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은폐성, 오해하거나 왜곡하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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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1-04-0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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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또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창조와 부활의 행위자로 믿은 것처럼 바울도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바울이 창조와 부활을 믿었다는 것은 인간이 창조와 부활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한 창조와 부활은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다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도 합니다. 창조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지만 인간 스스로는 부활과 창조의 지평에서 전적으로 무력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창조와 부활을 믿을 뿐 아니라 증거 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증거 해야 할 메시지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증거 해야 할 메시지의 핵심이 부활인데, 그 부활은 그것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치 미증유의 사건처럼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확증을 주셔서 부활의 주님을 목격한 사도들이 부활을 믿고 전하였지만, 부활 자체가 어떤 것인지는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다만 전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살아난 자들이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했다는 뜻입니다. 그 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이 더는 설명을 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며 시간과 정력을 쏟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제시하는 거울이나 그림 같이 단지 잠깐 보였을 뿐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확증을 주셨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서 증거하였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신비한 것이 부활입니다. 믿는 자에게 부활이 없다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불쌍한 존재라고 바울이 말했지만, 부활 자체는 성경 전체를 살펴보아도 신비로울 뿐 인간 지식과 감성의 촉수가 닿지 않는 초월의 경지에 속하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애벌레의 수준에서는 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나비의 수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부활의 수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플라톤의 "국가"에 동굴의 비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굴의 비유는 동굴 밖과 동굴 안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동굴 밖은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진리의 영역이고, 동굴 안은 의견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동굴 안과 밖은 플라톤 인식론에서 주로 거론되는 진리의 영역과 의견의 영역에 대한 비유이며, 동굴 밖보다 동굴 안쪽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동굴 안 지하에는 속박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동굴 안은 빛으로 향한 좁은 통로가 입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굴 안의 속박된 사람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있습니다. 동굴 안의 사람들은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상태에서 인형의 그림자만 보고 있는데, 이 그림자는 태양이 만든 것이 아니라 동굴 안에 피워진 모닥불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인형과 모닥불은 각각 동굴 밖 태양과 여러 실제 사물들의 모방이며 사람들은 이 모방의 모방인 그림자를 진짜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굴 안에 있던 한 사람이 속박된 사슬을 풀고 동굴 입구로 향합니다. 그는 담벼락을 지나 인형을 보고, 동굴 안에 피워진 불도 보고, 태양을 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여러 겹의 거짓을 보고 있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는 동굴 밖으로 나가서 태양을 보고, 태양 아래 실제 사물을 보지만 그동안 어둠에 적응되어 있었기 때문에 눈이 부셔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볼 수 없습니다. 마치 여태껏 거짓만을 알고 있던 사람에게 진실을 알려주어도 그 진실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과 같이 동굴 밖으로 나간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빛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동굴 안으로 돌아오면서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합니다. 하나는 빛에 대해 적응했던 것처럼 어둠에 대해 적응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어둠 속에서 그림자만 보고 그것을 참된 것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들이 그의 말을 거짓으로 간주하고 죽이려 드는 위험입니다. 그것은 마치 참 진리를 알고 있다 해도 그 진리를 곧바로 적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동굴의 비유는 국가 편에서 철학자가 도달해야 하는 인식의 최고단계인 좋음의 이데아를 묘사하기 위해 소개되는 세 가지 비유 중 마지막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인간이 자신의 본래의 상황과 조건에서 벗어나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오늘날 우리가 인간 됨의 본질로 간주하는 정신의 자유가 사실은 철학자의 자기희생적인 계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동굴 안의 상태에서는 아무리 진지하고 성실하다고 해도 거짓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과 부활은 마치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 비유의 동굴 안과 동굴 밖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동굴 안이고 동굴 밖은 부활 세계와 같습니다. 바울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과 완전히 다른 차원에 해당합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생명은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성욕을 느끼고, 소유하고 싶어 하는 생명입니다. 이런 지금의 생명형식으로는 그 누구도 만족을 얻어 누릴 수 없습니다. 이런 결핍은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결핍이 심화 될 뿐입니다.
하지만 부활 생명은 그 자체가 완전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부활 생명 상태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가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압니다. 부활 생명은 지금의 우리의 생명과는 전혀 다른 생명의 형식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그 부활은 하나님만이 일으킬 수 있는 사건이고 하나님만이 온전히 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적 삶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생명의 형식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그동안 인간이 중요하다고 여긴 모든 삶의 형식들이 폐기된다는 뜻입니다.
