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12-인종과 성의 우열 그리고 인종차이
페이지 정보
황상하ㆍ2021-08-28관련링크
본문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고 무엇보다 심각한 인권 유린은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소유물로 취급하는 것이 노예제 가치관의 핵심입니다. 소유물은 인격체가 아니므로 주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습니다. 탈레반이 여성을 학대하는 것은 이러한 여성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여성을 악의 기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성을 학대하면서도 일체의 동정심을 갖지 않습니다. 노예제 아래서 노예도 악의 원인으로 취급되지는 않습니다. 여자를 악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탈레반의 여성관은 폭력을 넘어 여성 증오까지 정당화하는 극단적이고 반인륜적입니다. 흑인 노예 역사가 인종차별의 극단이라면 이슬람의 여성 학대는 성차별의 극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 것은 남녀 성비의 불균형 상황에서 오히려 여성을 위한 제도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일부다처제를 정당화하는 이들의 여성관이 노예제 아래서 노예의 인권보다 더 무시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일부다처제 아래에서의 성차별 같은 것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종차별이 언제나 증오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이 단어가 때로는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열등하다는 어떤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인종이 다른 인종에 비해 열등하다는 믿음은 분명히 비합리적입니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과 장애, 모든 다양한 덕과 악덕들을 생각해 볼 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비해“일반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 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월한 인종이 어떤 것인지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이러한 우월성은 어떻게 측정되며 검증될 수 있을까요? 이런 논의를 할 때 우리는 때로 한 인종의 사람들이 다른 인종의 사람들보다 더 “지능적”인지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지능이란 극도로 복잡한 문제입니다. 지능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누구라도 어떤 것에 능숙하다면 그를 "지능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과학자뿐 아니라 운동선수나 음악가에 대해서도 지능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이큐와 다른 지능 검사들은 지능 그 자체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학업적 성취를 위해 적합한 특정 종류의 지능만을 측정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논의에서 우월성은 때로 도덕적 우월성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인류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상태에 둡니다. 로마서 1-3장의 주장은 모든 인종,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죄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조상들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들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믿는 유대인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다양한 영적 은사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롬 12장; 고전 12장)은 인류에게 있어서 자연적 은사를 바라보는 유사한 방식을 제시해 줍니다. 어떠한 개인이나 인종도 모든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약한 능력이 큰 능력만큼이나 사회에 있어서 꼭 있어야 하는 필요한 것들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가장 우월하다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인종이 특정한 면에서는 다른 인종보다 일반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미국 중서부의 한 대학 운동팀의 감독은 흑인 운동선수가 평균적으로 백인들보다 더 잘 달리고 높이 뛴다고 말했다가 해고를 당했습니다. 이 경우에 감독의 관점은 사실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며 그는 그렇게 표현할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모든 인종이 모든 특정한 능력에 있어서 모두 똑같다는 것도 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은사의 다양성에서 보면 개인이나 인종들 그리고 나라들은 모든 능력이나 기술에 있어서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일반적인 논의에서 한 인종이나 국가의 사람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적이라고 간주되고 있습니다. 아이큐에 미치는 유전적 영향을 연구하는 과학자들도 종종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치부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한 예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다는 전제는 거짓이며 결국 과학의 진보에 해가 될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과 장애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 요인이 다른 많은 것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며 과학은 이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인종적 우월성이나 열등성은 개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 프로 농구팀에서 뛸 수 있는 백인들보다 흑인들이 비율적으로 더 많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흑인들만 선수 선발 경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달리기나 점프 같은 종목에서 최고의 흑인들과 경쟁 할 수 있는 백인들이 몇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경쟁은 합리적인 선 안에서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고 우리는 이러한 보편성에 대한 예외를 발견할 때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들보다 토목 공사의 일을 더 잘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여자들은 이런 종류의 일을 어떤 남자들보다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집단적인 우월성이나 열등성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개인들에 대한 편견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인종차별주의라고 불리는 또 다른 형태의 믿음은 특정한 인종 집단의 비정상적으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특정 종류의 잘못에 대해서 죄가 있다는 믿음입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해서 가지는 윤리적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무조건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현실에서 그러한 문제에 당면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남쪽 국경에는 수많은 사람이 불법으로 미국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현 정부가 그것은 승인하거나 묵인하고 있어서 딱히 불법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어찌 되었건 정식 입국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미국에 들어오려는 이들이 다 전과자들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 가운데는 폭력과 범죄에 관련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탈레반에게 무너지면서 자신들의 나라에서 탈출하는 난민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8천여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일부는 이미 미국으로 들어왔고 나머지는 들어 올 예정입니다. 그들 중에는 100여 명의 테러와 관련 있는 것으로 의심받는 아프가니스탄인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인도적 차원에서 난민을 받아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IS나 알카에다 같은 요원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동정심이나 도덕적 판단만으로 난민을 대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에 대한 동정심이나 도덕적 판단으로 입국 허용을 주저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순수 난민 8천여 명 중 테러리스트가 100명이 포함되어 있다면 이 숫자는 단순한 자연수로 카운트할 수가 아닙니다. 비 이슬람계 사람들은 자살테러리스트 중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반면 이슬람 지도자들은 극단적 자살테러리스트가 전체 이슬람의 1%도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16억명이 넘는 이슬람 인구 중의 1%의 테러리스트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는 특정 집단이나 범죄나 테러범죄자의 수가 전체 수보다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안일하게 대처할 수 없습니다.
