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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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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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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잠이 잘 오지 않는 늦은 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적막 속에서 아날로그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는 이완되기를 바라는 의식을 더욱 예민하게 하여 더 잠 못 들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순간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빠지기라도 하면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는 알 수 없는 긴장과 헤어나기가 쉽지 않은 비현실적 논리와 상상과 유추의 뒤엉킴에 침전되어 허우적거리게 합니다.

영국의 문학평론가 프랭크 커모드(Frank Kermode)는 그의 책“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The Sense of an Ending)에서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에서 역사 이해의 의미를 발견하였습니다. “똑-딱”거리는 시간 속에 “똑”이라는 시작과 “딱”이라는 끝이 있고, 그리고 그 사이의 중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 똑”과 “딱” 사이는 의미 있는 지속으로 채워져 있다고 전제하고 역사의 모든 이야기의 줄거리와 사건들이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역사의 결말은 똑과 딱 사에에 채워져 있는 지속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역사의 결말을 허구라고 하였습니다. 똑 딱 사이의 간격은 하나의 의미 있는 때, 즉 시작과 종말 사이에 위치한 카이로스라는 것입니다. 카이로스는 과거를 변화시켜, 종말과 기원의 합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의 종말이 허구라는 것은 인간 이성과 사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궁여지책입니다.

카이로스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끝없이 이어지며, 순환과 반복을 통해 영원의 개념을 반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입니다. 이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의지의 개입 혹은 운명, 혹은 섭리와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매 순간은 그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도 이와 유사하게 오직 하나의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시간은 어떤 한순간에서 어떤 시점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이, 창조에서 종말을 향해 날아가는 단선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입니다. 직선적 시간 개념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어거스틴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직선적 시간 개념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스의 시간이나 동양적인 시간 개념은 모두 원적인데, 카이로스는 단선적 시간관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영원을 상정하는 기독교의 시간 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바로 그 이유로 영원한 우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13세기 유럽에 도입된 즉시 스콜라철학 내부에 엄청난 논쟁을 몰고 왔으며, 그 결과 중세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금서 조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기에 에붐(aevum)이라는 새로운 시간 개념을 도입합니다. 그것은 신의 속성이자 천사가 사는 영역이고, 인간이 현재 인지할 수는 없으나 장차 참여하게 될 새로운 형태의 “그 무엇”입니다. 에붐은 간단히 말하자면,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그 무엇입니다. 시간은 “먼저”와 “나중”에 따른 운동의 척도지만 아퀴나스는 불변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될 구별 점을 그의 존재 속에 설정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고 영원하며 그리고 이 영원성은 하나님 존재 자체에 속하는 것이므로 신의 고유한 본질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존재자들에게 영원은 고유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직 신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영원은 시간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영원성은 모든 것이 동시에 함께 있음인데. 그것이 시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먼저”와 “나중”을 함축하지만 에붐(aevum)은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도 세계와 역사 그리고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들을 시간과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은 시작과 종말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사건들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 의미에 부응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종말론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랭크 커모드는 종말을 시작과 종말 사이의 시간들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허구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그 종말을 현실보다 더 실재라고 믿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은 시간적으로 역사의 끝에 찾아올 미래의 때를 가리킬 뿐 아니라 현재에 들어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학이나 철학이나 심지어 어떤 신학이 종말을 허구라고 해도 우리는 그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기독교적 역사관의 핵심은 처음과 끝이 있다는 것, 즉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시작되었고 심판에 의해 끝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은 기독교 역사관의 핵심 요소입니다. 우리는 종말이 언제, 어떻게 오며,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반응을 해야 합니다.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결되어 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그 완성이 재림입니다. 또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가운데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 심판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되고 재림 때에는 그 심판이 최종적으로 집행되며, 구원도 완성됩니다. 재림이 언제인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 외에 아무도 모르고,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임박해 있고, 예상하지 못하게 모든 사람이 일상에 몰두해 있는 중에 홀연히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예수님 재림의 때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종말의식으로 사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임박한 재림의 때를 강조하는 신앙은 일상의 삶을 게을리 하거나 포기하게 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깨어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임박한 종말의식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면 종말의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종말의식을 강조하면서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이 가르침을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제대로 알아듣고 어느 정도 실천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모르긴 해도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바울의 이 가르침과는 반대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일상에 집착하여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고 어떤 면에서는 관조하거나 어느 정도 현상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살고,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 그런 것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집이 있는 사람은 집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고급 차를 타는 사람은 중고차를 타는 사람처럼 살고, 잘생긴 사람은 못생긴 사람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사회나 중세 수도원 공동체 같은 데서는 어쩌면 바울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나 수도원 공동체에서도 그것이 불가능하였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그 지향성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공산주의가 그렇게 살 수 있는 완벽한 복지정책에 실패했지만, 약자와 소외자를 돌아보는 복지정책은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확장되고 정책적으로 시행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개인적 삶의 중심과 본질에 천착하는 영적 내공을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많이 가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아 있는 것은 생물학적 생명이라기보다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 무엇을 통해 풍성한 생명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생명의 풍성함이 실제로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 집을 사거나, 좋은 차를 사거나, 마음에 드는 결혼 상대를 만나거나, 즐거운 여행을 하거나, 비즈니스가 잘 되거나, 직장에서 진급하거나, 친한 친구를 만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할 때 느끼는 행복감 같은 것을 생명의 풍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것들보다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 하는 자는 ... 하는 자 같이하라고 한 것은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것은 상대적이고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은 이 교훈을 하기 전에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한 “때”는 세상 종말이 오기 전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 기간이 단축되었다는 말은 세상이 완성될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완성될 종말이란 생명이 완성될 때를 가리킵니다. 생명이 완성될 때는 궁극적인 목적인 구원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생명 완성의 때가 임박했음을 진지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바울의 교훈을 따라 일상에서 과도하게 일희일비하지 않고 더욱 풍성한 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 완성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천사들과 같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에는 결혼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생명이 완성되기 때문에 그 종말을 오늘에 선취하여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처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를 믿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만이 아는 감춰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바울은 그 비밀을 알았고 우리도 그 비밀을 아는 자들이기에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살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친구 중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남은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직면하여도 슬퍼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남은 때가 많지 않다는 것은 나의 생명이 완성될 순간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현실로 진지하게 인지하고 있다면 임종을 맞게 된 사람이 온갖 일상에 연연하지 않듯이 상대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 초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세상을 폄하하고 현실에서 도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오히려 더욱 성실하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게 할 것입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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