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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은 성도덕 왜곡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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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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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언제부터인가 “성폭력”, “성추행”,“성희롱”이 성범죄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성폭력과 성추행과 희롱은 물리적으로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성적으로 해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성도덕상의 범죄는 거의가 성폭력이나 성추행과 성희롱의 경우입니다. 이 경우 성범죄는 폭력성에 의해 규정된 제재입니다. 성범죄가 폭력성에 의해 규정된 배경에는 남녀가 서로 합의한 상태에서는 어떤 성행위도 처벌할 수 없다는 성도덕의 기준이 낮아진 정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간통죄는 부부간의 정조의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재판상 이혼의 사유가 되고, 이혼 시 위자료 청구의 원인이었습니다. 간통죄의 성립에는 상호 합의의 유무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사자들의 합의로 이루어진 성관계라도 그것을 죄로 규정한 근거는 배우자에 대한 의무를 위반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나라가 간통죄를 폐지하였습니다. 간통죄를 폐지한 이유는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개인에 대한 국가형벌권의 과잉 행사로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입니다. 성인의 성적 문제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에 맡겨두어야 하고 형벌을 통해 타율적으로 강제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간통 및 상간 행위에는 그 양태에 따라 죄질이 현저하게 다른 수많은 경우가 존재함에도 징역형으로만 응징하도록 하여 구체적 사안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고려할 가능성을 배제하거나 제한하여 책임과 형벌 간 비례의 원칙에 위배 되기 때문에 위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드는 법이란 그 법이 인간에게 유익한 것인가를 인간의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행위가 폭력적이라든가 그렇지 않더라도 타인의 안녕과 이익을 해치는 것이면 국가가 강제로 그러한 행위를 금하는 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거나 폭력적이지도 않다면 국가가 굳이 법으로 강제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숨어있습니다. 어떤 법이 인간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여 법을 제정하지만 그런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간통죄에 대한 제재법이 제정될 당시에는 인간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여 제정하였다가 그 법이 개인에 대한 국가의 지나친 통제와 간섭이라고 판단하여 폐지하였습니다. 인간이 만드는 모든 법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그 효용성을 평가하여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위하는 것이 진정 인간을 위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인본주의와 성경의 가르침이 현저하게 다릅니다. 휴머니즘은 인간이 인간을 위해 최선의 것을 선택하지만 성경은 인간은 진정 인간을 위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성경은 도덕이나 법이나 가치나 정치나 학문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 말씀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 인간에게 이로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넣어두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위하려면 직접적으로 인간을 위하려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것이 인간의 행복과 생명을 위하게 됩니다. 이 비밀을 알지 못하는 인본주의는 아무리 이상적인 철학과 사상을 토대로 한 온갖 순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인간 이기심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휴머니즘은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에게 유익하고 행복을 지향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인간 자신을 이기적으로 위하게 되고, 인간 이기심의 극치는 쾌락이며 그 쾌락을 정당화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이방 종교의 제사 의식에 종교의 이름으로 성윤리를 해제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의 가치와 질서와 유익을 거룩한 혼인 제도 안에 한정해 두셨습니다. 그 어떤 정당성이나 휴머니즘에 부합하는 사상이나 전통이나 법이나 방법이라도 하나님께서 한정하신 선을 넘는 것은 죄가 됩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합의를 하거나 당사자들이 합의하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한정해 놓으신 선을 넘는 것은 죄입니다. 휴머니즘이 그것을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과도한 제재라고 하여 죄가 아니라고 하였지만,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국가가 그것을 죄가 아니라고 규정한 그것이 죄입니다.

