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 목사 "가정의 독점적 이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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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3-06-0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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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로마가 무너지게 되는 원인을 게르만족의 침입, 중앙집권체제의 해체, 기독교의 영향 등과 같은 정치적, 종교적 요인들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년 5월 8일 ~ 1794년 1월 16일)은 《로마 제국 쇠망사》라는 그의 저서에서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은 가정의 굴뚝에서 연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여 제국의 몰락이 경제적으로 가정이 붕괴함에서 비롯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역사가들이 제국 쇠망의 원인을 가정 붕괴로 보았다는 사실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제국이나 정치나 전쟁 같은 것은 가정과 직접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역사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역사와 문명이 가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어느 한 시대의 특징이 아니라 보편적 현상이고 창조의 목적과 질서, 나아가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의 가족(household)들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조세 부담을 과중하게 떠안고 있었고 화폐가치의 하락에 따른 소득감소로 가계의 재정은 피폐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정적 부담이 로마의 가정을 피폐하게 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성적인 놀이 대상으로만 여긴 도덕 부재의 쾌락추구가 난잡한 남녀 혼탕과 같은 문화를 만들어 시민의 가정들을 더욱 급속히 붕괴시켰다고 보는 관점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만큼 어느 사회에서나 인정하는 것이고 국민경제와 정치사회의 도덕적 불의도 가정과 깊은 관련이 있음은 고금(古今)에서 그 증거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의 부패의 많은 부분은 가족과 관련이 있음을 온 국민이 보았습니다. 큰 교회 목사님들의 세습이나 재정 비리도 가족을 변화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고, 문제 교인들의 집단적 행동이나 응집력도 진리나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직하고 바른 판단에서가 아니라 가족이나 친인척, 나아가서는 세속적 인맥이나 유대관계의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므로 결국 이방 신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선지자를 박해하였으며, 이방의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어 탐심을 절제하지 못해 가난한 백성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음모를 꾸며 그를 살해하였습니다. 왕이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이 원인이 되어 온 나라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윤리적으로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계 많은 나라와 민족 중에 따로 구별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들이 구별된 민족으로 살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특별한 법을 주셨고 지리적으로도 구별된 약속의 땅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한 것은 일체 다른 민족들과의 접촉을 피하여 살도록 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세계 여러 민족을 위한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열방 가운데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비록 그들의 나라 경계가 팔레스타인에 한정되지만, 그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이미 고대 문명을 이루고 있던 나일강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서로 교차하는 곳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에서 이 큰 고대의 두 문명의 영향은 밀물과 썰물처럼 팔레스타인 지역에 밀려들었다 빠져나갔다를 반복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사회와 가정이 이방의 민족들과 공유했던 문화와 사회의 규범들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들은 이스라엘의 믿음이 그러한 문화적 삶의 영역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상호 작용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날은 개인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시대는 개인보다는 가정이 중요했습니다. 개인의 행동은 개인의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곧 그 가문과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개인의 선행은 가문의 영예가 되고 개인의 범죄는 가문의 패망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과 문화 사이의 관계에서 성경적으로 대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문제는 너무 복잡하므로 단순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경솔하고 위험한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경제 문제가 그렇고, 동성결혼 문제도 그렇고, 자살 문제도 그렇고, 이혼 문제도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제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성경에서 배척과 금지와 허용과 묵인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이방 문화가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것으로 금지되었지만 이스라엘은 언제나 그런 것으로부터 깨끗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같은 이스라엘의 상황은 오늘 우리의 상황과 같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일부다처, 이혼, 노예제도 같은 것은 허용이지 장려사항이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허용이란 더 나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건부 관용일 뿐 언젠가는 극복되고 개혁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적극적으로 성경적 가족이라든가 가정에 대한 좋은 모델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도 우리가 바라보고 따를 모델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교회 강단 메시지가 “아브라함을 본받자"라는 식이지만, 어떤 사람의 훌륭한 면이나 교훈은 본받을 수 있어도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본받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렇게 온전한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약 공동체로서의 가족에 대해서도 어떤 모델을 통해서 배우기보다는 비판적 대상들에서 성경적 가족에 대하여 배우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한 가정이 언약 공동체의 규범에서 벗어나게 되는 위험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비록 품 안에 있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섬기는 신앙에서 떠나게 하거나 소홀히 하게 하는 것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용납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인정사정없이 그를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규범을 철저히 지키고 실천하는 것의 어려움은 그 대상이 가족이라는 데 있습니다. 가족관계의 상식적 이해의 틀을 깨지 못하면 아무도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족관계의 개념이 특별합니다. 