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 땅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언젠가는 훌훌 털고 떠날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신자는 나그네의 신분임을 증거 하는 특징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소유는 죽어서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라처럼 나그네로 살다가 죽어서 약속의 땅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땅에서의 삶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비교한 대로 장차 우리가 얻게 될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하다는 뜻입니다. 사라가 죽어 약속의 땅에, 즉 상속의 묘실에 장사된 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이 땅에서 누리는 그 어떤 것보다 탁월함을 웅변적으로 강조하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교훈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이지만 정당한 대가를 주고 합법적 거래를 통하여 취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400년 후에는 이스라엘이 전쟁을 통하여 가나인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우리는 곧잘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조화시키지 못하여 갈등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사실 우리 인간 편에서는 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고, 섭리하시고, 주권적으로 통치하신다면 굳이 우리가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일하시는 방식을 통하여 믿음의 삶의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은 예정하시고 섭리하시고 주도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합법적인 대가를 주고 정당한 거래를 통하여 취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변방에 머무는 이방인과 다름이 없습니다. 장로교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믿지만 인간의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납득하고 이해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나는 성경의 이와 같은 가르침을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와 절대주권을 믿습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우리는 책임적인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동전의 앞면입니다. 그러나 동전의 뒷면에는 여전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각각 50%씩 권리를 나누어 갖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논리적 이해를 위해서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고 내용적으로는 인간의 권한과 책임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섭리하시고 약속하신 것도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는 구체적 노력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호송되는 배에서 심한 풍랑을 만났지만 그 배에 탄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 명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도망가려는 사공들을 막았고,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사람들에게 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돌을 굴려 놓으라고 하시고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와 역사는 우리를 손 놓게 하는 것이 아니라 힘써 일하게 합니다. 내세만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소홀히 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사라가 죽어서 묻힌 상속의 묘실은 우리에게 영원을 바라보게 하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도록 실천해야 할 우리의 책임에 대해 가르칩니다.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창 23:16-20)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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