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11-인종차별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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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1-08-2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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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회적 집단들 사이의 관계 문제가 다른 문제들을 거의 다 덮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단이란 인종, 성, 국적, 신조, 성적 경향, 나이, 능력 등에 따라서 구분됩니다. 이러한 사회적 집단 구분은 일반적으로 막시스트나 극단적 진보주의자들이 사회 구성원을 억압자 집단과 희생자 집단으로 구분할 때 사용하는 집단 구분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억압자 집단은 일반적으로 백인, 중산층, 기독교, 이성애자 남성으로 정의됩니다. 그들이 제기하는 쟁점은 억압자 집단이 희생자 집단에 가하는 불공평하고 불공정 한 취급입니다. 최근에는 대부분의 윤리적 질문들이나 정치적 문제도 결국에는 이 문제로 환원됩니다. 그들은 낙태의 문제도 결국 “선택 "이란 용어로 규정하여, 성적 자율성에 근거해서 옹호합니다.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성 차별이며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이라는 것입니다. 진보주의자들은 희생자 집단을 향한 억압자 집단의 태도를 인종 차별 주의자, 성 차별 주의자, 노인 차별 주의자, 비만인 차별 주의자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정당의 정책이나 개인의 주장이나 윤리적 문제도 그들이 구분하는 집단의 소속에 따라 판단되고 평가 됩니다.
그들이 누구라도 일단 억압자 집단에 속했다고 판단하면 그가 아무리 법과 정의와 질서와 합리적 주장을 할지라도 결국은 인종차별이 되고 맙니다. 심지어 그 주장이 인종차별을 해결하려는 주장이라고 하여도 인종차별이 됩니다. 그렇게 되는데는 언론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난 정부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인종차별을 현저하게 줄이는 정책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많이 만들어냈음에도 언론은 지금까지도 트럼프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주장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정치 지도자들의 주장이나 정당의 정책이나 언론의 보도를 드러난 대로 믿을 수 없는 정치적 사상적 이념의 이데올로기 쓰나미에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경제적, 환경적 문제들이 그 고유한 영역에서 합리적으로 정직하게 논의되지 못하고 별 상관이 없는 문제들과 뒤섞여 애매함과 혼란의 홍수가 되어 가치 질서와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들까지 표류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와 경향에 대하여 언론이나 전문가들이 세심하게 분석하고 정밀하게 논의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문제를 다루는 학자들과 언론의 태도는 애매함과 혼란뿐 아니라 논쟁을위한 수사어나 감성적 언어로 전문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들로 하여금 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합니다. 다양한 의미의 인종과 성에 대한 표현과 진술까지 인종 차별이나 성 차별로 함부로 정죄하는 경우가 다반사 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특정한 인종, 성, 집단에 속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동성애는 죄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이 동성애자들을 볼 때, 그들 자체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따라서 그들 역시 귀한 존재이지만 동성애 행위는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멀어진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따라서 동성애는 성적인 죄이고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회개해야하며 경건한 삶으로 개선하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동성애 행위를 특수한 권리인양 지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학교나 일반 문화에서 동성애의 영향으로부터 우리 자녀들을 보호하고 지킬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글의 주된 목적은 동성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 하지는 않겠지만 동성애를 인종차별 문제와 연계하여 교묘하게 다루는 혼란에 함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인종 차별 "은 “사람들을 그 인종이나 피부색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라고 정의 되고 있는 데 종종 증오감과 같이 생각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 증오는 내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증오를 감정적인 혐오감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하지만 성경은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의 목적에 대한 실제적인 반대를 나타낼 때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경우 증오가 반드시 사랑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논의에서는 혐오감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이 혐오의 감정을 빨리 포착해야하며 다른 사람들을 비난 하는 것은 신중하고 사려깊게 천천히 해야합니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논의에서 이와 반대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인종 간의 증오감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하기 바쁘며 그들은 거의 대부분 그런 증오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인종에 관한 논의에서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그의 조상이나 피부색만으로 싫어한다는 것은 죄악이며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개인은 자신의 조상이 누구며 어떤 사람들이였는지에 대해서 할 수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그들의 조상만으로는 절대로 그 사람을 가치있게 하거나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인종 간의 증오"의 한 형태는 그 인종 집단이 행했다고 생각하는 잘못들 때문에 특정 인종의 사람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종 간의 증오가 아닙니다. 여기서 증오감이 발생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조상이 누구인가하는 이유로 만이 아니라 화해되지 않는 아픔 때문입니다. 미국의 아프리카 계 흑인들은 백인들이 자신의 조상들을 노예로 삼은 역사 때문이 아니라 노예 해방 이후의 분리 정책의 역사 때문에 백인들에게 분한 감정을 갖습니다. 또한 백인들은 흑인 거주 지역의 높은 범죄율, 불법, 약물 복용 등의 이유로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백인 때문이라고하는 몇몇 흑인 지도자들의 주장 때문에 흑인들에게 분개합니다. 이 두 경우에 문제는 조상이나 피부색이 아니라 행동 양식입니다.