뉘른베르크( Nuremberg) 국제군사재판에서 피고들은 주로 독일인들이었고, 최근에 벌어진 테러들은 대부분 무슬림이며, 흑인 밀집 지역의 범죄율과 사생아 출산 비율이 불균형적으로 높고, 오늘날 사무직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나 대형 경제사범 중에는 백인이 많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인종적 범죄 통계를 근거로 도덕적 기준의 인종적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특정 국가집단에 특정한 종류의 죄가 넘치며 이 때문에 그 나라들에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성경은 반대하지 않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을 섬겼으며 그들의 문화는 사악함의 극치로 치달았습니다. 이스라엘도 가나안 족속보다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한 시점에서 가나안 족속들의 죄가 가득 찼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취급됩니다. 미국에서 국경 수비를 더 강화하자고 하는 주장은 반 히스패닉이라고 공격당하고, 폭력 범죄에 대한 더 강력한 처벌을 부르짖으면 반 흑인 적이라고 낙인이 찍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법과 질서라는 말 자체를 인종차별주의의 암호라고 공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불법 선거를 방지하기 위한 법을 만드는 것도 인종차별로 비난합니다. 특정 정당의 이러한 왜곡된 주장에 대해 언론까지 분별없이 날뛰고 있습니다. 따라서 소위 희생자 집단은 자신들이 사회의 문제에 불균형적으로 더 많이 개입되어 있음을 스스로가 인식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서 우리는 더욱더 정직하고 솔직해져야 합니다.
제시 잭슨 목사는 흑인 인권 운동가이지만 흑인들의 범죄가 증가하는 것에 대하여 두렵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지만 사실과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두둔하는 것은 지도자의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 아닐 뿐 아니라 건강한 시민의 의무입니다. 그렇지만 그 현실을 인종적인 편견에 대한 핑계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이 마피아와 연결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모든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불법체류자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속한 집단의 고유한 죄를 겸손하게 인식하고 회개해야 하며 이를 회개하기를 서로 권해야 합니다. 다른 인종이나 국가의 죄를 다루는 것보다 우리 자신이 속한 인종이나 국가의 죄를 다루기가 더 쉽고 믿음이 가는 일일입니다.
인종차별주의라고 불리는 또 다른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종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믿음입니다. 몇 가지 예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타 인종과의 결혼은 잘못된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인들이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종교적이었지 인종적인 자격 요건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야곱의 육신의 아들들뿐 아니라 다른 많은 애굽인들, 미디안 족속들 그리고 라합과 롯 같은 가나안 족속들이 모두 포함된, 이를테면 혼합된 무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이들은 누구라도, 남성이라면 할례를 행한 자들은 누구나 이 결혼에 합당한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 인종 간 결혼 그 자체를 금지하는 원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타 인종과의 결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또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인종들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인종 간의 물리적인 분리나 남아공에서 있었던 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남아공의 극단적인 인종차별 정책과 제도)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어떠한 성경적 원리도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인종 사이의 분리 또한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적대감이 너무나 심해서 인종 집단 간의 분리가 일단은 유일하게 실행 가능한 해법인 경우도 있습니다. 보스니아, 중앙아프리카, 팔레스타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같은 곳의 인종 갈등에 대한 해법은 분리 외에 다른 해법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지역들에서 인종 간의 분리를 옹호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라고 비난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분리 그 자체를 목적이나 최종적 해법으로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제시하는 것이 통합된 사회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인종 간에 사랑과 존중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의미에서는 분명히 통합된 사회가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꿈과 같이 사람들이 피부색보다는 그들의 성품에 의해서 판단 받는 사회라는 의미에서도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인종적 차이들이 사라지거나 사람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사회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2개 국어 상용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복지나 이민 정책에 대한 제한 등과 같은 정치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관점들, 이것들은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는 것이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감과 같다거나 그들의 이익에 반대하는 것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경우에 인종 차별주의라고 불리는 행동은 다른 이들의 것보다 자신의 인종이나 국적과 연결됩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어하는 자연적인 경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화를 공유하고,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적대적이 되기 가장 힘든 사람들 그리고 좋은 친구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들과 함께 사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러한 경향성이 정죄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을 가족 관계 안에 두시고 우리의 가장 친밀한 관계가 유전적으로 가까운 이들이 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배우자나 친한 친구를 찾기 위해서 자신의 문화적 집단으로 들어갑니다. 인종적, 문화적 집단들 사이에서보다 자신의 소속 집단 내부에 더 높은 차원의 상호 이해와 공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속한 집단의 사람들과 함께 긴장을 풀고 농담하고 교제하며 예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쉽다는 것을 느낍니다. 