사법적 경제적 신앙적 모든 역할이 가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부정적인 모든 문제의 원인도 가족관계에서 발생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마치 가정과 가족 자체를 폄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가정과 가족의 중성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은 단순한 혈연적 관계를 넘어 하나님 나라 언약 공동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며 그 문제에 대해 결단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가족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나 심지어 가족이나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않는 자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혈연적 관계의 벽을 넘지 못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가족의 혈연적 관계에 머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 가족은 언약 공동체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이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아내의 의견도 남편의 뜻도 부모의 말씀도 자식의 요구도 하나님의 언약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최종적 권위가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모든 가족의 의견이나 계획이나 목적이나 취미나 꿈이나 물질이나 자녀나 자신까지 하나님의 뜻, 즉 언약에 부합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권하고 이끌고 지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가 곧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가족 중 누구의 의견이든지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가족을 위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가족 중 누구든지 다른 신을 좇을 것을 권하는 경우 절대 그의 말을 듣지 말고 그러한 주장을 끝까지 요구하는 가족은 죽이라고 하였습니다(신 13:8,9).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전할 때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가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과 어머니가 예수님을 붙들러 갔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가족이 오해해서 그랬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가족은 혈연적 관계를 초월하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마 12:50, 막 3:31-35). 그리스도인의 가족은 혈연 공동체일 뿐 아니라 언약 공동체라는 말씀입니다. 언약 공동체에서는 가족이 전연 다른 차원의 개념을 갖습니다.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보라 이들이 내 어머니요 동생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도 동생들이 여럿 있었지만,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시며 “보라 너의 어머니다.”고 하셨습니다. 가정을 타락시키고 가족관계를 깨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해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반사회적인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족관계를 깨트릴까 봐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부모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 따르지 않는 것이 바로 가족관계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거짓말이 묵인되고, 속임수가 묵인되고, 질투와 비난이 묵인되는 것은 가정을 허무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거의 모든 가정이 그렇습니다. 아담의 가정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는 일이 있었고, 이어서 형이 질투로 인하여 아우를 살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노아가 비록 당대의 의인이라고는 하지만 술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 있는 것을 자녀들이 보고 시험에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기드온의 가정도 사무엘의 가정도 다윗도 가정도 문제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미움과 질투와 강간과 살인으로 점철된 것이 다윗 가문의 역사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면에서는 본받을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인물을 전체적으로 모델 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의 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허용과 묵인을 원리처럼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적극적인 원리를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의 가정은 혈연적 공동체를 넘어 언약 공동체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내용인 성경 말씀이 언제나 원리가 되어야 하고 법이 되어야 하고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 언약의 내용인 성경 말씀을 가지고 남편에게 말해야 하고 아내에게 말해야 하고 자식에게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하고 부모님께 설명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평생에 옆에 두고 읽고 묵상하여 언약 공동체로서의 가정을 세워 가야합니다.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에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여기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 자이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 ”(신 13:6-1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년 5월 8일 ~ 1794년 1월 16일)은 《로마 제국 쇠망사》라는 그의 저서에서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은 가정의 굴뚝에서 연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여 제국의 몰락이 경제적으로 가정이 붕괴함에서 비롯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역사가들이 제국 쇠망의 원인을 가정 붕괴로 보았다는 사실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제국이나 정치나 전쟁 같은 것은 가정과 직접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역사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역사와 문명이 가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어느 한 시대의 특징이 아니라 보편적 현상이고 창조의 목적과 질서, 나아가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의 가족(household)들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조세 부담을 과중하게 떠안고 있었고 화폐가치의 하락에 따른 소득감소로 가계의 재정은 피폐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정적 부담이 로마의 가정을 피폐하게 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성적인 놀이 대상으로만 여긴 도덕 부재의 쾌락추구가 난잡한 남녀 혼탕과 같은 문화를 만들어 시민의 가정들을 더욱 급속히 붕괴시켰다고 보는 관점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만큼 어느 사회에서나 인정하는 것이고 국민경제와 정치사회의 도덕적 불의도 가정과 깊은 관련이 있음은 고금(古今)에서 그 증거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의 부패의 많은 부분은 가족과 관련이 있음을 온 국민이 보았습니다. 큰 교회 목사님들의 세습이나 재정 비리도 가족을 변화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고, 문제 교인들의 집단적 행동이나 응집력도 진리나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직하고 바른 판단에서가 아니라 가족이나 친인척, 나아가서는 세속적 인맥이나 유대관계의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므로 결국 이방 신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선지자를 박해하였으며, 이방의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어 탐심을 절제하지 못해 가난한 백성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음모를 꾸며 그를 살해하였습니다. 왕이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이 원인이 되어 온 나라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윤리적으로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계 많은 나라와 민족 중에 따로 구별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들이 구별된 민족으로 살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특별한 법을 주셨고 지리적으로도 구별된 약속의 땅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한 것은 일체 다른 민족들과의 접촉을 피하여 살도록 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세계 여러 민족을 위한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열방 가운데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비록 그들의 나라 경계가 팔레스타인에 한정되지만, 그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이미 고대 문명을 이루고 있던 나일강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서로 교차하는 곳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에서 이 큰 고대의 두 문명의 영향은 밀물과 썰물처럼 팔레스타인 지역에 밀려들었다 빠져나갔다를 반복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사회와 가정이 이방의 민족들과 공유했던 문화와 사회의 규범들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들은 이스라엘의 믿음이 그러한 문화적 삶의 영역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상호 작용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날은 개인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시대는 개인보다는 가정이 중요했습니다. 