지금은 많은 국가가 하나님께서 죄라고 규정해 놓으신 것을 죄가 아니라고 바꾸어 놓았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나 전통적인 법 규정에 의하면 명백한 죄인 간통을 국가가 죄가 아니라고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통을 저지르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서울법대 교수였던 조국씨가 부부간에도 간통죄가 성립하는가 라는 문제로 논문을 썼다고 하는데, 아마 모르기는 해도 부부 사이의 성 폭력성을 문제 삼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 윤리의 문제를 폭력성의 문제로 바꾸어 놓은 것은 사람들을 속이는 교묘하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성범죄는 폭력성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이들 중에 진보 좌파들이 많고,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사고의 바탕에는 사악한 무신론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미투 운동에 의해 드러나지 않고 있던 수많은 성폭력과 성추행과 성희롱 케이스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범죄는 성에 대한 윤리성이 아닌 폭력성으로 성범죄를 왜곡하여 규정한 정황으로부터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2006년 미국의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Tarana Burke)가 제안한 미투 운동은 2017년 10월에 폭로된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빠르게 확산하였습니다. 미투 운동은 사회적 약자인 여자가 성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그것을 고발하거나 문제 삼지 못하는 경우를 위해서 제안된 운동이기 때문에 약자들을 위한 그 운동에는 진보주의자들이 눈에 띄게 환영하며 참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진보주의자들이 언제나 문제 삼는 주제는 실제 내용이야 어떻게 되었건 간에 가진 자와 힘 있는 자의 폭력성에 대항하고 약자들을 위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약자들을 위한다고 하며 여권운동에 앞장서 왔던 진보주의자들이 미투 운동을 환영하며 그 일에 앞장서 왔는데, 미투 운동이 전개되자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되는 자들 중에 사회 지도자급의 진보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진보주의자들 중에는 깨끗한 이상적 진보주의자들도 없지 않겠지만 깨끗한 이미지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던 진보주의 지도급 인사들이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되어 굴비처럼 엮이고 있습니다. 학계와 문화 예술계 정치계 등에서 대중의 인기와 존경을 받아왔던 이들이 지속적이고 상습적으로 약한 여자들에게 성폭력을 가해왔었습니다. 시인 고은,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이윤택, 영화배우 조민기 조재현 최용민, 교수 박중현, 정치인 안희정 오거돈, 이 외에도 수많은 가해자가 고발되었습니다. 영화배우이자 대학교수인 조민기는 경찰 조사 일정이 발표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미투 가해자 중에는 죄질이 몹시 나쁜 이들이 많습니다. 특히 고은이나 이윤택 같은 이들의 죄질이 매우 나빴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시를 쓰고 연극을 하는 이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순수하고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보냈던 존경과 지지 반대급부의 실망을 하였을 것입니다. 나도 고은의 어떤 시를 좋아하여 외우기도 하였는데, 그 뻔뻔스러움에 배신감과 허탈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이 들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변함없이 그들을 존경하고 지지를 보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사람들과 사회에 대하여 더욱 냉소적으로 변할 것 같아 두렵고 또한 속이 상합니다.

한국 내 첫 성희롱 소송 변호사였던 박원순, 그 첫 성희롱 소송에서 6년간의 긴 법정 공방 끝에 승소를 끌어내고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외쳤던 그가 자기의 전 비서로부터 성추행 고소를 당한 후 이틀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박원순은 그 승소 판결로 한국여성단체엽합회로부터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은 후 여성인권 변호사로 불리며 대한민국 두 번째 민선 지도자인 서울시장에 3번이나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줄곧 여성을 옹호하고 응원하며 공직에서조차 여성친화적 정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여성다움’이 ‘원순다움’이라며 지나치리만치 여성을 편들며 살았습니다. 지난 2018년에는 서울시장 예비 후보로 “성폭력은 예방하는 게 중요하다”며 “사후에는 회복할 수 없는 피해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성희롱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때는 피해자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성희롱 성폭력 교육을 받는 게 중요하다”라고 하였던 그였습니다. 어쩌면 그는 여느 진보주의 미투 가해자와는 다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그렇게도 집착하고 관심을 쏟아왔던 여성 인권 옹호 운동을 스스로 부정하는 미투 운동의 가해자로 고소를 당하는 아이러니한 여운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였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는 누구나 짓지만, 회개는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회개를 해야 합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파렴치한 죄를 짓고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놀랐지만 너무나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은 자신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역대 왕들 중 다윗을 가장 존경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아무리 탁월하고 위대하고 순수해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박원순이 그렇게도 약자를 위하는 일생을 살았지만, 그는 자신보다 약자를 더 사랑하시고 관심을 갖고 계신 하나님을 몰랐고 그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대항하는 태도를 보여 왔습니다. 그 결과 약자를 위하여 온갖 일을 다 하면서 정작 그 자신은 성추행 가해자로 피해자에게 고소를 당하였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죽기 전에 피해 당사자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했어야 합니다. 그 고발이 악의적인 모함인지는 몰라도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 고발을 모함이라고 보는 이들은 그의 장례를 서울시민장으로 치러야 한다지만, 그가 아무리 공직자로 죽었어도 성추행 가해자로 고발이 되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심각한 패륜적 해악을 끼쳤는데 “서울시민장”운운하는 것은 다수의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굳이 신학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자살은 생명 존엄에 대하여 인류에게 심대한 해악을 끼치는 행위이고 성경적으로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항하는 교만의 극치이며 회개의 기회마저 거부하는 용서받지 못할 범죄입니다.

