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가톨릭 부흥이 던지는 놀라운 메시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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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일2025-04-1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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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각성 운동 시절의 이야기가 있다. 한 농부가 친구에게 조지 휫필드의 설교를 듣자고 했다. 믿지도 않으면서 왜 가냐는 친구의 말에 그는 답했다. "나는 안 믿어도, 그는 진짜 믿으니까." 이 이야기는 인간 영혼의 깊은 곳을 보여준다. 확신은 매력적이다.
▲영국의 변화는 미국 교회를 포함한 전 세계 교회에 보내는 경고이자 교훈이다.(AI 생성사진)
혼란한 시대에 사람들은 자신이 말하는 바를 실제로 믿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 아마 이것이 지금 영국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변화를 가장 잘 설명할 것이다. 수 세기 만에 처음으로 영국 가톨릭 신자 수가 성공회 신자 수를 넘어섰다. 이 현상에 대해 성공회 사이트에서는 깊은 통찰의 글을 내놓았다.
특히 젊은 층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성공회 신자보다 많고, 런던에서는 이런 변화가 더욱 뚜렷하다. 유행을 따르는 예배나 진보적 신학이 아니라, 명확성, 연속성, 그리고 강한 신념 쪽으로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었을까.
변치 않는 교회, 변하는 교회
필자는 사회학자나 인구통계학자는 아니지만, 영국 성공회의 쇠퇴와 미국 성공회의 침체를 보며 이런 변화가 놀랍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은 기독교의 깊은 뿌리를 둔 '가지'와 같다. 하지만 성공회는 영국 문화에 깊이 뿌리내렸어도 계속 변화하는 '잎'에 가깝다.
전 세계 모든 성공회 신자들은 교회의 신학이 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정립 중이라는 것을 안다. 교리가 투표에 부쳐질 수 있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반면 로마 가톨릭은 민주적이지 않다. 문화에 신념을 묻지 않고, 선언한다. 이것이 혼란한 시대에 안정감을 준다.
여성 사제? 안 된다. 낙태? 절대 안 된다. 성별 유동성? 인정하지 않는다. 가톨릭은 이런 문제에 확고하다. 하지만 성공회는 공유된 통치와 민주주의를 선호하고 교황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늘 입장을 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교회가 가르침을 믿기를 원한다.
눈에 보이는 신앙의 힘
현대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는 '나와 예수님'의 개인적인 관계로 축소되곤 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관계"라는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국 내 이슬람의 부상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이슬람은 복장, 기도 시간, 금식 등 공적이고 실천적인 종교다.
로마 가톨릭 역시 이슬람처럼 단순히 관계가 아닌, '종교'를 제공한다. 고유한 리듬, 의식, 축일, 도덕적 기대치, 공동체 정체성이 있다. 숨길 수 없는 신앙이다. 반면 성공회, 특히 미국 성공회는 신념을 드러내길 주저하는 '익명성 기독교'처럼 보일 때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변화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톰 홀랜드, JD 밴스 같은 작가, 학자, 공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정교회와 뜻을 같이 하고 있다. 세속적 상대주의를 비판해 온 아얀 히르시 알리 같은 이들도 기독교에서 진지함을 찾는다.
이민과 신앙의 생명력
영국 내 가톨릭 성장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는 이민이다. 폴란드, 필리핀, 나이지리아 등에서 온 이들은 가톨릭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온다. 이들은 새로운 땅에 교회를 세우고, 가족 중심의 공동체를 이룬다. 그 과정에서 교회는 다시 살아난다. 문화적 융합이 아니라 신앙의 전수가 이루어진다.
이민자들은 그저 숫자가 아니라 생명력 있는 믿음을 가지고 온다. 영국 내 가톨릭은 이제 이민자 가족들로 인해 예배당이 채워지고 있으며, 이들의 삶은 신앙이 단지 개인적 감정이 아님을 보여준다. 거기엔 고백뿐 아니라 실천이 있다. 교리뿐 아니라 삶이 함께 있다.
출산율과 윤리의 거리
이민자 국가들은 대체로 높은 출산율과 가정 중심의 삶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성공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성윤리의 기준을 완화해왔다. 1930년 람베스 회의에서 처음으로 피임을 허용했고, 1948년에는 이혼과 재혼에 대한 입장을 완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믿음과 삶, 신앙과 윤리를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신앙은 단지 무엇을 믿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살아가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톨릭은 여전히 이 연결고리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고, 사람들은 그 진지함에 끌린다. 믿음이 분명하면, 삶도 분명해진다.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이런 ‘분명함’이 강력한 힘을 가진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세 가지
결국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조용한 변화는 ‘확신, 명확성, 일관성’이 교회를 세우는 요소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준다. 이 요소가 약해질수록 교회는 힘을 잃고, 세상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 반대로, 그것을 회복한 교회는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가톨릭은 이 점에서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뿌리 깊은 신앙, 분명한 가르침, 그리고 세상 앞에서 숨지 않는 태도. 이 모든 것이 시대의 피로를 덜어주고 있다. 믿음이란, 결국 방향을 정해주는 나침반이어야 한다.
미국 교회가 주목할 교훈
이 흐름은 단지 영국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미국 교회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이제는 ‘보이는 믿음’이 필요하다. 명확한 진리와 공개된 실천이 없으면, 교회는 점점 더 잊혀진다.
개신교는 ‘인코그니토 크리스천’이 아니라, 일상 속에 드러나는 믿음으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예배당 안의 감정만이 아니라, 거리에서 보여지는 진실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구조나 조직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다시, ‘확신’에서 시작해야 한다.
마지막은 통계가 아니라 삶이다
수치상의 교세 역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흐름은 삶을 바꾸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흔들리는 시대, 흐릿한 신앙을 넘어서는 길은 분명하다. 진리를 진리로 가르치고, 믿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는 교회. 그것이 사람들을 다시 불러모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우리 교회는, 바로 그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교회는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가톨릭의 부상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그렇다. 확신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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