부활 생명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율법과 인간의 노력이 유효하겠지만, 부활 생명은 하나님만이 일으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는 믿음만이 정당성을 갖게 됩니다. 부활 생명 앞에서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사상, 지식, 인간관계, 교회까지도 상대화되고 새로운 차원을 갖게 됩니다. 이 모든 변화는 부활 생명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키시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그 부활 생명을 선취하여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신비로울 뿐 아니라 부활 생명의 방식이 은폐의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잘 알지 못합니다. 부활 생명의 형식이 신비하고 은폐의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죽어 땅에 묻혀 썩어 질료가 산화한 사람이 다시 형체를 입고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연과학 자체가 한정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연과학이 인간을 무지에서 일깨우는 일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지만, 진리가 자연과학에 따라서 재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현대과학은 과학적 사실의 한계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불확정성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하이젠베르크는 그동안에 이루어진 물리학적 이론들이 미시의 세계에서는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관찰의 대상이 되는 미립자는 관찰되는 그 순간에 다른 형태로 변해버리기 때문에 물리학적 관찰과 실험으로 밝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막대기가 풍선을 건드리는 상황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막대기가 풍선에 가한 에너지가 0이라 풍선의 운동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막대기가 건드리기 전과 건드린 후의 풍선의 위치는 각각 다르겠지만 그것은 막대기 작용과 상관없이 불확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풍선의 정확한 위치라는 것이 애초에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막대기로 풍선을 건드리는 순간 풍선의 위치가 관측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풍선이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풍선을 건드리는 순간 관측으로 확인하는 것이지 건드려서 관측하기 전과 후에 풍선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불확정성 원리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생물학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이 나름 과학적이라고 해도 모든 생명체가 반드시 그런 기계론적 질서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범주 안에서 타당한 자연과학이나 진화론이 궁극적인 생명이나 영적 존재나 영적 세계까지 재단하는 것이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자연과학이 자기 분수를 넘어서는 교만이고 어리석음입니다.
부활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오해와 왜곡은 부활을 생물학적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을 믿는 신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들은 부활을 일종의 재생으로 생각합니다. 굶주림, 질병, 고통, 슬픔이 없으며, 사자가 어린 양과 놀고, 어린아이가 독사와 장난하고, 사시사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천사와 같이 노래하며 늘 기쁨과 자유의 충만을 누리는 것을 부활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이런 서술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이 땅에서 추구하던 삶의 욕망을 죽음 이후에도 연장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일종의 유토피아니즘이지 부활 생명의 온전한 형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부활 생명의 형식이 은폐되어 있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 나라와 부활 생명의 형식을 인간의 생각이 닿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세계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상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황금보석 꾸민 집, 전쟁과 질병과 고통이 없는 곳, 기화요초 만발하고, 온갖 과일 풍성하고,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믿음의 선진들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재회하게 되는 것을 상상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사랑하는 사람과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사고로 사별하게 되면 질병과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와 부활을 생각하고 거기서 기쁨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재회할 것을 기대합니다.
하늘나라에서 부활 생명은 당연히 질병과 고통이 없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재회할 것이지만 그런 이해는 하늘나라와 부활 생명에 대한 이 세상적 수준의 이해일 뿐 아니라 심하게 말하면 오해와 왜곡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와 부활 생명은 이 세상에서의 성과 노소와 관계가 폐기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는 천사와 같아서 혼인도 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젊음과 늙음, 상관과 부하, 과거 현재 미래가 폐기되거나 초월 되기 때문에 그 상태가 어떨지는 우리의 상상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와 같을 하늘나라와 부활 생명을 기껏 질병과 고통이 없는 상태나 이 땅에서 사랑하던 사람과 재회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도 유치한 수준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심장과 뇌가 작동하지 않는 생명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 생명은 우리 몸의 장기나 세포의 작용과 상관없이 영원히 그리고 풍성히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단순한 영혼 불멸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 생명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몸이 포함된 온전한 인간으로의 부활이며 그 구체적인 상태와 현상은 최후의 종말 때까지 하나님의 은폐 가운데 들어있게 되므로 인간적 상상으로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3,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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