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가 주는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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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희ㆍ2020-05-0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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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을 막기 위한 지침으로 공공장소에서 타인과 6피트 거리를 유지하라는 것이 방역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벌써 두 달여 사람과의 만남을 자제하고 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목사님들과 운동을 하고 늦은 아침 식사를 하면 예외없이 커피와 빵을 디저트로 하는 버릇이 있다. 어쩌면 그때가 목사님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시간이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할 정도다. “목사님들과 커피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이시간이 제일 행복한 시간 같아요”그런 행복한 시간을 코로나 바이러스가 깨뜨려 버린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것이야 서로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이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인간관계의 깨뜨림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예화를 든다면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쓴 우화를 소개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한겨울 두 마리의 고슴도치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서로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좋아하는 사이에 있는 고슴도치의 가시는 부들부들 해지면서 서로를 감싸 주었다. 그런데 서로 불편한 자세를 고쳐보려고 몸을 뒤척이면서 고슴도치의 가시에 힘이 들어갔는지 다른 고슴도치의 몸을 찌른 것이다. 순간 찔린 고슴도치도 가시에 힘이 들어가면서 상대편 몸을 찌른 것이었다. 서로 경계 태세로 들어갔다. 가까이 가면 찔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는 거리를 두고 지낸다.
인간관계도 동일하다. 친해지고 싶다고 상대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고 상처를 입는 것이 두려워서 지나치게 거리를 두면 마음이 외로워진다. 사람관계가 좋아지려면 상대를 알고 적절한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왜 사람관계에서 상처를 받을까? 그 이유는 내가 지키고 간직해야 할 것까지 상대에게 허물없이 주었기 때문이다. 부부가 이혼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부부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부부라는 법도가 있다. 그 지키고 간직해야 할 법도 안에서 부부로 살아야 사랑의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지 부부끼리 가깝다고 기본적인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살면 반드시 찔리게 되어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과는 30-40년 친구로 지내다 헤어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과는 몇 달 안 사귀고 헤어지는 사람도 있다. 사람의 사귐이 환경적인 요소와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친해지기도 하고 또한 멀어지기도 한다.
내가 아는 두 분의 목사님은 30여년을 한결같이 함께 한 친구 목사들이다. 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거나 일주일에 몇 번은 꼭 만나 식사나 커피를 먹고 마신다. 말 그대로 절친이다. 때로는 말싸움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의 목회관이나 정치적 성향으로 충돌할 때가 있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또 다시 만나 함께 지낸다. 한마디로 거리가 없는 친구들이다.
그런데 최근에 그 목사님들이 거리를 두고 지낸다. 그 이유는 그동안 허물없이 지낸 것이 허물이 된 것이다. 그 허물이 서로를 찌르는 가시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동안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면서 지냈지만 그 용서와 이해 속에는 보이지 않는 가시가 숨어 있었다. 같은 목사이었기 때문에, 같은 소속이었기에, 같은 어려움이 있었기에 서로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는데 그 가까움 속에 지키고 간직해야 할 가시가 돌출되어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거리를 만들게 되었다.
이제 나도 6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내가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은 거의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정치적 성향이나 목회관, 그리고 성격 등등은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에게 이익이 되면 좋은 사람이라고 내 뇌의 구조가 형성된다는 것을 알았다. 즉 나에게 도움이 되고 내 성향에 맞장구를 쳐주면 내 머리는 좋은 사람으로 인식해 주고 반대로 나에게 어떤 도움도 없고 오히려 내 성향에 반대되는 말을 하면 여지없이 내 뇌는 편 가르기를 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친해도 일단 편 가르기가 되면 40-50년 절친도 깨진다. 목사로 성도로 20-30년 같이 하면서 서로 얼마나 잘했나, 그런 목사님 없어, 그런 집사님 없어 했던 그런 사이에 편 가르기가 시작되면 적이 된다. 더욱이 다른 교회로 가버리면 그 순간부터 서로는 적이 된다. 물론 사회적 인간관계 도리상 서로 인사도 하고 대화도 주고받지만 마음에는 이미 거리가 생긴 것이고 그 거리는 편 가르기로 인해 적으로 인식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가까이 지내다 보면 적이 되고 멀리 떨어져서 지내다 보면 그리워진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너무 가깝기에 자식들은 부모를 멀리하고 멀리 간 자식은 또 부모의 정을 그리워한다. 목사와 성도가 사랑이라는 공동체 때문에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가까워져는데 그 가까움이 가시가 되어 목사는 성도를 찌르고 성도는 목사를 찌른다. 그리고 적이 되어 살다 어느 날 그때 그 목사가, 그때 그 성도가 좋았는데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과의 거리를 6피트로 정해 놓았다. 서로가 서로를 조심하고 배려하자는 것이다, 이 지침이 우리에게 너무 좋은 교훈을 준다. 사람은 너무 가깝게 가면 냄새가 나고 더러움이 보인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 가면 외롭고 그리워진다. 6피트 간격, 그것이 앞으로 너와 나를 이어줄 가장 적절한 거리 관계라는 것이 실감나게 하는 훈련 과정인 것 같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2:22)
한준희 목사(뉴욕성원장로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목사님들과 운동을 하고 늦은 아침 식사를 하면 예외없이 커피와 빵을 디저트로 하는 버릇이 있다. 어쩌면 그때가 목사님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시간이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할 정도다. “목사님들과 커피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이시간이 제일 행복한 시간 같아요”그런 행복한 시간을 코로나 바이러스가 깨뜨려 버린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것이야 서로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이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인간관계의 깨뜨림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예화를 든다면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쓴 우화를 소개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한겨울 두 마리의 고슴도치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서로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좋아하는 사이에 있는 고슴도치의 가시는 부들부들 해지면서 서로를 감싸 주었다. 그런데 서로 불편한 자세를 고쳐보려고 몸을 뒤척이면서 고슴도치의 가시에 힘이 들어갔는지 다른 고슴도치의 몸을 찌른 것이다. 순간 찔린 고슴도치도 가시에 힘이 들어가면서 상대편 몸을 찌른 것이었다. 서로 경계 태세로 들어갔다. 가까이 가면 찔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는 거리를 두고 지낸다.