박원순의 자살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자의 의로운 행위가 결과적으로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성을 수단화하고 도구화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본주의가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성을 수단화할 뿐 아니라 인간의 존재 자체와 생명까지도 소모품으로 취급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보 좌파들 중 미투 가해자가 많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해로운 인본주의는 온갖 명분 있는 주제를 앞세우며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지만 언젠가는 인간의 성과 생명까지 수단화하며 지배하려 합니다. 이 위험천만한 사조의 파고를 극복하고 궁극적 인간 복지로 나아가는 길은 복음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궁극적 인간 복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적 사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진정한 궁극적 복지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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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Ship님의 댓글

Ship

가롯유다의 자살도 이해 너머의 문제로 애도의 대상이 되는군요.

Kate님의 댓글

Kate

강남순 Texas Christian University ((Brite Divinity School) Professor님글로 대신합니다.
<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열광적 '순결주의'의 테러리즘>
1. '박원순'이라는 고유명사를 지닌 한 사람이, 7월 10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매듭지었다. 그에게 공적으로 붙여진 이름은 '서울시장'이다. 그러나 그는 한 '인간'이다. 우리는 이 단순한 사실을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가. 그에게 붙여졌던 ‘진보적인 인권 변호사,’ 또는 서울을 ‘세계적 도시’로 만든 시장 등 다양한 표지들은, 그가 무수한 결을 지닌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두 포괄할 수 없다. 한 인간으로서 지닌 다양한 외적, 내적 결들의 한 부분들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의 잠적, 그리고 이어서 죽음이 알려진 후, 지난 이틀 동안 나는 한국과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텍사스에서 착잡한 마음을 깊숙하게 품고 지내야만 했다. 우울한 착잡함의 시간을 지내면서, 내가 느끼고 있는 아픔, 우울함, 절망감 등 추상화 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은 단지 고유명사를 지닌 어느 특정한 한 개인의 죽음 자체 때문만이 아님을 보게 된다. 마치 손에 쥐고 있던 ‘생명선’을 순간에 놓기만 하면, 인간의 생명이란 얼마나 한순간에 무화될 수 있는가라는,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나의 온 존재속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 모두가 이러한 ‘한계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는 칼 야스퍼스의 말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이어 신문과 SNS에 쏟아지는 그의 죽음에 대한 ‘코멘트’들은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아프게 마주하게 했다. 미셸 푸코가 말하는 “언어적 테러리즘(verbal terrorism)”이 난무하는 글들을 읽으며 나는 ‘인간임’에 대하여 절망감까지 들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끔찍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나의 이러한 추상화같은 내적 세계를 담아내고자 할 때, 산문적 글과 말이란 얼마나 무력한가.

2. 한국, 독일, 영국, 미국 등 네 나라에서 살아보면서 내가 경험한 것은 어느 사회마다 각기 다른 ‘질병’과 ‘장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한국사회가 지닌 가장 심각한 ‘악 (vice)’은 “흑백논리적인 이분법적 사유방식”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유방식이 개별인들의 사유구조나 관계맺는 방식은 물론, 한국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진보-보수’라는 이분법은 물론이고, 한 인물에 대하여 극도의 ‘이상화-악마화’가 끊이지 않고 진행되는 ‘악’이, 한국사회가 지닌 가장 심각한 질병중 하나라고 나는 본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비판적 토론이 아닌 ‘내 편-저 편’이라는 편가르기가 먼저 작동하고, 그 중심적 주제에 대한 포괄적인 토론은 불가능하게 된다. 멀리 뒤로 갈 필요도 없다. 지금도 진행 중인 소위 ‘조국 사태,’ 정신대/위안부 문제, 그리고 서울 시장의 죽음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한 흑백 논리적인 이분법적 접근방식에 의해서만 등장할 뿐이다. ‘인간이 누구인가’ 에 대한 복합적 시선이 결여된 채, ‘순수주의(purism)’를 내세우며 단순한 ‘이상화(idealization)’나 ‘악마화(demonization)’ 이외에는 논의거리가 되지 못한다.