인종 간의 증오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은 성경의 가르침 대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대 인종에 대한 증오감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인종 구성원 일부의 행동들 때문에 그 인종에 속한 모두를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합니다. 특히 그들의 과거 행동이나 예상되는 미래의 행동 때문에 그들을 차별하는 것은 아주 나쁜 것입니다.
최근에는 인종차별의 또 다른 종류가 발생하고 있음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억압자 집단이 피억압자 집단을 싫어하거나 그들에 대해 분개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 반대는 적절하고 심지어 정당하다고 말합니다. 마르쿠제의 억압적 관용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쿠제는 억압자 집단의 반발에 대해 억압적 관용의 정당성을 주장하였습니다. 반발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기 위해 억압적 관용이 필요하다고 하였지만 이는 자신들의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정당화한 억지 논리에 불과합니다. 지금 인종차별을 반대한다는 여러 집단들의 인권운동들이 과격한 폭력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은 억압적 관용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말하는 억압자 집단과 희생자 집단이 전도(転倒)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희생자 집단이 이제는 억압자 집단이 되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늘날 억압자 집단은 이전의 희생자 집단이 아니라 그 희생자 집단을 이용하여 이득을 추구하는 집단입니다. 이 집단은 이전의 희생자 집단, 이를테면 사회적 소외 계층에 속하는 힘 없는 소수 집단의 인권과 경제적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불쌍한 소외 계층을 위해서 하는 일이란 거의 명분을 세우는 정도이고 자기들의 사욕을 채우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약자를 위하고 자유와 인권을 앞세우면서 실제로는 사욕을 추구하는 집단이 누구인지 간파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진보 좌파들이 보수 우파보다 더 노골적으로 사욕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사욕은 경제적 이익 뿐 아니라 성적 범죄에 연루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 비리를 감추기 위해 비리 사실을 알고 있거나 비밀 정보를 공개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의심 받습니다. 클린턴의 비리와 그 비리에 연루 된 이들 중에 의문사한 이들이 수십 명 이르고 오바마와 힐러리의 비리 정보를 알고 있는 이들 중에 의문사한 이들도 있고 한국에서도 노회찬 의원 등 집권당의 비리와 관련 된 이들 중에 의문사한 이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권력과 언론이 함께 그런 것을 보도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비밀로 묻혀 있지만 좌파들의 가치관으로 미루어 생각할 때 그런 비리는 합리적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합니다.
독재자 스탈린은 “죽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정권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이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걸림돌이 되는 사람을 암살하거나 반대파를 숙청하는 것은 필요하고 정당하다는 주장입니다. 그와 같은 가치관이 지배하던 구소련의 가치관은 지금의 러시아 정치 지도자에게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여러 사건들이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적인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가 푸틴 정권 이후 반정부 지도자로 활동하던 어느 날 갑자기 의문사를 당한 것이나, 영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연방보안국의 전직 요원 알렌산드로 리트버넨코가 돌연사한 사건 등이 그 대표적 경우입니다. 정적 제거나 정권 위기 탈피를 위한 처형이나 돌연사는 북한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공산주의 정권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일들이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수 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공산주의와 좌파들은 국가나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욕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입니다. 정직하게 말한다면 공산주의자나 진보 좌파들이 사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사욕을 추구하는 자들이 진보적 사상이나 이념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진보 좌파들 중에는 사욕을 추구하지 않는 순수 좌파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좌파들은 깡패나 시정잡배 수준임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인권, 평등, 환경, 공익 등과 같은 명분을 앞세우면서 사욕을 챙기는 또 다른 부류의 집단이 있습니다. 극단적 환경론자들이나 노동운동가들이 오늘날에는 억압자 집단이나 가해자 집단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환경운동이나 노동운동은 누구나 쉽게 비판할 수 없는 대의명분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이 긍정적으로 기여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비리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들은 성경이 지적하는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악합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이나 장애자들을 위하는 일을 하면서 사욕을 채우는 이들을 우리는 한 두번 경험하고 목격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소수의 나쁜 이들 때문에 다수의 선한 이들이 오해를 받는 안타까운 부작용이 있음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철학이나 가치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잘못된 가치관의 토대에서 시작된 선하고 좋은 일들은 악용될 위험이 아주 높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마치 고양이가 생선을 맡아 관리하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입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그렇다면 무신론자들이 선하고 이상적인 일을 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날마다 자신을 쳐서 하나님과 진리에 복종시키고 자신을 죽이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절제가 가능하지만 무신론자들은 그런 권위의 권고를 받을 데가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통제가 더 어렵습니다. 