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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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1-12-0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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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또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중세의 한 수도원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은 수도원 도서관에서 장서계 수사로 일하는 장님 호르헤 수도사였습니다. 그의 살인 동기는 그 수도원 도서관에 소장 되어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극’의 웃음과 관련된 부분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웃음을 죄악시하고, 예수는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호르헤 역시 그렇게 믿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을 통해 진리에 향하는 이 방식이 신학과 신앙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오리라 생각하고 아무도 그 책을 읽지 못하도록 그 책에다 독을 발라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래 그 책을 읽으면서 책장을 넘기려 손가락에 침을 바르다 독에 중독되어 죽은 것입니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통해 당시 교회의 분위기를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중세 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금욕과 절제와 신중함이 강조된 생활로 이어졌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조금이라도 경망스러운 것은 용납이 안 되었습니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진중함이 신앙의 바른 태도라고 믿었습니다. 이단으로 정죄 되어 희생된 수많은 이들의 죄가 교리적인 잘못 때문이 아니라 진중함을 벗어난 경망스러운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마녀사냥으로 알려진 종교 재판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의 죄목이 어떠했을까를 짐작하게 합니다.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경험한 이들이 그 자유 때문에 희생된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가톨릭의 예배와 신앙생활에는 그러한 분위기가 남아 있습니다.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회 중에도 극단적인 경건을 강조하는 교단이나 경직된 보수적 신앙을 표방하는 교회는 중세 교회처럼 잘못된 전통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태도 가운데 진중함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중세 교회의 지나친 엄숙함이나 진중성에 반발하여 개신교회 중에는 너무 가벼운 신앙의 태도와 경망스러운 교회 분위기를 만든 교회들이 있습니다. 건전한 전통 교회들은 지나친 진중함이나 지나치게 가벼운 것도 경계하는 편이지만 그 인위적인 조심스러움 때문에 진리의 복음 안에서의 자유와 즐거움 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혁교회는 이 문제를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요리 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그 대답을“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요리 문답은 결코 가볍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는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5년 8개월 동안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모인 회의를 가리킵니다. 이 회의는 교회의 신조와 정치와 의식을 제정하기 위하여 121명의 칼빈주의 목사와 신학자, 18명의 경건한 귀족과 20명의 하원의원 등 모두 159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입니다. 이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신앙고백,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 예배모범, 교회정치” 등 다섯 가지 표준문서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문서들을 “Westminster Standards”라고 부릅니다. 그 이후 이 문서들은 모든 민족과 세대의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교리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많은 교회가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 성경의 내용을 모범적으로 잘 이해하고 표현하여 드러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그 내용으로 신앙을 고백하며 성도를 권징을 합니다. 하지만 교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내용은 강조하지만,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내용은 잘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즐긴다”는 뜻인데, 보수적인 교회와 성도들은 그 본래의 뜻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뜻을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으로 본래의 뜻을 비틀어 이해하고 또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웨스트민스터 교리는 자유주의적인 신학, 인간중심의 신학, 현실적인 신학이 만들어낸 이론이라고 비판하기까지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는 오늘날의 교회가 신학과 신앙을 아무렇게나 자기들 편한 대로 무시해 버려도 좋을 내용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159명의 경건한 개혁주의자들인 신앙의 선배들이 5년 8개월 동안에 걸쳐서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토론하고 또 토론하여 만들어낸 교리입니다. 이 웨스트민스터 교리가 교회에 끼친 좋은 영향을 생각할 때 이는 성령께서 주도하신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는 가능한한 인간 중심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토론하고 의논하여 만든 요리 문답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하나님을 엔조이한다)이 성경이 가르치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입니다.
