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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는 대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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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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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마르틴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그릇된 교황의 권위에 항거하여, 그 교리를 논박하고, 성경이 지니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최고 권위의 토대에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외쳤습니다. 루터 자신은 ‘종교개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사용한 “오직”이라는 말 때문에 피할 수 없이 개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오직이라는 말로 선포한 성경, 믿음, 은혜, 그리스도, 영광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가 불가능한 것임을 주장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여러 대안을 가지고 있었던 가톨릭교회로서는 루터의 주장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무엇에 있어서나 첫 시도가 불가능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대안이 필요합니다. 전쟁이나 비즈니스나 그 외의 어떤 프로젝트를 계획할 때도 첫 안이 잘 못될 경우를 대비하여 제2안, 제3안을 마련합니다. 인간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이 세우는 계획도 완전하지 못하고 설령 인간의 계획이 완전하다고 해도 그것을 실행할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패를 대비하여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입니다. 실패에 대한 대안 없이 외통수로 질주하는 것은 미련하고 무모한 태도입니다. 상대주의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은 상대주의의 기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 상대적인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상대주의는 절대적인 것까지 상대화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상대주의는 절대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상대주의의 함정은 상대주의 자체는 상대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상대주의가 상대주의 자체까지 상대화 하게 되면 스스로를 부정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상대주의가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오해되는 것을 바로 잡는데 겸손하게 집중한다면 좋겠지만 절대가 없는 상대주의는 절대와 상대를 분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또한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거의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도 절대적인 것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선과 악, 도덕과 비도덕, 옳음과 그름, 참과 거짓까지도 어떠한 공리 하에서만 절대적인 것이 되고, 그 공리를 벗어나면 달라지거나 모호해지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공리는 쉽게 깨어지지 않을 만큼 견고하여 그 공리 하에서 많은 것들이 거의 진리에 가깝게 수렴되는 반면, 어떤 공리는 사회의 관념 구조에 따라 쉽게 바뀌기 때문에 선악이나 절대적 혹은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들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도도 약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모든 것이 상대화 되는 세태라고 하여도 살인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적이고 남녀의 성 또한 절대적입니다. 이런 것까지 상대화시키는 것은 어떤 과학적 지식이나 이념이나 사상이나 철학으로도 정당화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류는 상대적인 것들을 절대화 했던 어리석고 어두웠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 한 것의 극단적인 경우는 우상이지만 자연을 신성시 하므로 자연과학의 발전까지 가로 막음으로 인류를 어리석음과 무지 가운데 가두어 두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자연을 신성시 하므로 억매이게 했던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되찾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은 인간의 돌봄과 개발의 대상이지 섬김의 대상은 아닙니다. 인간이 무지로 인하여 신성시 했던 자연이 종교개혁으로 세속화 된 결과 자연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게 되었고 인류가 어리석음과 무지로부터 해방되었는데 이는 종교개혁을 통한 일반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은총만을 누리는 인간은 절대적인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공리나 패러다임 안에서 이성과 합리를 좇아 살뿐 믿음을 좇아 살지는 못합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믿음”을 인정해도 “오직 믿음”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믿는 이들 중에도 이런 형태의 믿음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지만 그 믿음만으로는 불안하기 때문에 언제나 대안을 마련해 놓고 삽니다. 극단적으로는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기도 하고 예수님도 믿고 부처도 믿는 이들이 있고, 믿음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인간 실현과 보람과 행복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즉 천국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라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천국만 바라보다가 그 천국이 없다면 억울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추구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과 구원과 영생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심정적으로라도 믿음이 아닌 다른 대안에 의지하거나 기대는 것은 믿음의 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어서, 죽기 전에 아들을 결혼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100세에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그 아들을 결혼시켜야 할쯤에는 활동이 자유롭지 못해서 나이 많은 신실한 종에게 아들의 결혼을 부탁하였습니다. 아마도 그 종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기 전에 양자 삼으려고 했던 엘리에셀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종으로 집안 모든 소유를 맡아 관리했고 또 아브라함이 아들의 혼인 문제를 위탁한 것으로 보아 매우 신뢰하는 종이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종에게 자기 허벅지 밑에 손을 넣고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맹세는 충성과 절대 복종을 하게 하는 맹세인데, 친밀하고 엄숙한 맹세를 할 때 하게 하는 고대의 서약 관습이라고 합니다.

