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 목사 “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7-조선의 노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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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1-07-2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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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반도를 노예제 사회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노예제 사회가 아니라고 하여 노예제 사회보다 인종차별이 심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노예제 사회는 노예와 노예제 개념에 의해 규정됩니다. 노예란 다른 사람의 소유권 하에서 강제로 부림을 당하는 사람으로 주인이 물건처럼 매매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국제연맹이 채택한 노예제 조약(Slavery Convention, 1926)에서는 노예를 "Slavery is the status or condition of a person over whom any or all of the powers attaching to the right of ownership are exercised"로 정의하였습니다. 노예제를 주인에 의해서 소유권과 관련된 권력의 일부 또는 전부가 행사되는 개인의 지위 또는 조건으로 볼 때 노예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행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조선의 노비는 노예의 다른 이름일 뿐 노예보다 결코 나은 대우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노예제 아래에서의 노예나 조선의 노비는 모두 주인의 재산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느냐는 전적으로 주인의 인품에 따라 달랐습니다. 조선에서 남자 노비를 노(奴), 여자 노비를 비(婢)라고 하여 노비라고 불렀습니다. 조선 시대 노비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노예처럼 주인이 때려도 되고, 죽여도 그만이었습니다. 옛 그리스나 로마 그리고 조선에서도 법은 노예나 노비를 주인이 사적인 감정과 판단으로 죽여도 된다고 허용하지 않았지만 그 법은 노예나 노비들의 인권과 생명을 실제로 보호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노예나 노비는 주인의 부당한 폭력에 그 어떤 항변도 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은 노예제 사회가 아니었지만, 노비들은 노예제 사회의 노예보다 어떤 면에서는 가혹한 처우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노예는 전쟁 포로였지만 조선의 노비는 동족을 노비로 삼았기 때문에 출생 신분에 따른 원한이 더 깊었을 것입니다. 조선 시대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고려 시대가 오히려 노비에 대해 조선 시대보다 더 너그러웠습니다. 후삼국의 통합과정에서 양인들이 국가에 대한 의무 역할인 유역(有役)에서 이탈하거나 전쟁포로로 노비가 됨으로써 양천(良賤)이 뒤섞이고 양인과 천인이 혼인하는 일이 증가하여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는 신분상의 혼란이 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초기부터 양천교혼(良賤交婚)을 금지하였습니다. 이를 어기는 당사자는 물론 사실을 알고도 묵인한 노비의 주인도 처벌하였습니다. 특히 양인 여자와 남자 노비가 혼인하는 노취양녀(奴娶良女)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강상(綱常)의 윤리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에서 더욱 엄격하게 규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천교혼이 근본적으로 억제될 수 없었고, 이에 양인의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천자수모법이란 아버지가 양인이고 어머니가 노비인 경우 그 자녀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게 하는 법입니다. 천자수모법 시행으로 노비의 숫자가 증가하고 양인의 숫자가 감소하게 되자 세금과 군역 부담자의 감소라는 예기치 못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자 태종 14년인 1414년에 양인의 수를 증가시키려는 목적으로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을 만들어 시행하였습니다. 노비종부법이란 양인남자(良人男子)와 천인처첩(賤人妻妾) 사이의 자녀에게 부계(父系)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하는 법입니다. 그 후 또 이에 따른 폐단이 발생하자 그 법 시행과 폐지에 대한 논의가 거듭되다가 1432년(세종 14)에 폐지하고 종모법을 시행하였고 세조 때에는 부모 중 한 쪽이 노비이면 그 자녀는 모두 노비가 되게 하였습니다.
노비제에 대한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비교해보면, 고려 시대에는 노비의 숫자가 조선 시대보다 많지 않았고 노비가 양인이 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었습니다. 또한, 고려의 노비들은 주인의 불법 행위를 고소할 수 있었지만, 조선 시대에는 부민고소금지법이 만들어져 일반 백성은 정부 관리들의 죄를 고발할 수 없게 하였고 노비고소금지법도 만들어져 노비들은 주인에게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하여도 호소할 데가 없었습니다.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로 넘어와서도 한동안 노비에 대한 처우는 고려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양인의 수가 줄어들고 노비 인구가 늘어나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거듭 일어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시대는 고려 시대보다 노비 인구가 증가하였습니다. 조선의 노비 인구를 증가시키는 데는 왕과 고위 관료들과 양반들의 이기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노비의 숫자가 증가하는 것은 곧 양반들의 재산이 증가하는 것이고 노비의 노동을 이용하여 이익을 증진할 수 있기 때문에 노비 숫자를 증가시키는 법을 제정하는 왕은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증가한 노비의 숫자는 전체 인구의 30-40%에 이른 때도 있었습니다.