개인의 행동은 개인의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곧 그 가문과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개인의 선행은 가문의 영예가 되고 개인의 범죄는 가문의 패망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과 문화 사이의 관계에서 성경적으로 대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문제는 너무 복잡하므로 단순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경솔하고 위험한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경제 문제가 그렇고, 동성결혼 문제도 그렇고, 자살 문제도 그렇고, 이혼 문제도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제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성경에서 배척과 금지와 허용과 묵인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이방 문화가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것으로 금지되었지만 이스라엘은 언제나 그런 것으로부터 깨끗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같은 이스라엘의 상황은 오늘 우리의 상황과 같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일부다처, 이혼, 노예제도 같은 것은 허용이지 장려사항이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허용이란 더 나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건부 관용일 뿐 언젠가는 극복되고 개혁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적극적으로 성경적 가족이라든가 가정에 대한 좋은 모델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도 우리가 바라보고 따를 모델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교회 강단 메시지가 “아브라함을 본받자"라는 식이지만, 어떤 사람의 훌륭한 면이나 교훈은 본받을 수 있어도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본받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렇게 온전한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약 공동체로서의 가족에 대해서도 어떤 모델을 통해서 배우기보다는 비판적 대상들에서 성경적 가족에 대하여 배우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한 가정이 언약 공동체의 규범에서 벗어나게 되는 위험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비록 품 안에 있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섬기는 신앙에서 떠나게 하거나 소홀히 하게 하는 것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용납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인정사정없이 그를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규범을 철저히 지키고 실천하는 것의 어려움은 그 대상이 가족이라는 데 있습니다. 가족관계의 상식적 이해의 틀을 깨지 못하면 아무도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족관계의 개념이 특별합니다. 사법적 경제적 신앙적 모든 역할이 가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부정적인 모든 문제의 원인도 가족관계에서 발생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마치 가정과 가족 자체를 폄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가정과 가족의 중성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은 단순한 혈연적 관계를 넘어 하나님 나라 언약 공동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며 그 문제에 대해 결단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가족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나 심지어 가족이나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않는 자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혈연적 관계의 벽을 넘지 못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가족의 혈연적 관계에 머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 가족은 언약 공동체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이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아내의 의견도 남편의 뜻도 부모의 말씀도 자식의 요구도 하나님의 언약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최종적 권위가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모든 가족의 의견이나 계획이나 목적이나 취미나 꿈이나 물질이나 자녀나 자신까지 하나님의 뜻, 즉 언약에 부합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권하고 이끌고 지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가 곧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가족 중 누구의 의견이든지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가족을 위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가족 중 누구든지 다른 신을 좇을 것을 권하는 경우 절대 그의 말을 듣지 말고 그러한 주장을 끝까지 요구하는 가족은 죽이라고 하였습니다(신 13:8,9).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전할 때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가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과 어머니가 예수님을 붙들러 갔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가족이 오해해서 그랬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가족은 혈연적 관계를 초월하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마 12:50, 막 3:31-35). 그리스도인의 가족은 혈연 공동체일 뿐 아니라 언약 공동체라는 말씀입니다. 언약 공동체에서는 가족이 전연 다른 차원의 개념을 갖습니다.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보라 이들이 내 어머니요 동생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도 동생들이 여럿 있었지만,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시며 “보라 너의 어머니다.”고 하셨습니다. 가정을 타락시키고 가족관계를 깨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해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반사회적인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족관계를 깨트릴까 봐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부모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 따르지 않는 것이 바로 가족관계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거짓말이 묵인되고, 속임수가 묵인되고, 질투와 비난이 묵인되는 것은 가정을 허무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거의 모든 가정이 그렇습니다. 아담의 가정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는 일이 있었고, 이어서 형이 질투로 인하여 아우를 살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노아가 비록 당대의 의인이라고는 하지만 술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 있는 것을 자녀들이 보고 시험에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기드온의 가정도 사무엘의 가정도 다윗도 가정도 문제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미움과 질투와 강간과 살인으로 점철된 것이 다윗 가문의 역사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면에서는 본받을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인물을 전체적으로 모델 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의 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허용과 묵인을 원리처럼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적극적인 원리를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의 가정은 혈연적 공동체를 넘어 언약 공동체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내용인 성경 말씀이 언제나 원리가 되어야 하고 법이 되어야 하고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 언약의 내용인 성경 말씀을 가지고 남편에게 말해야 하고 아내에게 말해야 하고 자식에게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하고 부모님께 설명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평생에 옆에 두고 읽고 묵상하여 언약 공동체로서의 가정을 세워 가야합니다.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에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여기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 자이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 ”(신 13:6-1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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