맹세의 내용은 아들을 위해 여자를 택하되 이 지방 가나안 여자를 택하지 말고 고향 친족에게로 가서 여자를 택할 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맹세가 지엄하니만큼 종은 일이 순조롭게 잘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여자가 따라오지 않겠다고 하면 아들을 그곳으로 데려가서 여자를 택해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만약에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 늙은 종은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종의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하였으니까 주인의 아들을 반드시 친족의 여자와 결혼을 시켜야 하고 그 일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당연히 대안을 생각해야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종에게 말하기를 그 일이 성사되지 않아도 너의 허물이 아니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종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 책임 때문만이 아니라 주인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의 혼사가 잘 성사되지 않을 경우를 위한 대안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대안 없이 고집했던 아들의 결혼에 대한 일관 된 생각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며느리 될 여자는 그가 지금 살고 있는 곳 가나안 사람이 아닌 고향 친족의 여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가나안 여자는 안 되고 고향 친족의 여자라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혈통의 순수성 때문일 수도 있고, 재물을 지키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친족의 여자와 결혼시켜야하겠다고 결심한 것을 단순히 혈통이나 정치나 경제적 이유에서만 찾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하고 있지만 아브라함 때는 아직 율법이 주어지기 아주 오래 전입니다. 율법이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한 이유는 이방인과의 혼인은 필경 이방의 종교와 문화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방인과의 혼인 금지의 구체적 이유가 율법으로 주어지기 전에 이방인과의 혼인을 피하였습니다. 단순히 역사적으로만 생각하면 율법이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지한 것은 아브라함의 예를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예를 따라 이방인과의 혼을 율법으로 금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이방인과의 혼인을 피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비록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이지만, 바울에 의하면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한다고 하였는데, 이방인의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하였다면 아브라함의 양심은 능히 먼 훗날에 주어질 율법의 뜻을 능히 헤아렸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온전하지는 않지만 율법 없이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원치 않으시는 것을 분별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예는 아브라함이 연합군에게 포로 되어 간 조카 롯을 구하여 돌아 올 때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준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율법이 십일조를 명하기 수 백 년 전에 아브라함이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뜻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명령하지 않았어도 그 양심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헤아려 따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하신 후에는 이방인과의 혼인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지만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이방인과 혼인을 해도 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아들의 결혼을 위해서 마치 율법의 엄한 명령을 지키려는 사람처럼 친족의 여자가 따라오지 않는다고 해도 이방 여자와의 결혼은 안 된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들을 이방 여자와 결혼 시켜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이라고 판단한 이상 일체의 타협이나 양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아브라함에게는 만약의 경우를 위한 대안이 없습니다. 믿음은 다른 대안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대안이 없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만약에 아들의 혼인이 친족의 딸과 성사되지 않을 경우를 염려하는 늙은 종에게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창 24:7,8).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큰일인 아들의 결혼에 대하여 그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아브라함에게는 대안이 없습니다. 믿음의 길에는 믿음 외의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우상에게 절하지 않다가 풀무 불에 던져질 위기에서 하나님께서 구해주실 것이라고 믿었고 혹 구해주시지 않을지라도 다른 대안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도 믿음의 길에 대안이 없음을 보여준 경우이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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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Kate님의 댓글

Kate

넵, 믿음에도 사랑에도 대안( Second Choice)은 없다고 봅니다. 
미국에서 배우자감 여성을 고를때  가장 좋아하는 Character를 꼽으라고 했더니 3L 이 나왔다고 합니다. 
Laugh, Love, and Loyal : "웃고 사랑하고 충성스러운 여성".
목사님 글을 읽고나니 우리의 유일한(Only one Choice ) 믿음에 있어서도 우리가 이런 특징을 지니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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