3. ‘순수에의 열망 (desire for purity)’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서 ‘순수주의(purism)’으로 고착되면, 인류 역사에서 무수한 테러리즘과 폭력이 일어났다.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보존해야한다는 ‘순수성에의 열망’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외국인 박해, 동성애자 학살, 장애인 학살을 정당화했다. 미국에서 백인의 ‘순수성에의 열망’에 따른 ‘한 방울 규정(One-Drop Rule)’은 1967년 까지 백인 아닌 인종과의 결혼을 범죄화했다. 조상 중에 흑인의 피가 ‘한 방울’만 섞여 있어도 ‘백인’이 될 수 없고 ‘흑인’으로 범주화되는 법이다. 다양한 인종간의 결혼이 지금은 합법화되었지만, 여전히 이 ‘한 방울 규정’이 백인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오바마 대통령에게서 백인과 흑인의 피가 각기 50%이지만, 그가 백인이 아닌 ‘흑인’으로 규정되는 배경이다. 이러한 ‘인종적/종족적 순수주의’만큼 폭력적인 것이 바로 ‘도덕적 순수주의’에 대한 열광이다.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복합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으며, 여전히 ‘이상화-악마화’라는 지극히 단순한 흑백논리의 범주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4. 나는 페미니즘이나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한 책을 쓰는 작업을 하면서 깊은 딜레마와 씨름했어야 했다. 내 속에 보이지 않는 ‘순수주의에의 열망’이 있었는가보다.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완전한’ 이론가/사상가가 있는가. 없다. 중요한 통찰을 준 특정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에 대하여 다양한 자료들을 읽다보면, 그들의 사적 삶에 이런 저런 ‘오염’을 지니고 있는 경우들을 만날 때 마다 나는 깊은 실망을 했었다. 어떤 페미니스트는 인종적 또는 지적 우월주의 또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오판과 오역을 생산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칸트와 같이 코즈모폴리터니즘의 부활을 가져온 사상가는 어떤가. 그는 여성은 합리성을 지니지 못한 존재이며, 열대지방에 사는 인종은 지적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한편으로는 지구 위에 거하는 ‘모든’ 인간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지켜야 하는 코즈모폴리턴 권리를 주장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혐오’와 ‘인종주의자(racialist)’인 칸트를 내가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이러한 예는 마틴 루터 킹, 폴 틸리히, 마틴 하이데거 등 다양한 이유들에 의해서 '오염'된 무수한 사상가/운동가들속에서 볼 수 있다. 그 어느 한 사람도 소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존재’란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순수주의에의 열망’은 또 다른 폭력과 테러로 사용된다는 것을 인류의 역사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 자신속에서 이러한 딜레마와 씨름하면서 내가 내리게 된 결론은 ‘순수주의의 열망’이 지닌 위험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5. “칸트와 함께 칸트를 넘어서 생각하기 (thinking with Kant against/beyond Kant)” 라는 사유방식은 나 자신의 ‘순수주의에의 열망’을 넘어서서 인간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를 하기 시작하면서 만든 나의 학문하기 방식이 되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인종차별적인 페미니스트나 코즈모폴리턴 사상가, 성차별주의자 또는 성소수자 차별하는 인권운동가 등의 이론을 내가 ‘분석적 도구’로 차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라는 것은 한 인간은 무수한 결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우리의 인식구조속에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인간이해를 수용할 때, 한 인물에 대한 ‘이상화’ 또는 ‘악마화’라는 흑백논리적 접근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위험한가를 보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이란 단순한 한 두가지 표지로 드러낼 수 없다. 그러한 ‘표지들(markers)’은 지극히 일 부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뿐, 한 사람의 복합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게 붙여지는 표지들이 고정적인 것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하여, 내가 개인적으로는 거부하는 이유들이다.

6. 인간이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은, 동일한 정황에서 누구나가 다 동일한 해석, 결정,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다르듯, 우리 각자는 다른 해석과 결정을 내린다. 그렇기에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등의 표현으로 한 고유한 존재가 내린 결정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매듭짓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이 쉽사리 ‘용기’라거나 ‘비겁’이라는 단순한 표지로 치부되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죽음에 대한 한 사람의 결단은 우리의 '이해-너머 (beyond comprehension)'의 문제이다. 알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자의적 판단/심판을 중지하는 것--인간됨의 실천이다. 그가 스스로 이 삶을 마감하겠다는 결정이 '용기있는 사죄의 몸짓'인지, 아니면 다른 몸짓인지 '그'만이 알 수 있다.