인종차별의 문제가 얼마나 교묘하게 왜곡되고 있으며 그 해결을 위한 방법들이 위선이 아닌지 분별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그들이 누구라도 일단 억압자 집단에 속했다고 판단하면 그가 아무리 법과 정의와 질서와 합리적 주장을 할지라도 결국은 인종차별이 되고 맙니다. 심지어 그 주장이 인종차별을 해결하려는 주장이라고 하여도 인종차별이 됩니다. 그렇게 되는데는 언론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난 정부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인종차별을 현저하게 줄이는 정책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많이 만들어냈음에도 언론은 지금까지도 트럼프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주장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정치 지도자들의 주장이나 정당의 정책이나 언론의 보도를 드러난 대로 믿을 수 없는 정치적 사상적 이념의 이데올로기 쓰나미에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경제적, 환경적 문제들이 그 고유한 영역에서 합리적으로 정직하게 논의되지 못하고 별 상관이 없는 문제들과 뒤섞여 애매함과 혼란의 홍수가 되어 가치 질서와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들까지 표류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와 경향에 대하여 언론이나 전문가들이 세심하게 분석하고 정밀하게 논의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문제를 다루는 학자들과 언론의 태도는 애매함과 혼란뿐 아니라 논쟁을위한 수사어나 감성적 언어로 전문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들로 하여금 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합니다. 다양한 의미의 인종과 성에 대한 표현과 진술까지 인종 차별이나 성 차별로 함부로 정죄하는 경우가 다반사 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특정한 인종, 성, 집단에 속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동성애는 죄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이 동성애자들을 볼 때, 그들 자체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따라서 그들 역시 귀한 존재이지만 동성애 행위는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멀어진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따라서 동성애는 성적인 죄이고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회개해야하며 경건한 삶으로 개선하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동성애 행위를 특수한 권리인양 지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학교나 일반 문화에서 동성애의 영향으로부터 우리 자녀들을 보호하고 지킬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글의 주된 목적은 동성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 하지는 않겠지만 동성애를 인종차별 문제와 연계하여 교묘하게 다루는 혼란에 함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인종 차별 "은 “사람들을 그 인종이나 피부색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라고 정의 되고 있는 데 종종 증오감과 같이 생각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 증오는 내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증오를 감정적인 혐오감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하지만 성경은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의 목적에 대한 실제적인 반대를 나타낼 때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경우 증오가 반드시 사랑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논의에서는 혐오감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이 혐오의 감정을 빨리 포착해야하며 다른 사람들을 비난 하는 것은 신중하고 사려깊게 천천히 해야합니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논의에서 이와 반대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인종 간의 증오감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하기 바쁘며 그들은 거의 대부분 그런 증오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인종에 관한 논의에서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그의 조상이나 피부색만으로 싫어한다는 것은 죄악이며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개인은 자신의 조상이 누구며 어떤 사람들이였는지에 대해서 할 수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그들의 조상만으로는 절대로 그 사람을 가치있게 하거나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인종 간의 증오"의 한 형태는 그 인종 집단이 행했다고 생각하는 잘못들 때문에 특정 인종의 사람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종 간의 증오가 아닙니다. 여기서 증오감이 발생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조상이 누구인가하는 이유로 만이 아니라 화해되지 않는 아픔 때문입니다. 미국의 아프리카 계 흑인들은 백인들이 자신의 조상들을 노예로 삼은 역사 때문이 아니라 노예 해방 이후의 분리 정책의 역사 때문에 백인들에게 분한 감정을 갖습니다. 또한 백인들은 흑인 거주 지역의 높은 범죄율, 불법, 약물 복용 등의 이유로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백인 때문이라고하는 몇몇 흑인 지도자들의 주장 때문에 흑인들에게 분개합니다. 이 두 경우에 문제는 조상이나 피부색이 아니라 행동 양식입니다.
인종 간의 증오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은 성경의 가르침 대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대 인종에 대한 증오감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인종 구성원 일부의 행동들 때문에 그 인종에 속한 모두를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합니다. 특히 그들의 과거 행동이나 예상되는 미래의 행동 때문에 그들을 차별하는 것은 아주 나쁜 것입니다.
