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모든 인간 공동체는 악을 억제하고 선을 도모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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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1-05-1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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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모든 국가를 비롯한 공동체는 경제적 생산성을 목적으로 하는 합리성 외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아마도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가치관 때문일 것입니다. 세계 모든 나라가 다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장 많은 세계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인간의 인위적인 제도는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인간 세상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제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가장 이로운 현실적인 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공산주의 체제, 독재 체제, 반자유주의 체제 등 여러 정치체제 중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가장 성공적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데 종교개혁자 존 칼빈의 공헌이 크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칼빈 신학의 별명이 정치 신학입니다. 기독교 안에서는 칼빈의 공헌을 교리와 신학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칼빈의 사상은 신학 사상보다 사회사상 연구에서 더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칼빈의 신학은 정치와 사회사상과 경제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어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브가 칼빈을 자본주의의 창시자라고 본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주장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칼빈 신학의 대표적 특징은 예정론입니다. 베브가 자본주의에 대한 칼빈의 공헌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예정론에 주된 관심을 쏟은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칼빈 신학에서 예정론보다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 절대주권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은 인간의 전적인 무능과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칼빈은 인간이 옳은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옳은 것을 선택할 자유마저 상실했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예정론은 바로 이런 전제의 결론인 셈입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해서 구원을 받을 만큼 의롭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고 의를 선택할 자유조차 상실했기 때문에 한 개인이 구원을 받을 가능성의 유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칼빈의 예정론을 오해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상식적 이해의 토대에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정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시간상으로 어떤 사람의 구원이 미리 결정되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구원이 인간 자유의지의 선택으로 결정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시간의 전후가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을 예정해 두었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으로 결정한다는 점입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아무 책임도 묻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가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면서 이와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교리 주장을 하는 것에 부담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칼빈은 인간의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구별한 것 같습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했지만 모든 선택이 불가능해진 것은 아니며, 의지의 기능 자체가 파괴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 같은 칼빈의 성경 이해의 맥락에서 우리는 정부 정책이나 가정에서의 일과 인문과학 및 공학 등에서 사람은 상당할 정도의 자유와 이해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그런 것까지도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고, 그마저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성령의 그 사역을 성화시키는 것으로 보기보다 타락을 억제하기 위함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에 역행해서 선택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의지가 타락했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논리적 모순을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은 하나님 뜻의 신비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은 이론이나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신앙에 있어서 실제적이고 실천적이며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막스 베버가 바로 이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자본주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하나님 중심 사상은 개인의 구원조차도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더 큰 목적의 수단으로 간주하게 합니다. 세속 사상과 철학에서는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요 목적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요 목적이며 사람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그분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가르칩니다. 교회도 이와 같은 성경 원리의 연장 선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도구이고 은혜의 객관적인 수단인 동시에 공동체를 거룩하게 만들고 사회로 하여금 악을 억제하고 선을 도모하여 하나님의 지배가 실현되게 하는 도구이며 통로의 역할을 감당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개인과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도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들은 교회의 일원일 뿐 아니라 국가의 국민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교회에서의 임무 못지않게 정치영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임무에 대해서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국가가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서 악을 억제하고 선을 장려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국가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건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사회에서도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과 국가가 악을 억제하고 선을 도모하고 장려하도록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국가는 교회를 보호하고 온 국민과 함께 가치 질서와 사회의 건전한 질서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국가는 창조 질서를 파괴하거나 신성을 모독하는 악행에 대하여 공적 보복을 가할 폭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았습니다. 국가는 인간의 부패에 대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응징하도록 세워졌기 때문에 국가의 권위는 국민으로부터 위탁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국가나 정부의 기본목적은 소극적으로 악을 억제하며 적극적으로는 국민을 교육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며 복지를 증진하며 공공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국가는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쟁할 권리가 있으며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나 정부는 직무를 유기하는 범죄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쟁은 부당하고 무자비하며 잔인한 대모의 살상의 악을 억제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어야 합니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 성경이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것을 자본주의로 보는 것은 인간의 약점과 구체적 현실에 어느 정도 타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사회주의는 성경의 이상적인 가르침을 타락한 인간성에 대한 고려 없이 제도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와 문화가 세속화 되고 교회가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오늘날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세상은 여전히 인간 이성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유지되고 보존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인간과 인간 공동체에 허락한 창조 질서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윤리적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창조 질서와 하나님 나라 원리에서 유추해보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창조물과 문화는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한 것은 단순히 교회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은 유기성에서 깊은 관련이 있고 국가와 사회도 그 연장 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마치 몸의 지체들처럼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그 유기적 관계가 정상적일 때 교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유기적 건강은 당연히 사회로 이어져야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모든 창조물의 유기적 성격을 고려할 때 교회가 사회와 유기적 관계를 떠나서 건강할 수 없고 또한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가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고 창조 세계 전반에 미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비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비록 타락했지만, 어느 정도의 이성이 남아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섭리가 온 우주와 인간사회를 섭리하고 조정하기 때문에 역사와 사회는 결코 우연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의식으로 모든 인간은 서로에 대하여 또한 모든 창조물에 대하여 윤리적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 하고, 국민은 통치자에게 복종하여야 합니다. 부자는 지나친 욕심을 절제해야 하고 가난한 자는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과 공익을 위해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길에 진정한 인간 복지와 생명의 풍성함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사 43:21, 롬 13: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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