흑인들이 서로를 Soul brothers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 32: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인종차별이 언제나 증오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이 단어가 때로는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열등하다는 어떤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인종이 다른 인종에 비해 열등하다는 믿음은 분명히 비합리적입니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과 장애, 모든 다양한 덕과 악덕들을 생각해 볼 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비해“일반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 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월한 인종이 어떤 것인지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이러한 우월성은 어떻게 측정되며 검증될 수 있을까요? 이런 논의를 할 때 우리는 때로 한 인종의 사람들이 다른 인종의 사람들보다 더 “지능적”인지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지능이란 극도로 복잡한 문제입니다. 지능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누구라도 어떤 것에 능숙하다면 그를 "지능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과학자뿐 아니라 운동선수나 음악가에 대해서도 지능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이큐와 다른 지능 검사들은 지능 그 자체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학업적 성취를 위해 적합한 특정 종류의 지능만을 측정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논의에서 우월성은 때로 도덕적 우월성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인류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상태에 둡니다. 로마서 1-3장의 주장은 모든 인종,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죄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조상들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들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믿는 유대인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다양한 영적 은사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롬 12장; 고전 12장)은 인류에게 있어서 자연적 은사를 바라보는 유사한 방식을 제시해 줍니다. 어떠한 개인이나 인종도 모든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약한 능력이 큰 능력만큼이나 사회에 있어서 꼭 있어야 하는 필요한 것들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가장 우월하다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인종이 특정한 면에서는 다른 인종보다 일반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미국 중서부의 한 대학 운동팀의 감독은 흑인 운동선수가 평균적으로 백인들보다 더 잘 달리고 높이 뛴다고 말했다가 해고를 당했습니다. 이 경우에 감독의 관점은 사실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며 그는 그렇게 표현할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모든 인종이 모든 특정한 능력에 있어서 모두 똑같다는 것도 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은사의 다양성에서 보면 개인이나 인종들 그리고 나라들은 모든 능력이나 기술에 있어서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일반적인 논의에서 한 인종이나 국가의 사람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적이라고 간주되고 있습니다. 아이큐에 미치는 유전적 영향을 연구하는 과학자들도 종종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치부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한 예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다는 전제는 거짓이며 결국 과학의 진보에 해가 될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과 장애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 요인이 다른 많은 것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며 과학은 이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인종적 우월성이나 열등성은 개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 프로 농구팀에서 뛸 수 있는 백인들보다 흑인들이 비율적으로 더 많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흑인들만 선수 선발 경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달리기나 점프 같은 종목에서 최고의 흑인들과 경쟁 할 수 있는 백인들이 몇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경쟁은 합리적인 선 안에서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고 우리는 이러한 보편성에 대한 예외를 발견할 때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들보다 토목 공사의 일을 더 잘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여자들은 이런 종류의 일을 어떤 남자들보다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집단적인 우월성이나 열등성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개인들에 대한 편견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인종차별주의라고 불리는 또 다른 형태의 믿음은 특정한 인종 집단의 비정상적으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특정 종류의 잘못에 대해서 죄가 있다는 믿음입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해서 가지는 윤리적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무조건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현실에서 그러한 문제에 당면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남쪽 국경에는 수많은 사람이 불법으로 미국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현 정부가 그것은 승인하거나 묵인하고 있어서 딱히 불법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어찌 되었건 정식 입국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미국에 들어오려는 이들이 다 전과자들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 가운데는 폭력과 범죄에 관련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탈레반에게 무너지면서 자신들의 나라에서 탈출하는 난민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8천여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일부는 이미 미국으로 들어왔고 나머지는 들어 올 예정입니다. 그들 중에는 100여 명의 테러와 관련 있는 것으로 의심받는 아프가니스탄인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인도적 차원에서 난민을 받아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IS나 알카에다 같은 요원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동정심이나 도덕적 판단만으로 난민을 대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에 대한 동정심이나 도덕적 판단으로 입국 허용을 주저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순수 난민 8천여 명 중 테러리스트가 100명이 포함되어 있다면 이 숫자는 단순한 자연수로 카운트할 수가 아닙니다. 비 이슬람계 사람들은 자살테러리스트 중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반면 이슬람 지도자들은 극단적 자살테러리스트가 전체 이슬람의 1%도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16억명이 넘는 이슬람 인구 중의 1%의 테러리스트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는 특정 집단이나 범죄나 테러범죄자의 수가 전체 수보다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안일하게 대처할 수 없습니다.
