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꿔서는 안 될 가정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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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1-05-2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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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문화 지우기 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지워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정 제도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현대인은 성을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혼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끼리 또는 여자끼리 하기도 하고 심지어 반려동물과 결혼하는 예도 있고 그러한 결혼이 합법화된 나라가 여럿입니다. 전통적인 가정은 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을 통하여 세워지는 것으로 사람들은 믿었고 동성결혼이나 동물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가정은 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을 통하여 세워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법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가정의 조건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연히 가정에 대한 정의도 달라졌습니다.
가정의 조건을 바꾸어 버린 사람들은 처음에 인권 운동과 성차별의 폐단을 개혁하자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권 유린과 성차별 악습 폐단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지만, 인간의 의식과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그 폐단과 악습은 조금씩 개선됐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그러한 악습과 폐단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특히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또는 독재 체제와 같이 통제가 심한 국가나 사회에는 인권 유린과 성차별로 희생과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인간 세상에 인권 유린과 성차별 같은 폐단이 완전히 사라지기란 불가능한 일이지만 자유가 보장된 국가나 사회에서는 인권 운동과 성차별 철폐 운동의 성과로 인하여 그 폐단이 상당할 정도로 개선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인권 운동과 성차별 인종차별 철폐 운동이 도를 넘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는데, 인권 운동과 성차별 인종차별 철폐 운동이 도를 넘어 인권 역차별과 성 구별 철폐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곳 미국은 학교에서 또는 국회에서 성의 구별을 드러내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과 법을 만들고 있습니다. 가정의 조건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인데 성 구별을 철폐하고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여 그 조건을 바꾸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절대 권위를 부정하는 무신론은 그분이 만들어 놓은 절대 바꿔서는 안 될 가정의 조건을 바꾸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창조 질서와 가치 질서가 무너지게 되어 그 질서 안에 보장된 인간의 생명과 복지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적 그리스도나 반 기독교 세력 또는 정치 집단이나 세속 사회 집단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WCC는 여성의 인권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여 왔는데, 그 관심이 지금의 인권 운동이나 페미니즘과 깊이 연계되어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초기에는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동등권을 요구했지만, 1990년 이후로는 남여 동등권 요구 차원을 넘어 모든 삶의 사회적, 기능적인 영역에서 여성들의 동등한 지위를 요구하였습니다. 21세기에 들어오면 그 운동은 젠더 이데올로기가 되어 젠더 주류화 운동(Gender Mainstreaming)으로 진보하는데, 그 내용은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성 구별을 철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차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단순히 성차별을 철폐하자는 운동으로 알고 지지하고 참여하는 동안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교묘한 방법으로 그 운동을 성 구별을 철폐하자는 이데올로기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이들은 남녀의 생물학적 성별을 부정하고 모든 남녀의 성적 동일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젠더 이데올로기는 유사종교(eine Quasi-Religion)로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인 거룩한 혼인과 가정과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유사종교란 종교가 아니면서 종교가 지니는 절대성, 독선적 타당성, 총체성 등 인간 삶의 종교적 의식화(출생례, 청년례, 혼인례, 장례)”를 요구합니다. 그 예는 공산주의, 모택동주의,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전체주의, 환경운동, 세계화 운동, 스포츠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의 성 차별 철폐운동에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연합하는 일부일처제라는 결혼 제도에 대항하여, 레스비안적(Lesbian), 게이적(Gay), 양성애적(Bisexual), 성전환적(Transgender), 퀴어적(Queer), 혼음적 형태가 “성적 다양성”이라는 표현과 명분을 내세우며 합법화하는 왜곡된 공동체로 기존의 전통적 질서와 제도를 지우며 그 위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성차별 철폐 운동은 자신들의 운동을 유사종교로 규정하는 것을 숨겨왔으나 이제는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coming out) “성적 지향” 조항을 국가인권위원회법 가이드라인에 슬그머니 집어넣고,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동성애와 동성혼을 합법화 할 뿐 아니라 이성애자들을 역차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년 퀴어 축제로 이 동성애를 전 국민에게 파급시키려는 운동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고인이 된 박원순 서울 시장이 그 일에 많은 공을 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미국의 상황도 매우 심각합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라는 공화당도 이런 운동에 묵인하거나 동조해 왔다는 사실이 점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싫어하는 트럼프라는 특별한 대통령이 나와서 그런 운동이 잠시 주춤하였지만, 지금의 바이든 정부와 민주당과 언론과 대학들과 젊은이들과 다수의 학자가 그 세력을 형성하여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기독교가 보수적이라는 공화당을 탓하는 것은 똥물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그 일에 앞장서 왔음을 통렬하게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가정은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창조된 후 처음 갖게 되는 관계는 부부관계입니다. 부부란 하나님이 세우신 신성한 혼인의 제도를 통하여 세우신 가정의 구성원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그보다 더 우선되고 근본적인 관계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감에 있어서 최선의 방법이 가정이고 인간 행복의 가장 근본적인 보장이 가정입니다.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잘 섬길 수가 있고 원만한 사회생활을 할 수가 있으며 또한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입니다. 