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은폐성, 부활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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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1-04-1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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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계시라함은 그것이 인간 이성에 의한 논리적 설명이나 논증이 아니라 그 내용과 방법이 초월적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어떤 인물에게 보여주는 개인적인 체험의 사건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계시 되었다고 하며 또한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 이성을 가진 책임적인 존재로 창조 되었기에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면에서 누구나 더듬어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다고 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계시가 은혜라는 면에서는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내용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의 논리성과는 상관없이 믿고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에 대한 우리의 전제는 어떤 계시가 논리적으로 모순되거나 모호할 경우 믿지 못할 것으로가 아니라 계시의 은폐라고 받아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지만 또한 그 계시는 은폐의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계시라는 말이 드러내 보여준다는 뜻인데 그 계시가 은폐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논리적으로는 모순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은폐성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은폐성을 잘 모르면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오해하거나 왜곡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과 성경이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분에 대해 아는 것은 지극히 부분적이고 나머지 많은 부분은 은폐되어 있습니다. 은폐되어 있는 부분은 마지막 때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글에 이어 부활의 은폐성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부활절에만 부활을 기념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면, 우리의 부활 신앙은 죽지 않고, 늙지 않고, 젊고 건강하게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에 지배 받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고 우리가 다 상상할 수 없는 생명 완성의 차원으로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단순히 죽기 전의 상태로 돌아 온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단순히 인간의 실존적 경험으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제자들의 실존적 경험이 부활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소위 스스로 지성적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중에는 실증적 과학주의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부활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신화적 사건으로 생각하여 단지 실존적 경험으로서만 의미가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의 부활이란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그의 제자들에게 되살아 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단순히 육체적으로 되살아 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부활을 주술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게 될 위험이 있고, 부활을 실존적 경험의 차원에서만 받아들이려는 것은 하나님 자기 계시의 초월성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며, 부활 자체가 초월적이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사실을 과학이나 논리로 다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은 인간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부활의 은폐성 때문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기록한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논리적으로가 아니라 자신들이 경험한 신비롭고 충격적인 현상에 대해 솔직하게 진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증적이지 않고 산만하기까지 합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앞에 현상으로 다시 나타난 예수가 보통 인간처럼 말도 하고 먹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치 혼령처럼 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으로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개인에게도 나타났고,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도 나타났으며, 실망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두 명의 제자에게 나타났고, 수백 명의 군중들에게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의 나타남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논리적 일관성을 뛰어넘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가 하는 점을 여러 증인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확증한 후에, 우리도 역시 그렇게 부활한다는 점을 증언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라."(고전 15:51-53).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변화"입니다. 바울은 우리 믿는 자들이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변화한 그분의 능력으로 마치 옷을 갈아입듯이 변화한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은 곧 생명의 완성인데, 그것은 우리가 인간 이성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생명 형식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썩기 때문에 전혀 차원이 다른 썩지 않는 생명 형식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 믿는 자들은 썩지 않을 생명으로 덧입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이나 부활 생명을 사물을 인식하듯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나 부활 생명의 은폐도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존재와 그분의 뜻이나 부활 생명 같은 것의 은폐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아 답답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완전하고 명쾌한 인식이 불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이 감춰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그분을 알아가지만 동시에 계시 자체가 은폐되어 있음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수백 번 읽거나 성경 전체를 다 외우고 물리학이나 철학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고 전하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하나님과 영적 진리에 대한 인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이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분이 우리 가까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계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우리를 긴장하게 하고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의 부활 생명을 소유하고 경험하고 누리지만 주님이 재림하는 마지막 때에 가서야 부활 생명이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과 관계 된 은폐 된 모든 것의 비밀이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생명을 새 생명이라고 합니다. 거듭난 새 생명과 부활생명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새 생명은 온전한 부활생명을 지향합니다. 마지막 날에 온전하게 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도 부활 생명을 누리고 드러내며 증거하며 삽니다. 우리는 부활 생명을 누리고 증거하는 삶의 본을 예수님께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마지막 단계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종려나무 가지가 아니라 그냥 나뭇가지로 되어있고, 그것도 흔든 게 아니라 예수님이 가는 길에 깔았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탔다고 하였고, 공관복음은 그 어린 나귀를 어떻게 구했는지도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이런 차이가 있지만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그 사건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을 대강 설명하면, 이스라엘의 북쪽 마을인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사마리아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와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활동하시다가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 당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공생애 마지막 단계에 예루살렘 근교인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제자 두 명에게 마을에 들어가서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얹기도 하고 길에 깔기도 했고, 나뭇가지를 길에 깔기도 하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막 11:9,10절).