인간관계도 동일하다. 친해지고 싶다고 상대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고 상처를 입는 것이 두려워서 지나치게 거리를 두면 마음이 외로워진다. 사람관계가 좋아지려면 상대를 알고 적절한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왜 사람관계에서 상처를 받을까? 그 이유는 내가 지키고 간직해야 할 것까지 상대에게 허물없이 주었기 때문이다. 부부가 이혼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부부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부부라는 법도가 있다. 그 지키고 간직해야 할 법도 안에서 부부로 살아야 사랑의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지 부부끼리 가깝다고 기본적인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살면 반드시 찔리게 되어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과는 30-40년 친구로 지내다 헤어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과는 몇 달 안 사귀고 헤어지는 사람도 있다. 사람의 사귐이 환경적인 요소와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친해지기도 하고 또한 멀어지기도 한다.
내가 아는 두 분의 목사님은 30여년을 한결같이 함께 한 친구 목사들이다. 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거나 일주일에 몇 번은 꼭 만나 식사나 커피를 먹고 마신다. 말 그대로 절친이다. 때로는 말싸움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의 목회관이나 정치적 성향으로 충돌할 때가 있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또 다시 만나 함께 지낸다. 한마디로 거리가 없는 친구들이다.
그런데 최근에 그 목사님들이 거리를 두고 지낸다. 그 이유는 그동안 허물없이 지낸 것이 허물이 된 것이다. 그 허물이 서로를 찌르는 가시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동안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면서 지냈지만 그 용서와 이해 속에는 보이지 않는 가시가 숨어 있었다. 같은 목사이었기 때문에, 같은 소속이었기에, 같은 어려움이 있었기에 서로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는데 그 가까움 속에 지키고 간직해야 할 가시가 돌출되어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거리를 만들게 되었다.
이제 나도 6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내가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은 거의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정치적 성향이나 목회관, 그리고 성격 등등은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에게 이익이 되면 좋은 사람이라고 내 뇌의 구조가 형성된다는 것을 알았다. 즉 나에게 도움이 되고 내 성향에 맞장구를 쳐주면 내 머리는 좋은 사람으로 인식해 주고 반대로 나에게 어떤 도움도 없고 오히려 내 성향에 반대되는 말을 하면 여지없이 내 뇌는 편 가르기를 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친해도 일단 편 가르기가 되면 40-50년 절친도 깨진다. 목사로 성도로 20-30년 같이 하면서 서로 얼마나 잘했나, 그런 목사님 없어, 그런 집사님 없어 했던 그런 사이에 편 가르기가 시작되면 적이 된다. 더욱이 다른 교회로 가버리면 그 순간부터 서로는 적이 된다. 물론 사회적 인간관계 도리상 서로 인사도 하고 대화도 주고받지만 마음에는 이미 거리가 생긴 것이고 그 거리는 편 가르기로 인해 적으로 인식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가까이 지내다 보면 적이 되고 멀리 떨어져서 지내다 보면 그리워진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너무 가깝기에 자식들은 부모를 멀리하고 멀리 간 자식은 또 부모의 정을 그리워한다. 목사와 성도가 사랑이라는 공동체 때문에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가까워져는데 그 가까움이 가시가 되어 목사는 성도를 찌르고 성도는 목사를 찌른다. 그리고 적이 되어 살다 어느 날 그때 그 목사가, 그때 그 성도가 좋았는데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과의 거리를 6피트로 정해 놓았다. 서로가 서로를 조심하고 배려하자는 것이다, 이 지침이 우리에게 너무 좋은 교훈을 준다. 사람은 너무 가깝게 가면 냄새가 나고 더러움이 보인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 가면 외롭고 그리워진다. 6피트 간격, 그것이 앞으로 너와 나를 이어줄 가장 적절한 거리 관계라는 것이 실감나게 하는 훈련 과정인 것 같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2:22)
한준희 목사(뉴욕성원장로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댓글목록
Kate님의 댓글
Kate
Social Distancing 이 코로나바이러스에만 해당된줄 알았었는데
대인관계에도 상당히 유효하군요.
지혜로우신 말씀들 감사합니다.
ㅂㄷㄱ님의 댓글
ㅂㄷㄱ
세상에 인간관계처럼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도 모이기에 힘쓰라고 했고 공동체를 떠나 혼자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는건데... 세상이 이렇게 되었네요. 말세가 다가온다는 경고인 것 같기도 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