가정이 원만하고 튼튼하고 건전하지 않고서는 교회가 든든히 세워질 수가 없고 사회도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은 화려한(?) 독신도 많지만,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독신으로 살아도 되는 이유를 딱 한 가지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결혼을 포기한 경우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에서의 독신은 장려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독신은 그 자신이 행복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행복하지 못하게 합니다. 요즘 화려한 독신을 꿈꾸는 여성들이 많은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이 가능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날에는, 성차별 때문에 여성의 독신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결혼을 했다가 홀로된 여자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했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구제와 돌봄의 대상이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생활의 최선의 조직이고 방법입니다. 또한,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는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관없이 그것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의 기원에서 그 조건에 대하여 먼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아쉬운 점은 성경이 가정에 대하여 체계적인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사회학이나 생물학이나 심리학이나 과학이나 의학이나 기타 그런 주제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가정에 대하여 중요한 원리나 교훈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섬기는 원리나 방법이나 자녀 교육에 관한 아주 소중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훈이 체계적으로 교과서처럼 기록된 것이 아니고 원리나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자녀를 양육하면서 어떻게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하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교훈을 받게 합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사무엘이나 그 외의 여러 신앙의 인물들에게 탁월한 점이 있는 것을 보지만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성경은 그들이 어떤 면에서 실패하고 있는가를 보면서 우리가 교훈을 받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혼인을 통해 가정의 제도를 세우신 기록에서 매우 특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 2: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어떤 것을 지으신 후에는 후렴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짐승도 나무도 곤충도 채소도 하늘의 일월성신도 천지간에 있는 온갖 종류의 원리들과 법칙들과 모습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창조된 그대로 좋았습니다. 거기에다 무엇을 더 첨가할 것이 없고 뺄 것도 없고 손 볼 것도 없고 창조된 그대로 귀하고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 사람만은 창조된 그대로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아담은 생물학적으로는 완전한 존재이지만 영적으로 또 사회적으로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은, 사람이란 혼자서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실수를 해서 아담을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을 혼자서는 불완전한 존재로 지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지으셔서 아담과 짝지어 주시므로 아담이 비로소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창 2: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씀은 둘이 하나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비로소 온전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으신 것은 불완전한 상태이고 미완성의 상태입니다. 아담에게 하와가 더하여질 때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는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형상이란 신체적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체가 없는 신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영적인 성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이라고 합니다. 인격(人格)이라는 말은 우리말에 사람 인(人)자가 들어가기 때문에 인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본래 인격이라는 말의 뜻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고 책임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책임적인 존재라는 것은 생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무엇을 결정할 수 있고 또 책임질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책임적인 존재는 다른 인격체와의 관계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 상호 관계를 전제합니다. 그 관계 가운데서 인격적인 소통, 즉 책임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인격적 관계, 즉 책임적 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나 외에 다른 인격체가 없이는 나라는 존재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무슨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이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일신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세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당신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는 복수(複數)를 사용하셨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을 지으실 때는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였지만, 사람을 지으실 때만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냥 하나님이라고 해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덧붙여 “우리”라고 한 것은 그 뒤에 나오는 “형상”이라는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형상이 인격적인 것을 의미하고, 인격적이라는 뜻이 책임적인 관계를 전제한다면 하나님 혼자서는 인격적이라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세분이니까 거기에 인격적인 교통이 있어서 인격적이라는 말이 가능하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남자와 여자 즉 남편과 아내가 인격적, 즉 상호 책임적인 관계를 이루어 나갈 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고 온전한 사람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혼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 보일 수 있고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상호 인격적 관계, 즉 책임적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자아를 실현하여 사는 것이 최선이고 또한 가장 귀한 복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가정의 조건을 바꾸는 것은 인간 존재와 삶의 최고의 가치와 가장 귀한 복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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