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외면한 대가, 프랑스 교회는 그렇게 권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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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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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요약] 1905년 프랑스의 정교분리법은 단순한 반종교적 움직임이 아니었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교회가 억울한 개인 대신 부패한 권력과 반유대주의 편에 섰던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아리스티드 브리앙이 설계한 이 법은 본래 '자유의 법'이었으나, 오늘날 이슬람 과격주의와 충돌하며 학교와 공공장소에서 종교적 표현을 엄격히 제한하는 '방패이자 칼'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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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프랑스 의회는 격렬한 논쟁 끝에 정교분리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교회의 정치 개입을 차단하고 공화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다. (AI사진)
한 명의 억울한 유대인 장교를 향해 교회가 돌을 던졌을 때, 프랑스 공화국은 십자가를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1894년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은 단순한 오심 스캔들이 아니었다.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가톨릭 교회가 반유대주의와 국수주의로 맞선 순간, 프랑스 사회는 교회가 민주주의의 동반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날 프랑스를 지배하는 강력한 세속주의 원칙인 '라이시테(Laïcité)'는 신앙을 탄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잃어버린 종교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탄생했다.
스캔들이 쏘아 올린 공
RFI(프랑스 국제 라디오)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현대 프랑스 사회의 종교관을 형성한 1905년 정교분리법(Law of 1905)은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거대한 스캔들 위에서 잉태됐다. 19세기 내내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1801년 정교조약 아래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성직자에게 급여를 지급하며 국가와 종교의 공존을 꾀했다. 공화파 정치인들은 교회가 근대적 개혁을 가로막는 보수 세력이라 의심했지만, 시스템은 유지됐다.
균열은 1894년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간첩 혐의로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으며 시작됐다. 프랑스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파와 군부 권위를 옹호하는 파로 쪼개졌다. 가톨릭 교회는 후자에 섰다. 교회 언론은 반유대주의 논리를 퍼날랐고, 국수주의 단체를 적극 후원했다. 공화파는 충격에 빠졌다. 정의와 진실을 수호해야 할 종교가 어떻게 불의와 타협할 수 있는가. 결론은 명확했다. 교회가 정치와 제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민주주의는 위협받는다.
타협의 기술자, 아리스티드 브리앙
1902년, 종교 문제가 선거의 핵심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변호사이자 온건 사회주의자인 아리스티드 브리앙이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에밀 콩브 총리는 바티칸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정교분리 위원회를 구성했고, 브리앙을 보고관으로 임명했다.
1905년 3월부터 시작된 의회 토론은 프랑스 의정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긴 논쟁 중 하나로 기록된다. 가톨릭을 옹호하는 왕당파와 세속을 주장하는 공화파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브리앙은 극단적인 대립 대신 중재를 택했다. 브리앙은 "우리는 종교 예배를 금지하는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법을 만드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목적은 종교 박해가 아니라, 국가 앞에서의 평등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있었다.
법안은 '라이시테'라는 단어를 직접 명시하지 않았으나, 그 원칙을 확고히 했다. 국가는 어떤 종교도 편들지 않고, 지원하지 않으며, 공공 기관에서의 종교적 표현을 금지한다는 제1, 2조가 이때 확립됐다.
성당으로 들이닥친 공무원들
법 시행은 순탄치 않았다. 교회 재산을 종교 단체로 이관하기 위해 정부는 성당과 사제관의 재산 목록을 작성해야 했다. 공무원들이 성소에 들어와 집기를 조사하는 모습은 신자들에게 신성모독으로 비쳤다.
북부 벨기에 국경 인근 플랑드르 지역과 오트루아르 지역에서는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보에슈페 마을 교회에서는 재산 조사를 막으려던 35세의 정육점 주인 제리 기셀이 충돌 도중 사망했다. 교황 비오 10세는 1906년 회칙 '베헤멘테르 노스'를 통해 "국가가 교회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절대적으로 거짓이며 치명적인 오류"라며 격노했다. 프랑스와 바티칸의 외교 관계는 1921년까지 단절됐다.
특이하게도 알자스-모젤 지역은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1871년 보불전쟁 패배로 독일령이 되었던 이 지역은 1918년 프랑스에 반환된 후에도 나폴레옹 시대의 정교조약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지역의 성직자들은 내무부로부터 월급을 받으며, 공립학교에서 종교 교육이 의무적으로 이뤄진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현대의 전쟁
1905년의 법은 오늘날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과거의 갈등이 가톨릭과의 싸움이었다면, 현대의 갈등은 주로 이슬람 및 이민자 사회와의 문화적 충돌이다. 1989년 크레유의 한 학교에서 무슬림 여학생들이 히잡 착용을 거부하며 등교가 정지된 사건은 신호탄이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2003년 세속주의 수호를 천명했고, 이듬해 공립학교 내에서 히잡, 키파(유대인 모자), 큰 십자가 등 종교적 상징물의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긴장은 2015년 샤를리 에브도 테러와 2020년 교사 사무엘 파티 피살 사건으로 정점에 달했다. 수업 시간에 표현의 자유를 가르치던 파티 교사가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 살해당하자, 학교는 세속주의 가치를 지키는 최전선이자 타깃이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2021년, 1905년 법을 개정하여 종교 단체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해외 자금 유입을 차단하고 급진주의를 막겠다는 취지다. 브리앙이 꿈꿨던 '자유의 법'은 이제 국가 안보와 공화국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엄격한 통제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정의를 외면했던 1세기 전 교회의 선택이, 오늘날 종교 전체를 공적 영역에서 밀어내는 거대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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