뉘른베르크( Nuremberg) 국제군사재판에서 피고들은 주로 독일인들이었고, 최근에 벌어진 테러들은 대부분 무슬림이며, 흑인 밀집 지역의 범죄율과 사생아 출산 비율이 불균형적으로 높고, 오늘날 사무직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나 대형 경제사범 중에는 백인이 많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인종적 범죄 통계를 근거로 도덕적 기준의 인종적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특정 국가집단에 특정한 종류의 죄가 넘치며 이 때문에 그 나라들에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성경은 반대하지 않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을 섬겼으며 그들의 문화는 사악함의 극치로 치달았습니다. 이스라엘도 가나안 족속보다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한 시점에서 가나안 족속들의 죄가 가득 찼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취급됩니다. 미국에서 국경 수비를 더 강화하자고 하는 주장은 반 히스패닉이라고 공격당하고, 폭력 범죄에 대한 더 강력한 처벌을 부르짖으면 반 흑인 적이라고 낙인이 찍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법과 질서라는 말 자체를 인종차별주의의 암호라고 공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불법 선거를 방지하기 위한 법을 만드는 것도 인종차별로 비난합니다. 특정 정당의 이러한 왜곡된 주장에 대해 언론까지 분별없이 날뛰고 있습니다. 따라서 소위 희생자 집단은 자신들이 사회의 문제에 불균형적으로 더 많이 개입되어 있음을 스스로가 인식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서 우리는 더욱더 정직하고 솔직해져야 합니다.
제시 잭슨 목사는 흑인 인권 운동가이지만 흑인들의 범죄가 증가하는 것에 대하여 두렵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지만 사실과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두둔하는 것은 지도자의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 아닐 뿐 아니라 건강한 시민의 의무입니다. 그렇지만 그 현실을 인종적인 편견에 대한 핑계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이 마피아와 연결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모든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불법체류자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속한 집단의 고유한 죄를 겸손하게 인식하고 회개해야 하며 이를 회개하기를 서로 권해야 합니다. 다른 인종이나 국가의 죄를 다루는 것보다 우리 자신이 속한 인종이나 국가의 죄를 다루기가 더 쉽고 믿음이 가는 일일입니다.
인종차별주의라고 불리는 또 다른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종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믿음입니다. 몇 가지 예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타 인종과의 결혼은 잘못된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인들이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종교적이었지 인종적인 자격 요건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야곱의 육신의 아들들뿐 아니라 다른 많은 애굽인들, 미디안 족속들 그리고 라합과 롯 같은 가나안 족속들이 모두 포함된, 이를테면 혼합된 무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이들은 누구라도, 남성이라면 할례를 행한 자들은 누구나 이 결혼에 합당한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 인종 간 결혼 그 자체를 금지하는 원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타 인종과의 결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또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인종들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인종 간의 물리적인 분리나 남아공에서 있었던 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남아공의 극단적인 인종차별 정책과 제도)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어떠한 성경적 원리도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인종 사이의 분리 또한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적대감이 너무나 심해서 인종 집단 간의 분리가 일단은 유일하게 실행 가능한 해법인 경우도 있습니다. 보스니아, 중앙아프리카, 팔레스타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같은 곳의 인종 갈등에 대한 해법은 분리 외에 다른 해법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지역들에서 인종 간의 분리를 옹호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라고 비난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분리 그 자체를 목적이나 최종적 해법으로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제시하는 것이 통합된 사회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인종 간에 사랑과 존중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의미에서는 분명히 통합된 사회가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꿈과 같이 사람들이 피부색보다는 그들의 성품에 의해서 판단 받는 사회라는 의미에서도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인종적 차이들이 사라지거나 사람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사회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2개 국어 상용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복지나 이민 정책에 대한 제한 등과 같은 정치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관점들, 이것들은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는 것이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감과 같다거나 그들의 이익에 반대하는 것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경우에 인종 차별주의라고 불리는 행동은 다른 이들의 것보다 자신의 인종이나 국적과 연결됩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어하는 자연적인 경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화를 공유하고,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적대적이 되기 가장 힘든 사람들 그리고 좋은 친구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들과 함께 사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러한 경향성이 정죄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을 가족 관계 안에 두시고 우리의 가장 친밀한 관계가 유전적으로 가까운 이들이 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배우자나 친한 친구를 찾기 위해서 자신의 문화적 집단으로 들어갑니다. 인종적, 문화적 집단들 사이에서보다 자신의 소속 집단 내부에 더 높은 차원의 상호 이해와 공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속한 집단의 사람들과 함께 긴장을 풀고 농담하고 교제하며 예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쉽다는 것을 느낍니다. 흑인들이 서로를 Soul brothers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 32: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