7. “매 죽음마다 세계의 종국이다.” 데리다의 말이다. 자신의 ‘생명선을 놓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에 대하여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애도이다. ‘애도한다’는 것이 그를 전적으로 ‘이상화’하라는 것도 아니다. ‘더불 제스츄어(double gesture)' 를 가지고 ‘박원순과 함께 박원순을 넘어서 생각하기’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는 데리다의 말이 담고 있는 바, 한 죽음 앞에서 우리 각자의 ‘인간됨’을 실천하는 애도라고 나는 본다.

한편으로는, 한 공인으로서 그가 한국사회에서 이루어 왔던 소중한 일들을 지켜내고, 아직 이루지 못한 남아있는 일들을 남아있는 사람들이 이어서 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 순수주의’의 열망으로 그를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 오류와 한계를 지닌 인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지극히 남성중심주의적인 한국사회에서, 그가 공직을 수행하면서 한 개인에게 어떤 종류의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그 역시 한국의 가부장제적 '사회적 산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나 만 택해야 하는 흑백논리를 넘어서서, 한 인간이 지닌 복합적인 면들을 ‘한꺼번에’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8. 그의 죽음의 현장에서 ‘파안대소’하는 몇 얼굴을 담은 사진을 보았다. 그 파안대소하는 얼굴 중에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K' 라는 사람의 모습을 보니, ‘인간이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침묵속에서 애도하려고 했던 내가, 이렇게 미완의 단상이라도 쓰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 사진이다. 얼마 전 독일을 여행하면서 가보았던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본 사진이 떠 오른다. 수용되었던 유대인들이 해방되자, 그 ‘피해자’들이 ‘가해자’인 독일 군인들을 발가벗기고 죽여서 그 주검을 수용소 철조망에 걸어놓고 조롱하는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면서 소위 ‘피해자’들 역시 이러한 끔찍한 ‘가해자’의 모습을 품고 있는 ‘인간’임을 충격적으로 확인했었다. 인간 속에는 ‘피해자-가해자’의 가능성이 언제나 복합적으로 도사리고 있다. 그 어떤 표지가 붙었든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애도’하는 것—인간으로서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방식이다. 그 누구의 죽음이라도 ‘조롱받을 죽음’이란 이 세계에 없다. 죽음을 선택한 그와 ‘함께,’ 그리고 그를 ‘넘어서’ 보다 인간의 권리가 확장되는 서울, 한국을 만들어가기 위한 과제를 우리 각자의 어깨위에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의 정치사에서 여러가지 소중한 업적을 남긴 한 사람의 죽음앞에 나는 애도한다. 그가 아무런 흠 없는 ‘순수’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지닌 여러가지 약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 죽음마다 세계의 종국”이기 때문이다.

Ship님의 댓글

Ship 댓글의 댓글

[주일설교] 자살공화국 2020/07/12 신광두레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nUjm6XAG7Ts

Kate님의 댓글

Kate 댓글의 댓글

제가 저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매일매일 성경귀절과 영어단어를 받아 익히고있는데요. 오늘 아침에 받아본 단어가 참 좋게 느껴져서 알기쉽게  간추려 소개해드립니다.

WHAT IS THE ORIGIN OF RHATHYMIA (라-따이미아 의 어원은 무엇인가요)?
Rhathymia “carefree behavior, lightheartedness” comes straight from Greek rhāthȳmía “easiness of temper, taking things easy.”  The first part of rhāthȳmía is the adverb rhã, rhéa, rheīa “easily, lightly”. The second element of rhāthȳmía is a derivative of the noun thȳmós “soul, spirit, mind, life, breath.” 
" 영혼과 정신과 마음과 삶과 호흡을  속박하는것들로부터 자신을 편하게 놓아주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cheerfully optimistic and hopeful) 태도"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것 같군요.

어떠한 무기로 무장한 논리와 지식 이전에 “인간의 마음”을 지닌 따스한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하는 개인의 실존적 입장은, 우리 각자가 통과한 삶의 빛깔과 양상에 따라 편차가 있을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 자신도 죄인이고 부족한 인간이니만큼 누가 누구를 탓하기전에  좀더 깊은 인간이해와 균형감각을 지니고 살면 훨씬더 사회가 밝아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저만 느끼는건지는 몰라도 정치색이 강한 설교들은 별로 은혜가 되는것 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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