노비가 처음으로 생겨난 것은 전쟁포로나 반역이나 모반에 따른 형벌로 노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노비가 되면 노비의 자식은 태어나면서부터 노비의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조선 시대 초기에는 고려 시대처럼 노비가 양인이 되는 법이 있었지만 후에는 그 법이 폐지되고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되는 것으로 법이 바뀌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필요에 따라 노비에 관한 법을 고쳐 양인의 수를 줄이거나 늘이기도 하였고 노비의 수는 줄곧 증가시켰습니다. 양인의 수를 줄이고 늘이는 것이나 노비 숫자를 늘리는 정책과 법을 만드는 데 있어서 노비들의 인권 문제가 제기된 된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세종은 성군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세종은 한글 창시를 비롯하여 조선의 안정과 발전을 위하여 노력을 많이 하였으며 많은 업적도 남겼습니다. 세종 때에 문화와 인쇄술, 농법, 지리학, 천문학 등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1419년 대마도 정벌(세종1)도 세종의 업적입니다. 세종은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 유역에 4군을 두고, 두만강 유역에 6진을 설치하여 조선의 영토를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넓혔습니다. 궁중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젊은 학자들이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집현전을 운영한 까닭은 훌륭한 학자를 키워 내고 활발한 학문 연구를 위해서였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여러 가지 공동 연구를 수행하여 유교와 관련된 다양한 책을 펴냈습니다. 그리고 지도를 제작하고 금속 활자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또한 조선의 전통 음악도 발전시켰습니다. 조선 시대 궁중 음악은 향악, 당악, 아악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향악은 우리나라의 전통 음악, 당악은 통일신라부터 고려 시대까지 들어온 당나라 음악, 아악은 고려 때 송나라에서 전해진 궁중 음악입니다. 잔치 때는 주로 향악과 당악이, 제사 때는 아악이 연주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 음악이 제사 때 사용된 것입니다. 이에 세종은 아악을 정비하여 조선식 아악을 창제하게 하고 우리의 음악인 향악과 조화롭게 연주되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명하였습니다. 세종의 명을 받은 박연은 아악을 정리하고 편종과 편경 등 아악기를 만들어 조선의 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 세종은 조선의 현실에 맞는 농사법을 소개한 「농사직설」을 만들어서 농업 발전에 이바지하였고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세종은 성품이 온건하여 무엇이나 무리하지 않았고 학술, 음악, 과학, 외교 등에 업적을 남겨 당대 양반들과 사대부들에게는 성군이었습니다.
세종은 사대부와 양반들에게는 성군이었지만 노비들에게도 성군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세종이 만든 여러 노비 관련법에 일체 노비의 인권을 고려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비에 관한 여러 법이 노비들의 처우와는 무관하고 단지 사대부와 양반들의 이익과 정권 차원의 필요만 고려되었기 때문에 인권 차원에서 볼 때 악법입니다. 세종이 노비와 양인의 혼인을 허용하였는데, 노비와 양인의 혼인을 허용한 법이 언뜻 생각하면 노비 인권의 신장 법 같지만, 그 법의 의도는 결코 노비 인권을 위하는 법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노비라도 어머니가 양인이면 그 자녀가 양인이 되는 법은 노비 인구를 감소시켰는데 그 이유로 사대부들은 노비가 양인이 되는 그 법을 싫어하였습니다. 세종은 사대부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 법을 폐지하고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되는 법을 만든 것입니다. 게다가 그전에는 금지되었던 노비와 양인의 혼인을 허용하자 노비의 숫자는 급속하게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노비와 양인의 혼인 허용법이 악법인 이유는 바로 노비 인구를 증가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법이 만들어진 이후 노비 인구가 급증하였습니다. 노비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사대부와 양반들의 재산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가 그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태평성대(?)이었을 것입니다. 세종은 양반과 사대부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이러한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성군일지 몰라도 인권과 자유의 차원에서 볼 때는 성군이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세종이 많은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능력 있는 왕으로 평가되는 것은 정당하여도 성군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옛 성인을 현대적 개념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무리이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조선 시대보다 수천 년 전부터 성경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과 자유를 가르쳤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도 노예제와 함께 인권 의식이 있었습니다. 세종이 만든 여러 노비에 관한 법들은 자유를 호흡하려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조치였습니다. 세종의 여러 업적은 높이 평가하더라도 그가 한 신분이 낮은 노비들의 인권을 무시한 일들에 대해서는 지금이라도 비판해야 합니다. 세종은 노비제를 확대하였고, 기생제를 확충하였으며, 사대주의를 강화하였습니다. 명나라에 대한 세종의 사대주의는 자국민을 위한 전략적 사대라고 하더라도 노비나 기생에 대한 세종의 조치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종은 1431년에 관비가 양인 남성과 낳은 자식 중 딸은 기생, 아들은 관노로 삼자는 형조의 건의를 수락했고, 1437년에는 국경지대의 군사를 위로할 목적으로 기생을 두라는 지시도 내렸습니다. 세종 시대는 기생의 전성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생의 전성시대를 만든 장본인이 세종이고, 무엇보다 세종은 노비와 기생은 피가 천하고 성적으로 난잡해 소생의 부계를 인정할 수 없는 금수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여 천민에게 인권은 없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세종만의 생각이 아니고 조선 시대 양반들의 생각이었습니다. 15세기 세종 시대에 한성 인구의 약 4분의 3이 노비였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층적으로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이 거느린 노비의 수만 1만 명에 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세종이 다스린 30년간 이룩한 업적은 조선왕조 500여 년의 기틀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를 더욱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세종과 그 시대 양반들의 인권 의식이 조선왕조 500년을 넘어 대한민국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선은 우리의 옛 나라이고 세종은 많은 업적을 남긴 유능한 왕이지만 조선인의 인권 의식은 철저하고 정직하게 비판해야 할 것입니다. 세종과 조선 시대 사대부와 양반들의 인권 의식과 그들이 노비들에게 가했던 악행들을 생각하면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만행은 조족지혈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지혜로운 민족이라면 우리를 침략한 나라의 만행보다 우리 선조들의 동족에 대한 만행을 철저하게 비판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 한국인들은 조선 시대의 인권 의식으로 오늘을 호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 1:32)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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