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6-자본주의맹아론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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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1-07-1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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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맹아론(資本主義萌芽論)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받은 지역에서 나온 주장으로, 식민지에서의 열강의 근대화가 없었더라도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근대가 도래할 수 있었다는 이론입니다. 맹아(萌芽)는 싹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열등한 식민지인들에게 근대 문물을 전파하여 개화시켜준 은혜가 있다'는 기존의 열강 중심의 이론에 대한 반항으로 대두된 것입니다. 유럽 대륙 내부에서도 맹아론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자체적으로 산업화를 달성한 나라는 영국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우연히 탄생한 것인지, 아니면 모든 인류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닿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맹아론은 사회주의권 국가에서 처음 대두되었습니다. 소련이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소위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인류 역사가 '세계사적 발전법칙'인 고대-중세-근대의 발전 과정을 거쳐왔다고 보았습니다. 이 주장에 동의하는 이들은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지역에서 세계사적 발전법칙이 적용됐음을 검증하려 들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사회는 원시 공산사회 → 고대 노예제 사회 → 중세 봉건제 사회 → 근대 자본주의 사회 → 현대 공산주의 사회 순서로 발전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를 역사발전 5단계 설이라고 합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먼저 등장하고 그다음에 공산주의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영국이나 미국이 아니라, 오히려 러시아와 중국같이 자본주의 발달이 미약한 나라에서 공산주의 체계가 성립되었습니다. 이때 중국 공산당에서는 서구적 발전법칙이 중국에서 역시 발견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자극을 받은 중국학계에서는 1920~30년대에 중국 자본주의맹아론을 펼치게 됩니다. 한국의 자본주의 맹아론은 마르크스 경제학자 백남운과 같은 사람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시작하였습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서는 소농이 부농과 빈농으로 분화한다고 주장합니다. 일제시대 이래 조선의 경제사 연구는 마르크스적 성향을 보여 왔습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경제학도는 혁명의 주체로서 빈농이 역사적으로 형성 발전해 온 과정을 추구하는 것을 소명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고인이 된 김용섭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학 극복을 목표로 조선 후기 농업사를 연구해 ‘내재적 발전론’을 정립하였습니다. 특히 고인은 18∼19세기 토지대장을 자세히 분석해 ‘경영형 부농’의 성장에 주목하였으며 이런 분석에 근거해 한국 농업의 내재적 발전론을 끌어내고 한국 근대성의 기점을 조선 후기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맹아, 즉 자본주의 싹이 조선 시대 후기에 발아하고 있었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 말기의 농민은 표준적인 경작 규모의 소농(小農)계층으로 수렴(收斂)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서 근대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사 연구에서 쉽게 무시하고 지나가면 안 되는 사실 하나는 조선의 노비들입니다. 영남대 이수근 교수의《경북지방고문서집성(慶北地方古文書集成)》이라는 책에 의하면 15~16세기 조선의 노비 숫자는 전체 인구의 40%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 시대의 중앙 관료들은 보통 200-300구(口=노비를 세는 단위)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고 800구에서 1천 구의 노예를 소유한 관료도 있었고 심지어 1만 구의 노비를 소유한 예도 있었습니다. 지방 관료는 적어도 70~80구의 노비는 가져야 실제적 힘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나 미국 남부 농장에서도 100명의 노예를 소유하는 것이 힘들었다는 점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당시 노비 1구의 재산 가치는 말 한 필의 가격, 혹은 666일의 노동 가치에 해당했습니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을 5만 원이라고 친다면 노비 한 구의 가격은 3,300만 원쯤 되는 셈입니다. 당시 200구의 노비를 가진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지금으로 환산하면 66억 원 정도의 재산을 가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왕실, 귀족, 사찰 등에서 일하는 소수의 가내(家內) 노비들이 있었지만, 많아야 전체 인구의 10%를 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각각의 인간들에게 특정의 역(役)을 부여하고, 그에 따라 양반, 상민, 노비 신분으로 차별하는 신분제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고려 시대 중앙의 귀족, 관료, 중앙군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농장(老莊)을 만들면서 가난한 농민들이 농장에 딸린 노비로 전락하였습니다.