이 장면에는 두 가지 중요한 상징적 사건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탄 동물이 나귀 새끼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나뭇가지와 겉옷을 길에 깔았다는 것입니다. 권위 있게 보이려면 나귀가 아니라, 말을 타야만 했습니다. 스가랴 9:9,10절에 보면 평화의 왕인 메시아는 새끼 나귀를 타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전차와 말과 활을 없애고 민족들에게 참된 평화를 선물로 줄 분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나귀 새끼를 탄 것은 평화의 왕을 상징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깐 것은 제왕 의식에 속하는 것으로 실제적 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타지 않는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제왕의식을 상징하는 예의 행동을 하였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한 편의 코메디 같은 해프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크게 소동을 일으킨 사건도 아니고 대부분의 예루살렘 시민들은 관심이 없었고 종교 지도자들은 이 때 예수님을 적대시 하였기 때문에 혹시 모를 불상사를 염려하여 경계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을 둘러보고 조용히 예루살렘을 빠져나간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우스깡스러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두 상징 사건의 진정한 의미도 모른 체 제왕 의식 같은 환영을 하였지만 정작 예수님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환영 받는 걸음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예루살렘 입성의 감당하기 어려운 의미의 무게를 예수님 홀로 지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뿐 아니라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공생애 3년을 외롭게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면에서 언제나 혼자였는데, 그런 면에서 예루살렘 입성도 예수님 혼자 하신 거나 마찬가지였고,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께로 부터도 철저히 버림 받았다는 느낌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쳤는데, 그 죽음을 예상한 예루살렘 입성이라고 생각할 때 예수님은 자신을 환영하는 인파 속에서도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철저히 버림 받는 것을 상징함과 동시에 부활 생명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자 그를 따르던 이들은 혼비백산하였습니다. 집과 직장과 가족을 떠나 주님을 따랐던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실은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 자신도 몰랐습니다. 가능하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그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지난 3년 동안의 생활을 되돌아보며 각자 제 갈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죽었던 예수님이 살아났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경험은 죽었던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는 경험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경험하고, 집단적으로도 경험하였습니다. 그 경험이 무엇인지 그들은 구체적으로 묘사할 능력이 없었지만, 그들에게 분명한 것은 죽었던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무엇인지 마음을 열고 생각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그 경험이 구약에서 이미 예언으로 제시된 부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확연해졌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행하신 모든 사역이 메시아의 일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만이 메시야이며, 그리스도이고,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밖으로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뒤돌아보며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깨닫게 된 사건들 가운데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이 나오고, 12장에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 예루살렘에 방문했던 몇 명의 헬라인들이 빌립을 찾아와 예수님을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3-24) 이 말씀은 예수님이 죽어 부활하실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에서 이 말씀을 하시기까지의 사건들을 쭉 연결해보면 나귀 타시고 입성하신 사건은 부활의 퍼포먼스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이 부활을 보여 주시는 사건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이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직접적으로 만났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의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의 신앙에서 늘 새롭게 반복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은폐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 퍼포먼스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 퍼포먼스는 부활 생명의 형식입니다. 겸손하게 묵묵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부활 생명으로 사는 부활 퍼포먼스의 삶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요 12:16)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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