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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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1-05-0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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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 중에 가끔 개인적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말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계시를 마치 영성이 깊은 개인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비로운 뜻을 비밀스럽게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원칙적으로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의 역사와 그 특성과 점진성을 고려할 때 개인이 비밀스럽게 받았다고 하는 계시라는 것은 건전한 것으로 인정하기가 어렵고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개인이 받았다고 하는 계시는 앞선 모든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의 권위를 폄하할 위험성이 많고 그 결과 교리와 신학 그리고 교회의 질서까지 혼란하게 하기도 합니다.
또한 신학 용어 중에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이 용어는 신학적으로 신론과 계시론이 결합되어 있는 용어입니다. 신론과 계시론은 둘 다 그 내용의 난해도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그 둘이 결합된 것이라면 얼마나 더 어려울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론과 계시론은 그 깊은 연관성이 오히려 이해를 도와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르트 신론의 중심 개념인 "기독교의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다." 라는 이 말이 하나님과 계시의 동일화를 뜻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에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라는 주장 까지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지만 계시가 곧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계시로 존재한다는 말은 지나친 주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무한성을 전제할 때 계시는 하나님 존재의 전부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계시로 존재한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존재와 계시 그리고 통치의 신비스러운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잘 모릅니다. 잘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그분의 존재와 계시 그리고 통치를 실존적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을 곧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이나 하나님은 통치로서 존재한다고 규정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알게 되는 때는 주님이 다시오시는 역사의 종말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도 계시도 그리고 그분의 섭리와 통치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에 역사의 종말까지 완전하게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하나님과 계시를 완전히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를 진심으로 알기 원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더 풍성하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더 풍성해 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고 풍성해 질수록 바른 신앙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행위들은 누가 참으로 하나님이었는지를 입증했습니다. 참 하나님은 애굽인들이나 가나안인들의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참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독특하게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유일하게 홀로 모든 일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과 모든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엄청난 일들을 이루어 당신의 정체와 성품을 드러내셨습니다. 구약의 계명과 율법을 대할 때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정체에 구약의 계명과 율법이 기초하고 있고 모든 보편 가치도 동일한 기초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따라 가거나 하나님을 우상화 했을 때 그 파급효과는 단지 종교적인 영역 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몰락과 국가적 재앙을 초래하였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행동 하느냐는 인간이 무엇을 또는 누구를 숭배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이나 오늘의 이곳 미국이나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 지우기를 빙자하여 기독교를 지우려는 자들은 무신론자이거나 왜곡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거나 아무런 의식 없이 무지가운데 동시대 지배적 경향을 따르는 자들일 것입니다. 인간이 이성의 그릇에 하나님을 담지 못할 때 무신론자가 되어 무지하고 무모하게 하나님을 대항하는 문화를 만들거나 거기에 동조하여 따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납득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이성적으로만 알아가려고 하지 않고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봅니다. 하나님은 먼저 행동 하시고 그 다음에 사람들에게 응답하라고 촉구 하십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의 율법과 도덕적 교훈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먼저 주도적으로 행하여 구속하는 행동을 하시고,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의 행동에 걸맞는 반응을 요구하십니다. 구약의 계명이나 율법이나 도덕적 교훈들은 맹목적인 순종이나 시간을 초월한 원리들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가운데 이루어지는 응답과 감사의 문제입니다. 율법 그 자체만을 대할 때는 그렇게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명이나 율법이나 도덕적 교훈이 자리 잡고있는 내러티브의 틀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 오경 맨 첫 성경을 펼치면 계명이나 율법이 등장 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과 율법을 만나게되기까지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절반에 할애된 내러티브 속으로 들어가게됩니다. 그리고 그 내러티브의 틀은 오경 전체를 통해 유지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의 이야기, 즉 내러티브 문맥 가운데 주어져 있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창조주이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 내러티브에서 인간 이성과 감성이 미치지 못하는 창조의 경이에 대해서, 인간 반역의 비극에 대해서, 아브라함과 그의 백성을 부르신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그 한 민족에 대한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나머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통치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그 역사적 사건들을 대하면서 이스라엘 만큼은 아니지만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을 지나기도 하고, 그들 역사의 여정 가운데서 하나님의 긍휼과 인내와 진노와 심판과 통치를 목격하며 이스라엘과 함께 경탄하게 됩니다. 그 내러티브 안에는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행위가 있고 이스라엘은 그 경험을 통해서 그들이 얻은 계시와 경험, 전통과 도전, 빛나는 모범들과 엄청난 실패들이 축적되어 있는 창고를 우리에게 물려 주었습니다. 성경의 내러티브는 거대한 양탄자와 같고 하나님의 계시와 행위는 그 양탄 자 위에 수놓아진 그림과도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적 내러티브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행위를 기억하며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기억과 기대의 공동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기억과 재 진술을 통해서, 그리고 그 일이 미래에 대해서 갖게했던 기대를 통해서 그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의 내용을 배우고 그에 합당한 삶의 윤리적 속성을 배웠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는 내러티브가 역사적 시공 간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만남을 증거 해주고 있다는 신념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품은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이전 행위들을 기억하고 재 해석함으로써 형성되었습니다.
출애굽기 초두에 애굽에서 압제 당하면서 견딜 수 없어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은 행동을 취하십니다. 하나님은 일련의 강력한 행동들을 통해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들을 시내 산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법을 주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것은 그분 자신의 성품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셨던 약속에 대한 신실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내러티브를 통해 드러나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불 붙은 시내 산의 가시 떨기 나무에서 모세를 처음 만났을 때, 거기에서 자신의 법을 계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을 먼저 주고 잘 지키면 구출해 주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기 전에 어떤 조건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먼저 행동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은 구원이고 그 다음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어떤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행할 법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이스엘에게 당신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순종하는 것은 은혜를 얻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입니다. 창세기를 제외하고서도 출애굽기는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열여덟 장을 할애하고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출 19:4-5절은 하나님의 구속의 이야기와 율법 수여 사이를 연결해주는 연결 고리와 같은 말씀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했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했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 : 4-5). 하나님은 이전에 행하셨던 자신의 행동에 주목하라고 촉구 하십니다. 석 달 전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자신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 그리고 바로에 대한 심판이라는 사건들의 결합에서만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구원 하셨으며,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건져내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고, 그런 다음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지키라고 요청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도 바로 주지 않고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 20 : 2)라고 하시며 자신의 정체(나는 여호와니라)와 구속 활동 (나는 너를 .. 인도하여 낸 )을 밝히시고, 이어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출 6:5-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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