마르크스주의‘세계사의 기본법칙’을 따르는 이들은 통일신라 시대를 노예제의 전성기로, 고려 시대부터는 노예제의 쇠퇴기로 봅니다. 하지만 최근 수집된 고문서들에 의하면, 조선에서는 14세기부터 노예제가 확대되기 시작, 16~17세기가 노예제의 전성기였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현상을 마르크스주의의 사적(史的) 유물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역사를 이론의 틀에 끼워 맞추는‘프로크루테스의 침대’의 전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신화에 따르면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아티카의 강도로 아테네 교외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면서 강도질을 했습니다. 그의 집에는 철로 만든 침대가 있는데 그는 행인을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혀서 키가 침대보다 크면 잘라내고 작으면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여서 죽였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침대에는 침대의 길이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있어 그 어느 사람도 키가 침대에 딱 맞는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역사적 사실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지 않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정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17세기 후반부터 조선은 일본과 중국 간에 중계무역을 하면서 한동안 경제적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에 따라 농촌에 시장(定期市)이 성립하고, 동전이 유통되었으며 집약농법이 성숙하고 상품생산이 촉진되었습니다. 당시 농가의 자립성이 높아짐에 따라 노비 인구가 감소하고, 소규모 가족과 세대(世帶)가 소농으로 자립하게 되었습니다. 노비 인구의 감소에 따라 농장은 서서히 해체되고 자립형 소농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17~18세기에 안정과 번영을 누리던 상황은 19세기가 되면서 갑자기 악화합니다. 100년간의 안정과 번영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연료를 얻기 위해, 혹은 산을 개간해서 밭을 만들기 위해 산의 나무들을 남벌하면서 산림이 황폐해집니다. 그 결과 홍수나 가뭄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지면서 농업 생산성이 떨어지고 기근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19세기 내내 경제 수준은 계속 악화하고, 민란이 거듭되지만, 조선왕조는 이를 극복할 만한 통치능력을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1860년대에 조선 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었고 조선은 일제(日帝)의 침략 이전에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발견된 고문서들에 의하면 관아나 사대부 집안 장부의 지질(紙質)이 점점 나빠지고, 책을 묶는 끈도 비단에서 종이로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경제가 나빠지면 인간의 교양 수준도 저하되는지, 장부를 적은 글씨의 수준도 선비의 달필(達筆)에서 어린아이의 졸필(拙筆)로 저하되고 있는 게 현저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직포업(織布業)이 농가의 가내부업(家內副業)에서 사회적 부업의 하나로 분리되어 농촌공업으로 성립하는 것을 자본주의 맹아의 출현으로 봅니다. 조선 역사에서는 아직 그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소농이 부농과 빈농으로 분화하는 대신, 소농으로 수렴한 것도 조선에서는 자본주의 맹아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라는 것입니다.
하버드대 교수인 카터 J. 에커트는 ‘한국인들이 그들의 역사에서 산업혁명의 씨앗을 찾고자 노력하는 것은 오렌지 나무에서 사과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하였습니다. 한국의 적지 않은 학자들은 조선이 일본에 합병당하기 전에 우리의 역사가 정상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주장은 학자적 양심과 정직성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인의 왜곡된 민족주의 정서에 부응하려는 지적 아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18세기 이래 자본주의 맹아가 성숙함에 따라 봉건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두 갈래 노력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19세기의 민란과 갑오농민전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밑에서부터의 근대화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봉건적 지배계층이 시도했던 ‘위로부터의 근대화 노선’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모두 일제의 침략으로 좌절되었지만, 해방 후 농민계급의 혁명적 노선은 북한이, 지배계급의 개량주의 노선은 남한이 계승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같은 맹아론의 정치학에 따르면, ‘1948년에 건국한 대한민국은 조선 봉건체제의 지배계급과 일제시대에 성장한 예속 자본가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민족분단을 무릅쓰면서 세운 반민족적, 반(半)봉건적 국가체제이며, 대한민국은 통일과 함께 해체되어야 할 잠정적인 위선(僞善)의 체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의 학자들은 고종을 자주적 개혁을 추진했던 개명 군주로 높이 평가합니다. 대한제국 시기에 고종이 일련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을 했었다며 이를 ‘광무개혁’이라고 칭찬하기도 합니다. 이에 호응하는 정치인들도 있습니다. 전 서울시장 박원순씨나 현 대통령 문재인도 고종의 못다 한 꿈을 이뤄보려는 이들입니다.
고종 시대의 사료를 제대로 살펴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고종의 화폐 주조(鑄造), 통신, 인삼세, 광업세, 어업세, 소금세 등 돈이 되는 것은 다 탁지부가 관할하는 국고가 아니라 황실재정으로 들어가게 해 놓았습니다. 군부에서 국방예산이 모자라서 고종에게 도와달라고 하자, 고종이 돈을 내주었는데 그냥 하사한 것이 아니고 꾸어주었습니다. 한마디로 고종은 왕실의 유지와 존속밖에는 관심이 없었고, 왕국을 자신의 가산(家産)으로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해서는 한사코 부정하는 소위 진보라는 사람들이 1897년 대한제국 선포는 알뜰하게 챙기는 것은 성리학과 부족주의적 민족주의의 변태(變態)라고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조선 말기에 추구했던 ‘독립’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큰소리치면서 중국에는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도 겁먹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리는 비굴한 행위는 조선 시대의 연장에서 현재를 감각 하는 경향입니다. 맹목적으로 친중(親中) 입장을 따르는 정치인들이나 국회의원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학자들까지 학자의 자존심마저도 지키지 않고 친중 노선을 추종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중국은 경제가 어느 정도 발전했지만, 아직도 ‘사적 자치의 주체로서의 개인’을 알지 못하는 우리가 존경할 수 없는 비(非)근대사회입니다. 2014년 7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서울대를 방문하여 앉았던 도서관 자리에 금줄을 치고 성지화(聖地化) 표지를 해 놓았습니다. 이런 것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암묵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소중화론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이나 학자들이 정직한 역사 이해나 학자적 양심으로는 중국을 지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곳 미국이나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나 학자들이 중국의 정치적 정책이나 노선을 지지하는 것은 인권이나 자유나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이용가치 때문이거나 뇌물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세계사 기본법칙이나 자본주의맹아론은 나름 논리적 정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인권이나 자유나 보편 가치를 따르는 것처럼 이론과 논리를 펴지만, 그 열매는 경제적 파탄과 인권을 무시하는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증거들은 역사적 자료나 현실 정치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을 거부하는 무신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지나 인권 신장에 기여할 수 없습니다. 참 신자라면 학문적 이론이나 역사의 교훈을 빌리지 않고도 그것이 자명한 영적 가르침임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정체성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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