최근에는 인종차별의 또 다른 종류가 발생하고 있음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억압자 집단이 피억압자 집단을 싫어하거나 그들에 대해 분개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 반대는 적절하고 심지어 정당하다고 말합니다. 마르쿠제의 억압적 관용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쿠제는 억압자 집단의 반발에 대해 억압적 관용의 정당성을 주장하였습니다. 반발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기 위해 억압적 관용이 필요하다고 하였지만 이는 자신들의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정당화한 억지 논리에 불과합니다. 지금 인종차별을 반대한다는 여러 집단들의 인권운동들이 과격한 폭력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은 억압적 관용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말하는 억압자 집단과 희생자 집단이 전도(転倒)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희생자 집단이 이제는 억압자 집단이 되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늘날 억압자 집단은 이전의 희생자 집단이 아니라 그 희생자 집단을 이용하여 이득을 추구하는 집단입니다. 이 집단은 이전의 희생자 집단, 이를테면 사회적 소외 계층에 속하는 힘 없는 소수 집단의 인권과 경제적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불쌍한 소외 계층을 위해서 하는 일이란 거의 명분을 세우는 정도이고 자기들의 사욕을 채우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약자를 위하고 자유와 인권을 앞세우면서 실제로는 사욕을 추구하는 집단이 누구인지 간파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진보 좌파들이 보수 우파보다 더 노골적으로 사욕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사욕은 경제적 이익 뿐 아니라 성적 범죄에 연루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 비리를 감추기 위해 비리 사실을 알고 있거나 비밀 정보를 공개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의심 받습니다. 클린턴의 비리와 그 비리에 연루 된 이들 중에 의문사한 이들이 수십 명 이르고 오바마와 힐러리의 비리 정보를 알고 있는 이들 중에 의문사한 이들도 있고 한국에서도 노회찬 의원 등 집권당의 비리와 관련 된 이들 중에 의문사한 이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권력과 언론이 함께 그런 것을 보도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비밀로 묻혀 있지만 좌파들의 가치관으로 미루어 생각할 때 그런 비리는 합리적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합니다.
독재자 스탈린은 “죽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정권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이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걸림돌이 되는 사람을 암살하거나 반대파를 숙청하는 것은 필요하고 정당하다는 주장입니다. 그와 같은 가치관이 지배하던 구소련의 가치관은 지금의 러시아 정치 지도자에게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여러 사건들이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적인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가 푸틴 정권 이후 반정부 지도자로 활동하던 어느 날 갑자기 의문사를 당한 것이나, 영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연방보안국의 전직 요원 알렌산드로 리트버넨코가 돌연사한 사건 등이 그 대표적 경우입니다. 정적 제거나 정권 위기 탈피를 위한 처형이나 돌연사는 북한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공산주의 정권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일들이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수 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공산주의와 좌파들은 국가나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욕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입니다. 정직하게 말한다면 공산주의자나 진보 좌파들이 사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사욕을 추구하는 자들이 진보적 사상이나 이념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진보 좌파들 중에는 사욕을 추구하지 않는 순수 좌파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좌파들은 깡패나 시정잡배 수준임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인권, 평등, 환경, 공익 등과 같은 명분을 앞세우면서 사욕을 챙기는 또 다른 부류의 집단이 있습니다. 극단적 환경론자들이나 노동운동가들이 오늘날에는 억압자 집단이나 가해자 집단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환경운동이나 노동운동은 누구나 쉽게 비판할 수 없는 대의명분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이 긍정적으로 기여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비리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들은 성경이 지적하는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악합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이나 장애자들을 위하는 일을 하면서 사욕을 채우는 이들을 우리는 한 두번 경험하고 목격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소수의 나쁜 이들 때문에 다수의 선한 이들이 오해를 받는 안타까운 부작용이 있음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철학이나 가치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잘못된 가치관의 토대에서 시작된 선하고 좋은 일들은 악용될 위험이 아주 높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마치 고양이가 생선을 맡아 관리하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입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그렇다면 무신론자들이 선하고 이상적인 일을 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날마다 자신을 쳐서 하나님과 진리에 복종시키고 자신을 죽이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절제가 가능하지만 무신론자들은 그런 권위의 권고를 받을 데가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통제가 더 어렵습니다. 인종차별의 문제가 얼마나 교묘하게 왜곡되고 있으며 그 해결을 위한 방법들이 위선이 아닌지 분별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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