오랫동안 기독교 신앙에서 즐긴다는 표현은 아주 세속적인 것처럼 취급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불신앙 가운데서 쾌락을 추구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능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즐거워할 것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본능을 따라 쾌락을 추구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합니다. 타락 이후 인간의 역사는 악한 욕망을 추구하는 역사로 점철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함에도 인간이 무엇을 즐거워한다는 것을 세속적 욕망이 주도해 왔기 때문에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하는 것을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철학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날마다 주지육림을 즐기면서 쾌락만을 탐닉하면서 살았고 로마의 황제나 높은 지위의 권력자들 역시 쾌락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고대뿐 아니라 모든 인간 세대에서 나타나고 있고 심지어 21세기 미국에서도 나타나는 경향입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권력의 중심부와 그 주변에 있는 이들이 동성애, 소아성애, 사이비 종교 형태를 표방한 난교, 살인 등을 통해 극단적 쾌락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권력자들이나 부자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비정상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행태들이 드러나면 정치인들이나 언론들이 큰일이라도 났다는 듯이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비정상적인 쾌락 추구의 형태는 그 수를 다 헤아릴 수도 없고 다 파악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는 정치나 언론이나 교육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입니다. 악을 억제하고 선을 장려해야 할 정부와 언론과 학교가 불법과 폭력과 거짓과 윤리와 도덕의 파괴를 덮어주고 지지하고 장려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를 이념이나 철학이나 사상이나 교육이나 정치나 사회적 문제라고 지적하지만 그러한 지적은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유치한 대응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즐거움을 삼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인간은 즐겁게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이기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이기적인 쾌락 추구의 특징은 점점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으로 즐거움을 삼지 않은 데서 발생한 문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를 자신에게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즐거움을 추구하며 사는데 나 자신도 그 모든 사람 중의 한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만족, 기쁨, 즐거움, 쾌락, 희열 등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신앙인이 인생을 즐기는 것은 세속적이고 사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모든 인생은 의무와 책임의 멍에를 지고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마저 어떤 의무감이나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으로 느끼며 재미없고 지기 싫은 짐을 억지로 지고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느낌과 경험과 현실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어느 사람도 그런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나님으로 즐거움을 삼는 사람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으로 즐거움을 삼고 영원히 살게 될 그 복을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 이 세상에서 앞당겨 누리며 사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는 삶에서 바로 이 부분, 즉 하나님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웨스트민스터 요리 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그 대답을“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요리 문답은 결코 가볍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는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5년 8개월 동안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모인 회의를 가리킵니다. 이 회의는 교회의 신조와 정치와 의식을 제정하기 위하여 121명의 칼빈주의 목사와 신학자, 18명의 경건한 귀족과 20명의 하원의원 등 모두 159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입니다. 이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신앙고백,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 예배모범, 교회정치” 등 다섯 가지 표준문서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문서들을 “Westminster Standards”라고 부릅니다. 그 이후 이 문서들은 모든 민족과 세대의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교리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많은 교회가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 성경의 내용을 모범적으로 잘 이해하고 표현하여 드러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그 내용으로 신앙을 고백하며 성도를 권징을 합니다. 하지만 교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내용은 강조하지만,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내용은 잘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즐긴다”는 뜻인데, 보수적인 교회와 성도들은 그 본래의 뜻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뜻을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으로 본래의 뜻을 비틀어 이해하고 또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웨스트민스터 교리는 자유주의적인 신학, 인간중심의 신학, 현실적인 신학이 만들어낸 이론이라고 비판하기까지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는 오늘날의 교회가 신학과 신앙을 아무렇게나 자기들 편한 대로 무시해 버려도 좋을 내용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159명의 경건한 개혁주의자들인 신앙의 선배들이 5년 8개월 동안에 걸쳐서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토론하고 또 토론하여 만들어낸 교리입니다. 이 웨스트민스터 교리가 교회에 끼친 좋은 영향을 생각할 때 이는 성령께서 주도하신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는 가능한한 인간 중심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토론하고 의논하여 만든 요리 문답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하나님을 엔조이한다)이 성경이 가르치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입니다.
오랫동안 기독교 신앙에서 즐긴다는 표현은 아주 세속적인 것처럼 취급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불신앙 가운데서 쾌락을 추구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능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즐거워할 것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본능을 따라 쾌락을 추구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합니다. 타락 이후 인간의 역사는 악한 욕망을 추구하는 역사로 점철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함에도 인간이 무엇을 즐거워한다는 것을 세속적 욕망이 주도해 왔기 때문에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하는 것을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철학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날마다 주지육림을 즐기면서 쾌락만을 탐닉하면서 살았고 로마의 황제나 높은 지위의 권력자들 역시 쾌락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고대뿐 아니라 모든 인간 세대에서 나타나고 있고 심지어 21세기 미국에서도 나타나는 경향입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권력의 중심부와 그 주변에 있는 이들이 동성애, 소아성애, 사이비 종교 형태를 표방한 난교, 살인 등을 통해 극단적 쾌락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권력자들이나 부자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비정상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행태들이 드러나면 정치인들이나 언론들이 큰일이라도 났다는 듯이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비정상적인 쾌락 추구의 형태는 그 수를 다 헤아릴 수도 없고 다 파악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는 정치나 언론이나 교육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입니다. 악을 억제하고 선을 장려해야 할 정부와 언론과 학교가 불법과 폭력과 거짓과 윤리와 도덕의 파괴를 덮어주고 지지하고 장려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를 이념이나 철학이나 사상이나 교육이나 정치나 사회적 문제라고 지적하지만 그러한 지적은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유치한 대응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즐거움을 삼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인간은 즐겁게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이기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이기적인 쾌락 추구의 특징은 점점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으로 즐거움을 삼지 않은 데서 발생한 문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를 자신에게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즐거움을 추구하며 사는데 나 자신도 그 모든 사람 중의 한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만족, 기쁨, 즐거움, 쾌락, 희열 등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신앙인이 인생을 즐기는 것은 세속적이고 사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모든 인생은 의무와 책임의 멍에를 지고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마저 어떤 의무감이나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으로 느끼며 재미없고 지기 싫은 짐을 억지로 지고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느낌과 경험과 현실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어느 사람도 그런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나님으로 즐거움을 삼는 사람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으로 즐거움을 삼고 영원히 살게 될 그 복을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 이 세상에서 앞당겨 누리며 사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는 삶에서 바로 이 부분, 즉 하나님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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